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춘망사(春望詞) ☆★☆
- 봄을 기다리는 노래 -
설도(薛濤)
一.
花開不同嘗(화개보동상) 꽃이 피어도 같이 즐길 이 없고
花落不同悲(화락부동비) 꽃이 떨어져도 함께 슬퍼할 이 없네.
欲問相思處(욕문상사처) 임이 생각하는 곳은 어디 메 일까?
花開花落時(화개화락시) 때 맞춰 꽃들만 피고 지는구나!
二 .
攬結同心草(람결동심초) 풀을 따서 한 마음으로 묶어
將以遺知音(장이유지음) 내 노래를 아시는 님에게 보내야 겠다.
春愁正斷絶(춘수정단절) 봄날의 시름은 이렇게 끊어 버렸지만
春鳥復哀吟(춘조복애음) 봄새는 또 다시 슬피 우네요.
三.
風花日將老(풍화일장노) 꽃은 바람에 매일 시들어 가고
佳期猶渺渺(가기유묘묘) 만날 기약은 오히려 아득하기만 하니
不結同心人(부결동심인) 마음을 같이 묶지를 못하고
空結同心草(공결동심초) 헛되이 풀잎만 묶었구나.
四.
那堪花滿枝(나감화만지) 어찌 견디리 꽃이 가득 핀 나뭇가지
翻作兩相思(번작양상사) 오매불망 님 생각에 괴롭기만 하다.
玉箸垂朝鏡(옥저수조경) 아침거울에 떨어지는 옥 같은 내 눈물
春風知不知(춘풍지부지) 봄바람은 내 마음을 아는가 모르는가?
우리나라에 여류시인으로서 "황진이"가 있다면 중국에는 당나라 때에 기녀로서 여류시인 설도(薛濤 790 - 832)가 있었다. 설도의 자는 공도(洪度) 어렸을 적부터 시문(詩文)에 재능이 뛰어났었다. 설도는 실연한 사연으로 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고 ,비분상심의 감정을 붓끝에 모아내어 시를 썼다. 도교의 사제로 불리웠던 그녀는 명문가의 후예였는데 선조는 당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 시대에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우리에게는 원한이 맺혀 있는 설인귀(薛仁貴)라고 전해온다.
그녀의 생몰 연도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지만, 두보가 죽은 해에 그녀의 나이는 서 너 살 정도였다. 원래는 장안(長安) 출생이었지만, 사천성 성도(成都)의 자사(刺史)로 부임한 부친을 따라 성도에 와서 살게 되었는데, 부친은 반란을 진압하는 도중에 전사하게 되고, 곧 이어 모친도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자, 아무데도 의지할 곳이 없게 되고 먹고 살길이 막막해진 그녀는 결국 악기(樂妓-기예(技藝)는 팔아도 몸은 팔지 않는 고급 기녀)가 되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당대의 보기 드문 재녀(才女)였는데, 음률과 시, 서예에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용모 또한 매우 뛰어났다. 그녀에 얽힌 전설 같은 사랑이야기도 유명하다..
그 당시 사천절도사 위고라는 사람은 그녀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그녀를 자신의 교서랑(校書郞)이라는 직에 임명하려 하였는데, 여자에게 일찍이 그런 예가 없다며 반대하는 부하들 때문에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그녀의 재능을 흠모한 백거이(白居易), 원진(元鎭), 유우석(劉禹錫), 두목(杜牧) 등과 같은 당대의 거장들과 교류했다. 특히 원진과의 정분은 각별했다. 원진은 장래가 촉망되는 당대의 시인으로서 사천감찰어사로서 성도에 오게 되었는데, 설도는 나이가 자신보다 10살이나 연하인 원진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아내가 있었던 원진(元鎭)은 설도와 며칠을 함께 지낸 후, 배를 타고 떠난 후 다시 찾지 않았다. 그 후 설도는 평생동안 독신으로 지냈다.
원진은 원래, 부친을 일찍 여윈 명문가의 미녀 최앵앵(崔鶯鶯)과 혼약을 정했으나 언약을 저버리고 장안의 권세가의 규수에게 장가를 들었다. (이 이야기는 원진 스스로 쓴 당대의 유명한 소설 앵앵전(鶯鶯傳)에 실려있는데, 앵앵전은 훗날 서상기(西廂記)라는 희곡의 주제가 되었고, 또 서상기는 우리나라의 춘향전(春香傳)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원진은 또, 당시 절강성 소흥의 유명한 명기였던 유채춘이라는 여자를 농락하여 자살토록 한 바도 있었으며, 그러고도 결국 재상의 딸과 결혼하여 출세한 인물인데 그러고도 설도를 만나 장래를 약속했다. 설도는 원진에 대한 그런 좋지 못한 그런 소문을 전해 듣고는 결국 그를 단념하게 되었다고 전해온다,
그녀는 머리도 몹시 영리하여 설도전(薛濤箋)이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색종이도 발명하기도 하였다. 당대의 사람들은 백지(白紙)에 시를 써서 사람을 전송하는 것을 불길하다고 여겨 색깔있는 시전(詩箋-시 한 수나 간단한 사연을 쓰는 폭이 좁은 종이)이 성행했는데 설도는 완화계의 자신의 집 근처의 종이 공장들을 늘 살펴보고 연구하고는, 꽃물을 넣은 붉은 색의 아름다운 색종이를 만들어 자신의 시를 적어 사람들에게 보내곤 했다. 사람들이 보기에 그것이 몹시 청신하면서도 아름다워 설도전이라고 이름 짓고 다투어 소장하려고 하여 몹시 귀하게 되었다. 그 후로 황실에서도 사들이는 진품(珍品)이 되었다.
시성(詩聖) 두보는 성도의 서쪽 교외에 있는 완화계(浣花溪)라 불리는 시냇가에 옆에 초당(草堂)을 짓고 만년을 보낸 후 죽었다. 설도도 만년에 그 근처로 와서 음시루(吟詩樓)라는 집을 짓고 창포(菖蒲) 꽃과 대나무가 가득 심고 살았다고 했다.
청대에 이르러 설도의 슬픈 사랑과 넋을 기리기 위해 그녀가 살던 곳에 망강루(望江樓)라는 누각을 세우고 그녀가 좋아했던 대나무를 심었다. 지금도 성도의 망강공원(望江公園)에 가면, 그녀가 설도전을 만들 때 물을 길렀다는 설도정(薛濤井), 설도전을 만든 현장인 완전정(浣箋亭), 그 다락에 기대어 시를 짓고 설도전에 옮겼다는 강변의 음시루(吟詩樓) 초석이 있으며 그녀의 시(詩)에 자주나오는 대나무 1백40여 종이 숲을 이루고 있다.
그녀는 생전에 500여 편의 시를 지었다고 하나 오늘날에는 88 수만 전해지고 있다. 우리 가곡인 동심초는 그녀의 시 춘망사(春望詞) 4 수 중, 세 번 째 수를 번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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