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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청나라 순치 황제의 사연

餘香堂 2011. 12. 4. 09:31


청나라 순치 황제의 사연

 

어느 절에 노스님 한분이 계셨다. 덕이 높고 수행이 깊은 노스님은 여간해 아프시지도 않고 대중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으며 살아 가셨다. 어느 날 짖궂은 손자 상좌들이 노스님 언제 옷 벗으실 겁니까.?( 불가에서는 육신을 옷에 비유함) 하고 여쭈면 뒷산 바위가 무너지는 때에 옷을 벗으마하셨다.

 

하루는 상좌에게 지필묵을 가져오라 하시고 사람 얼굴을 그린 후에 눈동자는 남겨두며 하시는 말씀이 사십년 후에 그림을 걸개로 하여 중원 천하를 돌아다니며자기 찾으시오.” 하고 소리를 치고 다니면 내가 나타나 눈동자를 그려줄 것이라고 하시고는 목욕재계하고 의복을 단정히 하시고 좌탈 입망(앉아서 돌아가심)하시니 갑자기 됫산 바위가 무너져 내렸다.

 

사십년 후에 청나라에는 순치 황제가 황제의 자리에 올라 마상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수행하여 중원 천하를 통일하여 자금성에 앉아 있는데 성밖에서 문득 “자기 영을 찾으시오.”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엇에 이끌린 듯 소리 나는 곳을 보니 어느 중이 걸개그림을 들고 있는데 눈이 없어 황제가 붓을 들어 눈동자를 그려주자 “사십년 만에 스승님을 뵙습니다.” 하면서 중이 큰 절을 올리고 연유를 말하니 순치는 홀연히 자신의 전생을 깨달아 버렸다.

 

그 길로 곤룡포를 벗어 던지고 산으로 들어 가 출가를 하여 시를 지으니 그것이 유명한 순치황제 출가 시이다.

 

순치황제 출가시(順治皇帝出家詩)

 

天下叢林飯似山(천하총림반사산)

곳곳이 총림(叢林)이요, 쌓인 것이 밥이거늘

 

鉢盂到處任君餐(발우도처임군찬)

대장부 어데 간들 밥 세 그릇 걱정하랴 !

 

黃金白璧非爲貴(황금백벽비위귀)

황금과 백옥만이 귀한 줄을 아지 마소.

 

惟有袈裟被最難(유유가사피최난)

가사옷(僧服法衣) 얻어 입기 무엇보다 어려워라.

 

전생에 도가 높은 스님이 환생하여 황제가 되어 피비린내 나는 전장을 떠돌아다닌 것은 다름 아닌 스님의 생각으로 인한 것이었으니 황제의 어가를 보다 문득 황제라는 것도 볼만 것이로구나 하였고 정치를 잘하지 못하여 백성이 곤궁함에 빠진 것을 보고 내가 만약 황제가 되면 정치를 잘할 있을 텐데 하는 생각에서 기인하였던 것이다.

 

悔恨當初一念差(회한당초일념차)

당초에 부질없는 한 순간의 잘못으로

 

黃袍換却紫袈裟(황포환각자가사)

가사장삼 벗어 치고 곤룡포(袞龍袍)를 감게 됐네.

 

我本西方一衲子(아본서방일납자)

이 몸을 알고 보면 서천축(西天竺) 스님인데

 

緣何流落帝王家(연하류락제왕가)

무엇을 반연하여 제왕가(帝王家)에 떨어졌나?

 

十八年來不自由(십팔년래부자유)

十八년 지내간 일, 자유라곤 없었노라.

 

山河大戰幾時休(산하대전기시휴)

강산을 뺏으려고 몇 번이나 싸웠더냐.

 

我今撤手歸山去(아금철수귀산거)

내 이제 손을 떨고 산 속으로 돌아가니

 

那管千愁與萬愁(나관천수여만수)

만 가지 근심 걱정, 내 아랑곳할 것 없네.

 

未生之前誰是我(미생지전수시아)

이 몸이 나기 전에 그 무엇이 내 몸이며,

 

我生之後我是誰(아생지후아시수)

세상에 태어난 뒤 내가 과연 뉘이런가.

