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적

[스크랩] 백제의 도읍지와 역사의 향내(2) : 웅진,사비시대(충남 부여,공주)

餘香堂 2015. 7. 7. 00:43

백제의 도읍지를 따라 역사의 향내를 맡아가며(2)

백제문화권 답사(2)- 웅진, 사비시대    

웅진시대 (64년간)

475(22대 문주왕) ~ 538(26대 성왕 15

 

개로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문주왕은 웅진(熊津, 지금의 공주)으로 도읍을 옮겼으나, 귀족 세력의 반란으로 피살당했다.

 

< 사진 : 논산 관촉사미륵불 2013년>

 

뒤를 이은 삼근왕과 동성왕도 살해당하는 등 백제는 극도의 혼란에 빠졌으나 ,

동성왕의 둘째 아들인 사마왕 곧 25대 무령왕(武寧王, 재위 501~523)에 이르러 정치적 혼란을 극복하고, 호남평야 개발에 전력을 기울이며(김제의 벽골제) 좁아진 국토이지만 경제적 기반을 충실히 닦아나가는 한편 백제 고유의 문화를 꽃피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무령왕은 키가 8척 장신이며,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인자관후하여 민심이 잘 따랐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22 담로제를 실시, 일정 지역에 왕족을 보내 그곳을 통치하게 하는 등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강화했다.

 

또한 일본에 오경박사인 단양이와 고안무를 보내 역사천문지리의술 등을 전파시켜 고대 아스카 문화를 꽃 피우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공주 도읍기의 역대 왕들이 신하들에 의해 비명에 갔던 데 비해 무령왕은 62세로, 당시로는 천명을 다한 나이에 생을 마쳤다.

 

주요 유적과 유물 - 웅진성(공산성)과 추정 왕궁터, 송산리 고분군과 무령왕릉(발굴 유물들은 국립공주박물관에 전시)

 

 

사비시대(123년간)

538(26대 성왕 16) ~ 660(31대 의자왕 20)

무령왕의 아들로 신라의 진흥왕에 비견되는 성왕은 재위 16년에 사비(지금의 부여)로 천도하고 국호도 남부여로 바꾼다고구려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한 곳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판단한 성왕은 신라와의 연합 작전을 통해 76년만에 한강유역을 고구려로부터 되찾았으나 신라에게 기습 점령당한다(553).

 

이로써 433년 이래 120여년간 이어져 오던 나제동맹을 깨지고 성왕은 신라에게 보복하고자 가야의 원군까지 끌어들여 전투를 벌였으나 관산성에서 전사하고 만다.

 

그뒤 귀족 세력들에 의해 옹립된 무왕은 왕권회복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선화공주와 결혼, 신라와의 유대관계를 다지고 정림사를 창건한다 

 

무왕의 아들인 의자왕은 즉위한 이듬해인 642년에 귀족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면서 왕권을 강화시키고 민심을 안정시킨 뒤 신라에 대한 공격의 고삐를 바짝 잡아당겼다.

 

그러나 당나라에 대한 외교교섭에서 신라에 밀리고, 자만심이 지나쳐 집권 말년에 들어 방탕한 생활로 빠진 의자왕의 실정은 결국 백제를 멸망의 길로 치닫게 했다.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백제는 이후 일본의 원정군까지 동원하며 3년간에 걸쳐 활발한 부흥운동을 전개했으나 내부 분열로 인해 이마저도 시들해지고 백제의 역사는 신라와 당나라에 의해 철저히 짓밟혀졌다.

 

주요 유적과 유물 - 부소산성과 그 안의 군창터와 움집터, 국립부여박물관 소장의 금동용봉봉래산대향로와 금동미륵반가사유상, 정림사지 오층석탑, 능산리 고분군, 미륵사지...

 

이번 답사 여행 중 꼭 눈여겨보고 깊이 헤아려볼 것,

아래 내용 외에도 여러분들 각자가 손꼽아봅시다. 적어도 세 가지 이상은 담아 가야겠지요? 

 

1. 무령왕릉(왼쪽 사진) 발굴 유물들을 통해서 본 백제와 일본과의 관계 무령왕릉의 관재로 쓰인 나무는 일본에서만 나는 금송(11)으로 만들어져 일본과 백제와의 관계가 깊음이 실증적인 자료로 확인되었다.

