장자,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윤재근/도서출판 둥지
현대인은 ‘나’를 강조하면서도 그 ‘나’를 잃어버리고 살아간다. ~ 현대인은 이러한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믿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철저하게 유위문화(有爲文化)를 믿는 까닭이다.
사람의 냄새는 몸에서 나는 놈보다 마음에서 풍기는 것들이 더 역해서 냄새가 맛으로 변하여 맵고 짜고 떫고 시어서 마음속이 마치 쉰 밥통같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된다.
《장자》가 주는 재미나 놀라움이란 절대의 자유 그것이다. 아무것에도 걸림없이 그저 유장하게 사는 일들이 엮어져 있어서 자유로운 생활이 어떤 것인가를 만나보게 한다. 《장자》는 무엇이든 있는 것이면 스스로 있는 것으로 본다. 스스로 있는 것은 자연이다.
자연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장자는 소의 네발이라고 일러준다. 그리고 문화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 장자는 소의 코뚜레라고 일러준다. 소의 네발은 소를 얼마나 편안하게 하는가, 하지만 소의 코뚜레는 소를 얼마나 힘들게 얽어매고 아프게 하는가.
자유와 자연은 같은 말이다. 자연은 스스로 그렇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 그대로인 것은 자유 그대로인 것이다. 완전한 자유를 인간은 왜 빼앗기고 마는가? 자기를 고집하기 때문이며 공적을 보다 많이 이룩하려는 욕망 때문이며, 자기의 이름을 높이려는 야심 때문이다.
자연이 보장하는 자유는 무한하다. 사물의 변화에 종속되지 않고 항상 사물과 함께 노닐 수 있기 때문이다. 온갖 것을 동일하게 보는 자연의 자유는 욕망을 넘어서 있는 자유(自遊)이다.
“ ~ 자연은 내게 모습을 주었네. 그리고 삶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였고 늙음으로 나를 편하게 하였고 죽음으로 나를 쉬게 해주네. 그러니 내 삶을 좋다고 함은 바로 내 죽음도 좋다함일세”
태어나면 태어나서 좋고 죽으면 또한 죽어서 좋다. 삶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유와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이보다 더 쉽게 누가 이야기해 줄 수 있을 것인가?
자연을 따른다 함은 스스로를 잊는다 함이다. 스스로를 잊는다 함이란 스스로의 욕망을 버린다 함이다. 욕망을 버림으로써 자기 실현이 가능하며 그렇게 실현된 자기는 무심(無心)하며 무유(無爲)함을 말하게 된다.
하늘이나 땅은 자기를 모른다. 만일 하늘이나 땅이 자기를 고집한다면 만물은 모두 천지의 노예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천지는 만물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둘 뿐이다.
사람은 자신이 조롱을 당하면 화를 낸다. 남이 자기를 비아냥거려도 사람은 참지를 못한다. 사람들은 다 그만한 그릇의 마음새를 가지고 도토리 키재기를 하는 노릇을 하면서 대단한 명예가 멍들었다고 분을 참지 못하는 거다. 아웅대면서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대적하려고 한다.
자기의 감정에 주인이 된 사람은 자기를 잊을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러나 자기의 감정에 노예가 되는 사람은 자기를 잊지 못하는 사람인게다. ~ 나를 잊어버렸다는 자기는 분명 자신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었음을 우리는 알게 될 수도 있다.
“당신은 사마귀를 아시지요. 그 놈은 제 팔뚝을 휘둘러 수레와 맞서 보려고 합니다. 제 힘으로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몰라 그러는 게지요. 자기 재능의 훌륭함만을 자랑하려는 게지요. 경계하고 삼가야지요. 당신 자신의 훌륭함을 자랑하여 상대방에게 거역하면 위험합니다.”
삶이 변덕스러운 것 역시 사는 일이 서툰 탓이다. 마음잡고 마음에 따라 사는 사람은 삶의 길을 바꾸어 새 길을 다시 서툴게 걷지 않아도 된다. 삶이 막막할 때는 트이게 하면 되고, 삶이 고달프면 낙락하게 하면 된다.
이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 마음을 쓸 때는 남김없이 쓰고 마음을 거두어도 될 때는 마음을 풀어 주면 된다.
우리는 왜 성급하고 억척스럽고 악착스럽게 삶에 매달리는 것일까? 아마도 인간은 유한한 존재라는 강박관념 탓이 아닌가 싶다. 산다는 일은 어느 날인가 갑자가 죽음으로 마감해야 한다는 공포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죽음과 삶을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만 본다면 삶의 욕망과 죽음의 공포가 우리를 짓눌러 살맛을 앗아가고 말 것이 아닌가. 죽음이란 것도 있고 삶이란 것도 있을 뿐이지 그것이 서로 대립하고 아우성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삶의 욕망이나 죽음의 공포가 우리를 메마르게 하지는 못할 것이 분명하다.
항상 불행의 늪에서 허우적거린다. 그 늪에서 빠져 나오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그 길은 어디에 있을까? 바로 자기가 없는 쪽으로 나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를 버리면 행복하게 된다.
내 몸 속의 간이 쓸개보다 더 중하다고 여길 것인가. 다 같이 중하다고 누구나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이 곧 마음을 밝게 하고 가볍게 한다. 살고 죽는 것을 잊어버리고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짓을 잊어버리면 한계가 없는 곳으로 뻗어나간다.
남에게 마음을 주는 일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속을 내보이거나 털어내야 하는 까닭이다. ~ 열 번을 잘해 주어도 한 번만 잘못하면 잘한 열 번이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더라도 그 사랑을 잃는 경우가 있다. 삼가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 아무리 목이 말라도 한 사발의 물이면 족하고 아무리 배가 고파도 한 그릇의 밥이면 족하다. 참새는 참새만큼 먹어야 하고 돼지는 돼지만큼 먹는 법이다. 먹는 것도 이처럼 알맞게 먹어야 하고 그 양을 넘어서면 뒤탈이 나는 법이다.
지금 세상은 형벌을 면하는 게 고작일 뿐, 행복은 깃털보다 가벼워도 담을 줄 모르고 불행은 땅보다 무거워도 피할 줄을 모른다. 그만두게 그만뒤~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마음을 가볍게 하는 것이다. 불행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다.
마음은 참으로 묘하다. 산천에 흐르는 물은 고여 있기만 하면 썩어 버리지만 마음은 흐리기만 하면 썩어 버린다. 마음이 살아서 숨을 쉬려면 고여 있어야 하고 마음이 상해서 썩어지려면 한사코 흘러야 한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소인(小人)은 정신없이 쏘다녀 마음을 잃어버리고 대인(大人)은 때때로 가만히 마음을 가누어 그 마음이 거울이 되게 하여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연습을 하는 게다. 끝.
사진출처: [출처: "성공학 사전 - 내 삶의 열정을 채워주는" 중에서] '10.11.24 '10.12.26 '12.5.22 '14.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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