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해남윤씨 녹우당 일원은 하도 여러 번 다녀왔던 곳이지만, 해남을 지나는 길에 다시 들려보았다.
해남윤씨의 종가... 나도 해남윤가여서 자랑스러운 마음이 드는 곳이기도 하다.
아버지를 모시고 갈 때면 몇 대 손 누구다 하면 입장료를 내지 않고 그냥 들어갈 수 있었던 때도 기억이 나고
물론 나만 갈 때는 늘 입장료를 냈지만, 지금 생각하니 아련한 추억처럼 떠오른다.
또 내가 어렸을 때는 울 아버지께서 늘 윗대 할아버지 집이다고 곳곳을 설명해주시던 생각도 나는 곳이다.
내 아이들이 어렸을 때도 이곳을 들러 엄마가 해남윤씨의 자손임을 자부심으로 이야기해주었던 때가 떠오른다.
수도 없이 다녀왔지만 포스팅은 하지 않았었다. 어떤 말로도 이곳의 역사를 다 읽어내기엔 부족하여...
이번에 방문은 어머니를 모시고 다녀온 길이라서 남겨두고 싶다.
녹우당 뒤로 비자나무 숲이 있고 그 숲길을 어머니 손을 잡고 거닐었던 시간과
천천히 앞서 걸어가시는 어머니 뒤를 따라 걸었던 느낌,
울 어머니께서 하시는 말씀 중에 "너랑 차를 타고 이렇게 다니는 것이 참 좋구나"
"나는 멀미를 안 해서 차만 타면 좋더라"
어쩐지 가슴 아리게 들려오던 말씀 때문에 이번 여행길엔 어머니를 모시고 다녔다.
앞으로 자주 어머니를 모시고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거닐어 보았던 녹우당,
그 풍경들을 담아왔다.
매표소에서 울 어머니는 65세 이상이라 무료였고 나만 매표를 하고 나서 녹우당으로 향했다.
12월 초, 윗지방은 눈이 내리고, 내가 사는 천안에도 눈이 내리는데 이곳 해남은 눈이 오지 않았다.
약간은 쌀쌀한 바람이 불고 자꾸 구름 속으로 숨어 햇볕이 들락거렸지만
어머니와 손잡고 모녀가 거닐기엔 상쾌한 공기가 참 좋았다
나는 다시 이곳을 찾아 우리 해남 윤씨의 역사를 볼 수 있는 곳이어서 자랑스럽고 가슴 뿌듯했다.
녹우당은 집 뒤 비자나무 숲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비 내리는 소리처럼 들린다 하여
녹우당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으며, 전라남도 민가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것으로
효종임금이 사부였던 고산 할아버지를 위해 수원에 지어준 집 일부를 뜯어 옮겨와 사랑채로 만들고
안채와 사랑채, 문간채로 이루어진 해남윤씨의 종가 전체를 녹우당이라 부른다.
집을 뜯어왔다는 것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지만,
임금이 하사한 집을 다른 사람에게 준다거나 비워둘 수는 없었기에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하여 왕의 사랑이 담겨 있는 녹우당이다.
고산 윤선도(1587~1671)
본관 해남(海南). 호는 고산(孤山). 조선시대의 문신이며 시조 작가이다.
해남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 중에 한사람인 우리나라 국문학상 시조시인의 일인자로 꼽힌다.
송강 정철이 가사문학의 대가라면 고산은 시조문학의 대가라고 할 수있다.
당시 이 나라의 선비들이 대부분 한문문학과 경직된 사회구조의 틀속에 갇혀 있을 때
고산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려 섬세하고 미려한 시조들을 지어냈다.
정철·박인로와 더불어 조선 3대 시가인(詩歌人)의 한 사람으로, 서인(西人) 송시열에게 정치적으로 패해 유배생활을 했다.
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시비를 가림에 타협이 없어 자주 유배를 당했다. 한편 그는 음악을 좋아하는 풍류인이기도 했다.