 

2001년 겨울 아키히토 일본 천황은 나 자신은 간무(桓武재위 781~806)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일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에 한국과의 연을 느낀다라며 무령왕은 일본과 관계가 깊어 이때부터 오경박사가 대대로 일본에 초빙됐다

 

또 무령왕의 아들 성명왕(聖明王성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달해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자 일본사람들은 이제 우리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그곳을 어찌 다시 찾아 볼 수 있을 것인가라는 한탄이 일본서기에 나오며, 부여풍 왕자의 백제부흥운동을 돕고자 전선(戰船) 400척과 구원군 27천명을 보냈음이 밝혀졌다.

 

비디오 자료와 함께 백제가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과 문화에 끼친 영향력에 대해 깊이 공부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2. 의자왕의 삼천궁녀는 사실일까? 이들이 떨어져 죽었다는 낙화암 전설의 진실은 무엇일까 생각해봅시다. 

3. 정림사지오층석탑에서 느껴지는 목탑의 부드러운 느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꼼꼼히 관찰해봅시다. 

4. 백제금동용봉대향로에 담겨 있는 백제인들의 수준높은 문화와 예술의 경지가 얼마만한지 헤아려봅시다.

 

백제금동용봉대향로에 대하여

 

국립부여박물관, 백제금동대향로와 창왕명석조사리감 자료에서 향로(香爐)는 인도와 중국 등 고대 동양에서 냄새 제거와 종교의식, 그리고 구도자의 수양정진을 위하여 향을 피웠던 도구로 중국에서는 훈로(薰爐)라고도 한다.

 

중국 전국시대 말기에서 하나라에 이르는 시기에는 바다를 상징하는 승반 위에 한 개의 다리와 중첩된 산봉우리형의 몸체를 갖춘 박산향로(博山香爐)가 많이 만들어졌고 이것이 사실상 중국박산향로의 시원형식이다.

 

박산향로는 당시의 산악숭배, 무속, 불로장생의 방생술과 양생술, 무위사상과 음양사상 등을 쫓는 신선 사상이 가장 유행했던 북중국 지역에서 가장 많이 출토되고 낙랑의 무덤에서도 발견된 바 있다.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우연하게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좌측 사진)는 한 마리의 큰 용이 용틀임을 하는 형상으로 몸통을 받들고 있는데 몸통은 갓 피어나려는 연꽃봉오리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꼭대기에는 봉황 한 마리가 날개를 활짝 편 채 서 있다.

 

향로는 높이가 62.5cm, 몸통 최대지름 19cm, 무게 11.8kg이나 되는 유례없는 대작인데다 용과 봉황의 비중이 상당히 두드러져 있다.

 

전체적인 형태로 볼 때 크게 뚜껑부, 몸체, 다리부분으로 별도로 주조되어 하나로 만들어졌다.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후 정치적 안정을 되찾은 6세기 중엽에 백제인들의 정신세계와 예술적 역량이 함축되어 이루어진 백제 공예품의 진수이다. 구체적으로 향로에 새겨진 각종 문양을 하나씩 살펴보면 감상하자.

 

백제의 도읍지를 따라 역사의 향내를 맡아가며 (보완 자료)

 

추운 겨울 방학, 웅크리고 집에만 틀어 박혀 컴퓨터와 씨름하거나, 학교 공부의 연장선상에서 학원을 오가거나 학습지를 푸느라 다소 짜증나 있을 아이들과 하루종일 아이들 수발에 여념없을 어른들에게 문화탐방 태(太)의 겨울답사를 추천합니다.

 

책 속에 갇혀버린 박제화된 역사가 아닌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으로 여러분을 안내합니다.

 

이번 겨울 답사는 백제의 도읍지를 따라가보려 합니다. 한반도의 중심지와 비옥한 영토를 차지하여 넉넉한 생활을 꾸려갔던 백제,

 

그래서 부드럽고 온화하게 다가오는 백제 문화, 하지만 무령왕릉과 금동용봉봉래산 대향로를 통해 새롭게 부각되는 백제의 세력. 한반도에 갇혀버려 늘 이웃의 침략에 대비하기에 급급했던 역사가 아닌, 일본의 역사를 세우고, 중국의 남쪽 지방까지 진출했을 대제국으로서의 가능성을 열어 놓은 우리의 역사, 백제의 역사를 여러분과 함께 찾아가보려 합니다.

