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일기

[스크랩] 택리지’의 4대 길지

餘香堂 2014. 11. 23. 10:23

‘택리지’의 4대 길지

 

그런가 하면 ‘택리지(擇里志)’의 저자 이중환(李重煥, 1690∼1752년)은 조선에서 양반 선비가 살 만한 가장 이상적인 장소로 경북 예안(禮安)의 퇴계 도산서원이 있는 [도산(陶山).하회.내앞.닭실]을 꼽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반 풍수가에서 꼽는 영남의 4대 길지와, ‘택리지’에서 지목한 4대 길지 가운데 세 군데가 중복된다는 점이다. 하회·내앞·닭실이 그렇다. 이중환은 경주의 양동마을 대신 퇴계가 살던 도산을 포함 시킴으로써 안동 일대 네 군데를 모두 조선의 베스트 명당으로 꼽은 것이다.

 

이중환은 어떤 기준으로 안동 일대를 선비의 가거지(可居地)로 본 것일까? 여기에는 이중환이 살던 당대의 정치 경제적 상황과 유교적 가치관이 반영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이중환이 생각하였던 길지의 기준은 [첫째 지리, 둘째 생리(生利), 셋째 인심(人心), 넷째 산수(山水) ]네 가지였다. ‘택리지’에서 안동 일대를 선비가 살기에 최적지라고 지목한 이유는 이상 네 가지 조건에서 모두 높은 점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 네 가지 조건을 필자의 소견으로 다시 한 번 검토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리, 즉 풍수를 보자. 경상도는 충청과 호남에 비해서 전체적으로 산세가 높고 가파른 편이지만, 안동 일대만큼은 예외적으로 높지 않은 산들이 고만고만하게 포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바위가 뾰족뾰족 돌출된 악산(惡山)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문사(文士)들이 좋아하는 온화하고 방정한 산세에 가깝다.

 

한반도 전체의 지맥을 놓고 보자면, 척추인 백두대간에서 부산 쪽으로 내려가는 낙동정맥과 태백산에서 방향을 틀어 속리산 쪽으로 내려가는 다른 한 맥의 분기점 중간에 안동 일대가 있다.

흔히 기공(氣功)이나 단전호흡, 쿤달리니 요가를 수련하는 방외일사(方外逸士)들 사이에 종종 화제에 오르는 ‘양백지간(兩白之間)’이 바로 이곳이다. 양백지간이란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를 일컫는 표현으로, 크게 보면 안동 일대, 즉 봉화, 춘양, 안동, 영양 지역이 양백지간에 해당하는 곳이다.

 

흰 백(白)자가 들어가는 산들은 백의민족이 정신수련을 하기에 적합한 산이라고 일컬어지는데, 태백과 소백은 바로 그러한 신령한 산일 뿐 아니라 이 지역 일대가 현재까지 남한에서 가장 덜 오염된 지역이고 기운이 맑은 곳이라고 평가된다. 경상도가 충청이나 호남보다 먼저 공업화의 길을 걸었지만 주로 낙동강 중하류인 대구와 부산 쪽이 오염되었지, 낙동강 상류인 이곳 양백지간은 오지라서 공장도 거의 들어서지 않은 덕택에 현재도 비교적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둘째, 경제적 조건인 생리 부문이다. 조선시대의 가치관으로 볼 때 사대부가 장사를 하면서 재리(財利)를 취할 수는 없었고, 기껏 한다면 농사나 짓고 사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경상도의 산간지역보다는 호남의 넓은 평야지대가 농사짓기에 훨씬 유리할 것 같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 지리학자 최영준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호남평야의 범위가 현재보다 훨씬 좁았으며, 바닷가의 들(갯땅)에는 소금기가 많고 관개시설의 혜택을 고르게 받지 못하여 한해와 염해를 자주 입는 곳이 많았다. 그러므로 이러한 들판보다는 약간 내륙 쪽의 고래실(구릉지와 계곡이 조화를 이룬 지역)에 사대부들이 많이 거주하고 바닷가의 들에는 주로 가난한 농민이 거주하였다.  기계화의 수준이 낮은 농경사회에서는 홍수의 피해가 크고 관개가 어려운 대하천보다 토양이 비옥하고 관개가 용이한 계거(溪居)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최영준, ‘국토와 민족생활사’, 84쪽)

 

조선시대에는 관개시설도 부족하고 염해가 발생하는 평야보다는 오히려 내륙의 냇물이 흐르는 곳이 농사짓기에 적합했다는 지적이다. 산이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높은 산도 아니라서 적절한 구릉과 계곡이 이곳 저곳에 형성되어 있는 낙동강 상류지역은 바로 이러한 입지조건에 해당한다.