 

長大成人裳是我(장대성인재시아)

자라나 사람노릇 잠깐 동안 내라더니

 

合眼朦朧又是誰(합안몽룡우시수)

눈 한번 감은 뒤에 내가 또한 뉘이런가.

 

朕乃大地山河主(짐내대지산하주)

이 내 몸 중원천하(中原天下) 임금 노릇 하건마는,

 

憂國憂民事轉煩(우국우민사전번)

나라와 백성 걱정 마음 더욱 시끄러워

 

百年三萬六千日(백년삼만육천일)

인간의 백년살이 삼만 육천 날이란 것

 

不及僧家半日閒(불급승가반일한)

풍진 떠난 명산대찰 한나절에 미칠 손가.

 

百年世事三更夢(백년세사삼경몽)

백년의 세상일은 하룻밤의 꿈속이요,

 

萬里江山一局碁(만리강산일국기)

만리의 이 강산은 한판 노름 바둑이라.

 

禹疏九州湯伐桀(우소구주탕벌걸)

대우씨(大禹氏) 九州 긋고 탕임금은 걸(桀)을 치며

 

秦呑六國漢登基(진탄육국한등기)

진시황 六國 먹자 한태조(漢太祖)가 새 터 닦네.

 

兒孫自有兒孫福(아손자유아손복)

자손들은 제 스스로 제 살 복을 타고났으니

 

不爲兒孫作馬牛(불위아손작마우)

자손들을 위한다고 말 소 노릇 그만 하소.

 

古來多少英雄漢(고래다소영웅한)

수천년 역사 위에 많고 적은 영웅들아

 

南北東西臥土泥(남북동서와토니)

푸른 산 저문 날에 한줌 흙이 된단 말가.

 

 

이 같은 시를 지어면서 절집생활에 익어갈 무렵에 순치의 대를 이어 여덟 살에 등극한 강희황제가 조정의 혼란상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아버지 보고 싶어 수소문하여 찾아갔다.

 

순치의 방에는 짐과차(朕過此) “내가 이곳을 지났노라.” 라는 글귀만 남기고 순치는 없었다. 짐과차 세 글자에 강희는 아버지의 굳은 뜻을 확인하고 발걸음을 돌린다.

 

순치는 절간의 부목으로 산에 가서 나무를 하고 스님들 시봉을 하면서 곤룡포를 입고 지은 업장을 녹였다고 한다. 참으로 거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살다간 대 자유의 경지이다. 천하를 정복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정복하기가 더 어렵다고 한다. 지옥도 천당도 무시로 넘나들 수 있는 대 자유의 경지가 바로 득도이며 해탈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생명하나의 본질은 우주역사와 동반자적인 관계를 유지 한 채 영겁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도 인간은 저 하늘의 저주를 받아 이승이라는 감옥으로 유배를 온 죄인이기 때문에 죄수는 감옥의 문을 함부로 열어 달라고 요구 할 권한(자살을 뜻함)이 없다고 하셨다.

 

고해바다를 건너면서 업장의 분량만큼 소진을 후에 하늘의 부름을 기다려야지 감내하지 못하고 스스로  부엉이 바위에 뛰어내리는 등으로  목숨을 끊는 것은 생명의 역사를 거부하는 중대한 범죄행위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의 어께에 지워진 짐이야 말로 영혼의 역사와 인간의 목적을 달성하는 유일한 방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사바세계는 영혼의 해탈을 위한 구도의 장이지 즐거움만 만끽하는 놀이터가 아니라고 봄이 마땅하다. 수 백 만종의 생명이 역사하는 지구를 파괴하는 범죄자가 되기보다는 먼지만한 업장이라도 들어내는 과업이 더 소중한 시절이 아닌가 싶다.

 

자연의 이자로만 살아도 충분한데 원금을 착취하니 걱정이다. 이 거대한 공동의 업보는 무슨 재앙으로 우리를 시험할지 정말 걱정스러운 시절이다.“대관절 이것이 무엇인가.”“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도무지 알 수 없는 세상사와 인생사 선각자들이 남긴 화두와 씨름하는 길밖에 달리 도리가 없는 것 같다.

 

○ 출처 : 김병관 수필문학가/전 서울시 재향군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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