 

단순한 유적 답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풍부하고도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와 비디오 자료 등을 통해 흥미로운 역사 추리도 함께 할 것입니다.

 

 왜 백제는 서울에서 공주로, 공주에서 부여로 도읍지를 옮겼나?’를 생각하며 먼저 공주의 공산성(본래는 웅진성으로 조선시대에 석축으로 개축하며 부른 이름)으로 달려갑니다.

 

금강을 끼고 있는 이곳은 백제의 웅진 시절 왕궁터로 추정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연못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당시 농업을 발전시킨 백제인들의 보와 저수지 축조 기술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성내를 빠른 걸음으로 돌아본 뒤 우리나라 고고학계를 발깍 뒤집어 놓고 전국민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무령왕릉으로 갑니다. 이 무덤의 발굴로 공주가 우리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왔고,우리들은 비로소 백제 문화의 진면목을 알 수 있게 되었으며, 제국으로서의 백제를 조심스럽게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여기서 발굴된 유물은 모두 국립공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니 당연히 들려야겠지요?

 

유기농으로 차린 맛있는 점심을 남김없이 먹은 뒤, 힘을 내 박물관내는 물론 뜰도 꼭 둘러보아야 한답니다. 온통 보물 천지랍니다. 박물관 바로 앞에는 무령왕의 관으로 썼던 세계 유일의 11속밖에 없는 금송이 일본에서 건너와 늠름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답니다. 향내 맡기와 솔잎 관찰도 빼놓으면 안된답니다.

 

무령왕릉의 훌륭한 유물들과 금송 향기의 의미를 짚어가며 여정에 따라 부지런히 부여로 달립니다. 도중에 만나게 되는 조선말의 치열하고 처절했던 동학농민군들의 전투지였음을 기리는 우금치전투전적비에서 잠시 마음을 가다듬어야겠지요?

 

근처에는 동학농민군들의 곰나루 마지막 격전지로 결국은 참패한 농민군들의 시신이 골을 메웠다해서 지명마저 송장배미로 바뀐 전적지도 있답니다.

 

20분 정도 달리다보면 부여 시내에 닿게 됩니다. 욕심같아서는 12일 코스로 잡아 이것저것 차분하게 안내하고 싶은데 경제 사정이 어려워 형편이 펼 때로 미루었답니다.

 

대신 여러분들의 걸음걸이가 좀 바빠져야겠지요? 짧은 겨울 낮이라 마음이 급하네요. 그래도 부소산성에 올라서 석양에 물드는 백마강을 바라보며 백제 멸망을 추억해야겠지요?

 

산성내에는 백제의 마지막 3충신의 애국심을 기리는 삼충사도 있고, 지금도 땅을 파헤치면 탄화미가 나온다는 군창터도 있으며 그 옆에는 백제군인들의 움막터도 있답니다.

 

부지런히 둘러보고 삼천궁녀의 전설을 간직한 그 유명한 낙화암에 올라 애도를 표한 뒤 고란사로 내려가 고란초를 바라보며 목을 축이고, 백마강의 유람선에 몸을 싣고 나당연합군에 무너진 백제의 영화를 붉게 노을지는 백마강에서 찾아야겠네요.

 

상념에 젖다보면 구드래나루에 도착한답니다. 서울로 가는 버스가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네요. 너무 늦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래도 괜찮지요? 늦잠을 자도 방학이니까.

 

예전에 백제의 도읍지였을 때의 부여땅에는 탑이 매우 많다고 했는데 지금은 유일하게 정림사터의 오층석탑만이 백제 멸망의 아린 추억을 간직한 채 1,400여년 동안 비바람을 맞으며 장중하게 서 있답니다.

 

오는 길에 들릴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백제는 멸망 후 이곳저곳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지요?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흑치상지란 인물과 그의 검은 이빨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이며, 일본은 왜 27천의 군사와 4백여척의 배를 보내 백제부흥군을 도왔는가?

 

백제의 역사를 다시 보게 될 때 우리는 그들의 후예로서 가슴 뿌듯한 자긍심을 느끼며, 자신감있게 미래의 역사를 설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출처 : 2004家苑 어린이.학부모 문화유적답사 안내 프로그램 자료집>

                                           

출처 : 家苑 이윤숙의 한자와 유학경전 강의(경연학당)
글쓴이 : 法故創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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