 

지형도에 나타난 지명을 통계적으로 분석한 연구에 의하면, 지명에 계곡을 나타내는 골(谷)이라는 접미어가 붙은 곳이 조선시대 안동부에 속하는 안동, 봉화에 각각 27%와 28%로 전국 최고 비율을 점하고 있으며, 골과 같은 의미인 ‘실’과 ‘일’을 더하면 35%, 32%로 역시 전국 평균 19%보다 훨씬 높다고 한다(정원진, ‘한국인의 환경지각에 관한 연구’, 1983)

 

경상도와 전라도 인심론

 

셋째, 인심을 보자. 오늘날까지도 인심은 매우 민감한 부분으로 남아 있다. 이중환은 평안도, 경상도만 빼놓고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 전라도, 충청도 인심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평안도는 인심이 순후하고 경상도는 풍속이 진실하지만, 나머지 지역은 인심이 사납거나 멍청하거나 간사한 지역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때의 경상도 지역을 더욱 좁혀보면 안동 일대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이중환은 경상도와는 대조적으로 전라도 사람들에 대해서는 ‘오로지 교활함을 좋아하고 나쁜 일에 쉽게 부화뇌동한다(專尙狡險 易動以非)’고 혹평하고 있다. 경상도를 진실하다고 본 것에 비하면 전라도에 대한 평가는 감정 섞인 것이 아닌가 생각될 만큼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안동 인심의 정반대 쪽에 전라도 인심이 놓여 있는 것이다.

 

왜 이중환은 이처럼 경상도와 전라도에 대조적인 평가를 내렸을까 ? 이중환은 팔도 가운데 평안도와 전라도만큼은 한 번도 가본적이 없다. 가본 적이 없는데도 부정적으로 단정하고 있다.

 

우리나라 보학(譜學)의 대가인 송준호교수는 이 부분에 대해서 주목할 만한 지적을 하고 있다. 송교수에 따르면 이중환의 친외가는 바로 전라도 무장(茂長)이었다. 서울에서 살던 이중환의 부친 이진휴(李震休, 1657∼1710년)가 전라도 무장에서 명문가로 알려진 함양오씨(咸陽吳氏) 오상위(吳相胃, 1634∼1687년)의 사위가 되었던 것이다 (송준호, ‘조선사회사연구’, 1987).

 

그런데 이중환이 자신의 외가동네이자 어머니 고향인 전라도에 대해서 이러한 평가를 했다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좀 의외다.

 

또 한 가지 의문은 이중환이 60평생을 살면서 외가인 전라도에 한 번도 다녀간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조선시대 사대부 풍습으로는 결혼을 해서 처가가 있는 지역(聘鄕)으로 옮겨가 사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 중기까지 딸들도 재산을 상속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친가가 아닌 외가에서 태어나거나, 그렇지 않으면 어린 시절 일정 시기는 외가에서 지내는 이가 많았다. 그런데 이중환은 평생 외가에 발을 붙인 적이 없다. 철저한 단절이 있었다. 이 점이 이상하다!

 

이중환이 경상도 인심을 높게 평가한 반면, 자신의 외가동네인 전라도 인심을 낮게 평가하게 된 이면에는 임진왜란 바로 전 해에 발생한, ‘조선시대의 광주사태’라 불리는 정여립(鄭汝立) 사건(己丑獄事, 1591년)을 읽어내야 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수사 책임자였던 송강 정철의 반대쪽 라인에 서 있던 전라도 선비 약 1000 명이 쿠데타 혐의를 받고 죽거나 병신이 되었다. 주로 동인(東人)이자 나중에 남인(南人)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피해자였다. 이중환의 외가인 함양오씨 집안도 남인 이었음은 물론이다.

