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望詞 (동심초)
설도(薛濤, 768~832)
風花日將老 (풍화일장로)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佳期猶渺渺 (가기유묘묘)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不結同心人 (불결동심인)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空結同心草 (공결동심초)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랴는고.
<해 설>
설도는 당나라의 유명한 기생이다. 사람들은 이 시나, 지은이는 몰라도, <동심초(同心草)>라는 가곡과 가사는 잘 안다. 시쳇말로 <오리지널>은 몰라도 <짝퉁>은 아는 셈이다.
우리는 흔히 기생(妓生)하면 무조건 요즘의 술집 여자로 생각한다. 그러나 예전의 기생들은 단순히 술시중을 들거나 몸을 파는 헤픈 여자들이 아니었다. 또 이렇게 얘기하면 요즘 술집 여자들이 들고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하기야 예전의 기생들 가운데서도 수준이 떨어지는 기생도 있고, 요즘 술집 여자들 가운데서도 그럴듯한 문화,예술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여자도 있을 것이니, 시공을 초월해서 다 사람 나름인 것이다.
각설하고, 설도 얘기로 돌아가자. 당대(唐代) 기생의 경우 명기(名妓)가 되려면 가무음곡(歌舞音曲)은 물론 시를 짓는 소양도 갖춰야 했다. 지위와 교양이 있는 남자들은 말 그대로 재색(才色)을 겸비한 명기들과 품위 있는 대화를 나누고, 서로 시를 지어 화답하는 데에서 지적인 만족감과 문화적 우월감을 느끼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런 조건을 가진 당대의 기생들 가운데서도 설도는 단연 뛰어난 존재였다. 그녀는 아버지가 세상을 뜬 후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기생이 되었다고 한다.
설도를 가장 잘 이해해 준 사람은 서천의 절도사 위고(韋皐)였는데, 설도가 스무 살이 될까 말까 한 나이였을 때 그는 이미 마흔 줄에 들어서 있었다. 후원자 위고의 강력한 뒷받침으로 기생시인 설도의 명성은 성도 일대만이 아니라 곧 수도 장안에까지 알려졌는데, 시인으로서 설도의 명성은 눈부실 정도였다. 그녀가 사십대에 접어들어 한동안 성도 교외의 명승지인 완화계(浣花溪)에 은거하면서 창작활동을 계속했는데, 특히 수질이 좋은 물을 사용하여 단시(短詩)를 쓰기에 안성맞춤인 소형 편지지를 만들어 냈다.
그녀는 직접 만든 붉은 종이에 자신의 시를 적어 여러 연인에게 주었다. <설도전(薛濤箋)>이라 불린 이 종이는 멀리까지 이름을 떨쳤으며, 주문이 쇄도해서 설도의 생활을 많이 윤택하게 해주었다.
설도에 얽힌 일화가 하나 있는데 위고는 그녀를 <여교서(女校書)>라 칭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 뒤 설도와 교분이 있던 무원형이 재상으로 들어가자, 그녀의 문학적 재능을 높이 사서 설도에게 <교서랑(校書郞)>의 벼슬을 주자고 건의할 정도였다. 그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 이후부터 사람들은 설도를 여교서(女校書)라 불렀다. 후대 사람들이 기생을 교서라 부르게 된 것도 설도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옛날 사람들이 부러울 때가 많다. 설도나 황진이가 있을 때 태어났더라면, 그녀들과 술 한잔 나누면서 시를 읊고, 인생을 이야기하고, 풍류를 즐겼을 텐데 하는 허황된 꿈 때문이다. 하기야 나 같은 소인배들은 기생있는 술집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고, 주막에서 나이든 주모에게 구박이나 받으며 막걸리 몇 사발 걸치다가 집으로 갈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춘망사(春望詞)는 봄을 기다리는 노래라는 뜻으로 우리가 흔히 부르는 <동심초>의 노래 제목과 가사는 시인 김억(金億, 1893~?)이 이 시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춘망사 4수 가운데 제3수이다. 결동심초(結同心草)는 풀잎을 동심결(同心結)의 형태로 묶다인데, <동심결>은 사랑하는 두 사람의 마음을 영원히 하나로 맺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죽기전에 꼭 읽어야 할 한시-
- 동심초 조수미 -
동 심 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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