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스크랩] [진천/벽암리] 넉넉함이 좋은 풍경여행, 진천 길상사(吉祥祠)

餘香堂 2015. 6. 19. 05:09

역사를 잊게하는 고즈넉한 옛집의 풍경

진천 길상사(鎭川 吉祥祠)

충북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 508  /  043-539-3835

 

진천에 자리한 길상사입니다.

김유신 장군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으로

무엇보다,

넉넉한 풍경이 참 좋습니다.

고즈넉한 옛집, 계단식으로 이어진 담장.

그리고 주위를 둘러싼 숲의 풍경이 참 좋은 곳입니다.

 

영정을 모신 흥무전과 김유신 장군 사적비

 

 

 

길상사는 김유신(金庾信)장군의 표준영정을 봉안한 사당입니다.

국내 발행, 발간된 영정들의 그림들과 사진들을 모아 표준화한 영정으로 교과서에 실리는 영정입니다. 진천군청의 지척으로 쉽게 찾아 볼수 있는 곳에 자리하며, 지방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흥무대왕 김유신(興武大王 金庾信, 595~673),

신라의 명장으로 본관은 김해(金海)로 가야국 김수로왕의 12대손입니다.

아버지는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를 지낸 각찬 김서현(角飡 金舒玄)이며, 어머니는 지증왕의 증손녀이자 갈문왕의 손녀 만명부인(萬明夫人)사이에서 임신 20개월만에 태어났다고 전합니다.

진평왕31년(609년), 15세 되던해에 화랑이 되어 낭도를 이끌고 수련하였으며, 진평왕51년(629년)에 중당(中幢)의 당주(幢主)로 낭비성전투에 출전하여 고구려군을 격파하여 압량주(押梁主, 경북 경산)의 군주가 되었습니다. 

선덕여왕13년(644년)에는 소판(蘇判)이 되어 상장군에 올라 백제군과의 싸움에서 승전하였고, 진덕여왕1년(647년)에는 반역을 꾀하던 비담 염종(毗曇 鹽種)의 반군을 토벌하고, 무산성 감물성에 침입한 백제군을 격퇴하였습니다. 이듬해에 백제의 대량주(大梁州, 경남 합천)를 공격하여 12성을 함락시킨 공으로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의 자리에 올랐으며, 진덕여왕3년(649년) 백제가 대군을 이끌고 7성을 공격하자 중앙군편대를 지위하여 도살성(道薩城, 충북 증평? 진천?)에서 격파하였습니다. 

이처럼 신라에서의 뚜렷한 공적들은 가야왕족 출신으로서는 불가능했던 신라 정권의 중심에 서게 되는 결과가 되었으며, 654년 왕이 후사없이 죽었을때에도 상대등 알천(上大等 閼川)과 상의하여 자신의 매제인 김춘추(金春秋, 604~661)를 왕으로 추대하니, 이가 바로 신라 최초의 진골출신 첫째임금인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입니다.

이듬해 대각간(大角干)이 되었고, 그 해 무열왕의 셋째딸인 지소와 혼인하였습니다. 무열왕7년(660년), 상대등이 되어 당나라 소정방(蘇定方)과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황산벌에서 계백의 결사대와 고전끝에 승리, 사비성(泗沘城)을 함락시키고 백제를 멸망시킴으로서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하게 됩니다. 문무왕8년(668년), 대총관(大摠管)가 되어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킬때 병으로 출전하지 못하였으나 문무왕을 대신하여 신라의 국내 통치를 맡았으며, 고구려 멸망 후 태대각간(太大角干)이 되었습니다.

 

문무왕13년(673년), 79세의 일기로 별세하였고,

금산벌에 장사를 지냈며 비를 세워 공과 명예를 기록하게 하였고 민가를 정해 묘소를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흥덕왕10년(835년)에 들어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하면서 경주 서악서원(西岳書院)에 제향하게 됩니다. 묘소는 사적 제21호로 지정되어 경주에 있으며,

김유신의 출생지인 진천에는 태령산 아래 사우를 짓고,

고려시대까지 향과 축을 내려 춘추로 국행제를 열었으나, 조선에 들어 관리 소홀과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페허가 되어가던것을 철종2년(1851년)에 들어 백곡면에 '죽계사(竹溪祠)'를 세워 영정을 모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종1년(1864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다시 폐허가 되었고, 1926년에 장군의 후손들의 노력으로 현재의 자리에 장군을 기리는 사당을 건축하기에 이릅니다. 이 후, 1976년 사적지 정화사업을 통해 '길상사(吉祥祠)'를 세워 영정을 봉안하고 제향을 하고 있으며, 지방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원래의 사우가 있던 태령산 아래 담안밭에는 1983년에 생가를 복원하였고 유허비각, 재실을 세워 놓았습니다.