 

오씨들은 이 사건으로 억울하게 당했다고 여겨지는 ‘호남오신(湖南五臣; 鄭介淸, 柳夢井, 曺大中, 李潑, 李)’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정철의 노론측 (서인에서 갈라져 나온) 후손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남인의 선봉대 집안이었다. 함양오씨를 비롯한 전라도 남인들과, 송강 정철을 추종하는 노론측은 기축옥사 이후로도 200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엎치락뒤치락 하는 공방전을 벌였다.

 

이걸 보면 경상도 남인보다 전라도 남인들이 훨씬 고생을 많이 하였다는 걸 알 수 있다. 경상도는 노론이 드물고 거의 퇴계 문하의 남인 일색이라 같은 색깔 아래에서 동지적 결속이 가능한 분위기였지만, 전라도는 노론이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에 전라도 남인들은 아웃사이더로서 많은 설움을 겪어야만 했다. 그래서 전라도 남인들은 영남의 남인들을 부러워했다.

 

이중환의 외가인 함양오씨들이 참혹한 불행을 겪은 사건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영조 4년(1728)에 발생한 ‘이인좌의 난(戊申亂)’이다. 이 사건에 함양오씨, 나주나씨(羅州羅氏)를 비롯한 전라도 남인들이 상당수 관여했다는 노론측의 주장에 따라 오씨 집안은 사약을 받거나 장살을 당하는 비극을 겪어야만 했다.

 

이때가 이중환의 나이 30 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이었던만큼 그 사건의 전말과 전개 과정을 충분하게 파악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쟁의 와중에 외가가 이처럼 당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이중환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 철저한 환멸 그 자체 아니었을까! 아마 전라도 쪽은 쳐다보기도 싫었을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당쟁의 피해를 산출할 때 그 폭과 깊이에서 상대적으로 피해가 심했던 곳은 영남보다 호남지역 이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래서 이중환은 외가이기는 하지만 피비린내 나는 격전지인 전라도에는 한번도 가지 않았던 것 같다.

 

아울러 그러한 내면세계가 반영된 평가가 ‘택리지’의 저술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 송교수의 견해다. 반대로 권력에서 소외되었을지언정 남인들끼리 오순도순 사이좋게 모여 살면서 학문에 정진하는 경상도 안동 쪽의 풍경은, 당시 뜻을 펴지 못하고 방황하던 남인 신분의 이중환에게는 살 만한 곳으로 생각되지 않았겠는가. 인간은 결코 자기가 살던 당대의 역사적 현실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날 수 없으니까 말이다.

 

넷째는 산수를 보자. 동양화는 대부분 산수화다. 다른 주제는 별로 없다. 한자문화권의 식자층이 인생의 커다란 즐거움으로 생각한 것은 아름다운 산수에서 노니는 것이었고, 궁극적인 가치로 생각했던 것은 대자연과의 합일이었다. 산과 물이 흐르는 계곡에서 광달락(曠達樂)을 누리는 것, 우리 삶에서 그 이상의 가치가 있을까!

 

층층의 기암절벽 사이로 냇물이 많이 흐르는 안동 일대는 이러한 산수를 즐기기에는 최적지로 여겨진 것이다. 물론 다른 곳에도 기암절벽과 냇물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이곳은 조령을 통해 서울로 갈 수 있는 길은 열려 있으면서도 반면에 다른 쪽은 산으로 첩첩 둘러싸인 오지라서 조선시대 내내 서해안, 남해안, 그리고 동해안 남쪽에 이르기까지 시도때도 없이 출몰했던 왜구들의 침입에도 안전지대였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전란이 적어서 많은 학자와 시인 그리고 도교의 방사(方士)들이 선호했던 중국의 오지 사천성(四川省)처럼, 한국의 양백지간(兩白之間)인 안동, 봉화 일대는 가장 병화(兵禍)가 적은 무릉도원 이었다고 말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출처 : 선경회- 예안 . 선성김씨 만남의장
글쓴이 : 叔榮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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