유허비는 1983년에 세워진 비로 '흥무대왕김유신유허비'라 새겼고 비문은 육당 최남선이 짓고 글씨는 시암 배길기가 썼습니다. 거북대좌 위에 오석비신을 세우고 이신을 얹었습니다. 그 옆으로 정면4칸, 측면 1칸반의 재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당시 김유신이 20개월 만에 태어 났을때, 그의 태를 태령산 정상에 묻었다고 전하며, 1999년 국가사적 제414호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습니다. 현재 태령산 정상에는 태실과 함께 당시 우물로 사용하던 '연보정(蓮寶井)'이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으며, 주위로는 김유신이 말을 타고 훈련하였다는 '치마대(馳馬坮)'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길상사는 원래 생가지와는 떨어져 있는 것일가요?

보통의 경우, 태어난 곳이나 죽은곳, 또는 살아생전에 자리했던 곳에 세워지는 것이 일반적인 반면 김유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길상사는 그들과는 관계 없는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사실 확인은 어려우나 길상사 터에 관련한 야사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원래의 길상사는 현재 자리의 뒷산인 도당산 너머의 잣고개(행정리)와 마을 중간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사당의 앞을 지날때면 누구나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고 합니다. 이유인 즉, 장군의 앞을 지나는 길은 말을 타고 그대로 지나면 말굽이 땅에 붙어 움직이지 못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던 어느날, 충청현감이 길상사의 앞을 지나면서 말을 타고 지나려다가 말굽이 땅에 붙어 꼼짝을 하지 않자, 화가 난 충청감사가 말의 목을 베어 사당안의 영정에 말의 피를 뿌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감사는 얼마가지 못하고 개울가를 건너다가 빠져 죽었습니다. 그 일이 있던 날 밤, 진천현감의 꿈에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 말하길, "나는 김유신이다. 무례한 충청감사의 행동에 집과 몸을 더렵혀 더이상 머물수 없으니 사당을 옮기라."면서 동헌에서 백지 두장을 날려 떨어지는 곳에 사당을 지으라고 알려주자, 다음날 아침, 꿈속 노인의 말대로 백지 두장을 하늘에 띄우니 한장은 하늘 높이 사라졌고, 나머지 한장은 낮게 떠 날리다가 어느 터에 내려 앉았고, 그 자리에 사당을 지으니 그곳이 지금의 길상사 터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시원한 하늘, 푸른 나무들의 숲이 보기 좋은 날,

길상사의 입구는 홍살문까지 시원한 은행나무의 푸르름이 양쪽으로 도열하고 섭니다. 가을이라면 노랗게 물든 아름다운 길이 연출 될것 같습니다. 홍살문에 들어서면 너른 광장과 시원스럽게 펼쳐진 경내를 바라볼 수 있는데요. 제법 가파른 계단으로 구성 되어 있습니다.

첫 계단을 따라 오르면 길상사(吉祥祠)라 쓰인 외삼문을 만나게 되고 그 위에 더 가파른 계단을 만나게 되니 경내로 들어서는 내삼문으로 진호문(鎭護門)입니다. 내삼문을 지나서야 영정을 모신 흥무전(興武殿)에 닿게 되지요.

높이 만큼이나 시원한 바람이 스치듯 지나는 곳입니다. 담장들의 높이는 계단과 마찬가지로 층층을 이루고 있는 모습으로 옛 집의 한 기억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리 많은 사람이 찾지 않는 관계로 들어서며 나올때까지 길손 혼자였습니다.

유유자적한 걸음을 마음껏 즐기고 왔습니다.

 

 

길상사 전경

 

 

 

외삼문

 

내삼문 오르는 계단과 풍경

 

 

외삼문

 

길손이 참 좋아라 하는 구도입니다.

 

길상사의 중심공간 흥무전

 

 

 

 

 

길상사의 멋

역사속의 인물을 만나보는 것도 좋은 여행이지만, 길상사는 특히나 아름다운 풍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봄과 가을이면 환상적인 그림같은 풍경을 만날수 있다는 확신이 서는 곳입니다.

 

길상사 관리사무소

 

모운당(慕雲堂)

길상사 경내에 자리한 건물로 관리사무소의 뒷편에 자리한 제기들을 관리하던 곳이었습니다.

헌데 지금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관리가 되지 않고 있네요. 독특한 구조의 한옥이 멋스러운데 방치되어 있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by 박수동

www.gilson.asia

출처 : 길손의 旅行自由
글쓴이 : 길손旅客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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