특히 그가 남긴 시조 75수는 국문학사상 시조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진다.
그의 시문집으로는 정조 15년에 왕의 특명으로 발간된 《고산유고》가 있다.
그의 시조는 시조의 일반적 주제인 자연과의 화합을 주제로 담고 있다.
만년에 전남 보길도에서 인생을 마무리했다.
고산의 작품세계
59세의 6년간 (인조18∼인조23)을 주로 금쇄동에서 기거하였다.
이 기간동안에 산중신곡과 금쇄 동기를 지었는데 산중신곡은 산중생활에서 촉발된 감흥을 읊은 것이고,
금쇄동기는 금쇄동의 산수경관을 술회한 것이다. 고산이 산거생활에서 쓴 산중신곡은 고산연보(孤山年譜)에 의하면
임오 년(任午年)56세에 금쇄동에서 18장을 지었다고 하고있다.
고산유고 권6에서도 산중신곡으로 만흥(慢興) 6수, 조무요(朝霧謠)1수, 하우요(夏雨謠)2수, 일모요(日暮謠)1수,
야심요(夜深謠)1수, 기세탄(機歲歎)1수, 오우가(五友歌)6수등 총 18수로 소개하고있다.
녹우당으로 불러야 하는 이유..
해남윤씨 종가 전체를 통틀어 녹우당으로 부르고들 있으나 원래는 그 사랑채 이름이 녹우당(綠雨堂)이었다.
그래서인지 고산 종택을 녹우당이라 부르고 또는 녹우당 주변 전체를 녹우단으로도 부르고 있지만 어느 자료에 의하면
당은 사람이 주거하는 생활 공간으로 요약할 수 있고 단은 원구단, 참성단과 같이 하늘과 땅의 신께 드리는 제의 공간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녹우당은 연지,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 관리동, 교육동, 충헌각, 어부사시사 시비, 녹우당, 고산 사당, 어초은 사당, 산책길, 어초은 추원당,
어초은 묘, 비자나무 숲 등 13개 소구역으로 나누어져 있고, 건물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 헛간, 안사당, 어초은 사당, 고산 사당으로 짜여 있는데
여기 어디에도 천지지신께 드리는 제의 공간은 없기 때문에 녹우단으로 표기보다는 녹우당이 맞다고 한다.
녹우당과 녹우단에 모두 푸른비란 뜻이 들어 있으므로 함께 부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문화재청에서는
.※(해남윤씨 녹우단 → 해남윤씨 녹우당 일원)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라고 안내되고 있으므로
녹우당으로 표기하는 것이 맞다.
대문 바로 앞에는 높이 30여 m에 이르는 은행나무가 서 있다.
고산 윤선도의 4대조 어초은 윤효정(1476~1543)이 아들의 진사시험 합격을 기념으로 심었다고 한다.
500년가량 묵은 은행나무는 녹우당의 표상처럼 위풍당당해 보인다.
이파리를 떨군 저 은행나무를 올려보니 어쩐지 황량하지만, 저 은행나무는 녹우당의 역사를 다 알고 있으리라.
지금 녹우당에는 윤선도의 14대손인 윤형식 씨가 살고 있다.
형식과 규모 면에서 호남의 대표적인 양반집으로 인정되어 사적 제167호로 지정된 집이기는 하지만,
지금도 살림을 하고 있는데다 늘 구경할 수 있도록 열어 놓은 집이 아니어서 아쉽다.
매표소에서 집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미리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이미 여러 번 아쉽지 않게 돌아봤지만, 이곳을 찾아오는 여행객은 매우 아쉽겠다 싶었다.
녹우당이란 이름은 집 뒤 산자락에 우거진 비자 숲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쏴~ 하고 푸른 비가 내리는 듯하여
녹우란 이름을 붙였다고 하니 참 낭만적인 느낌이 드는 이름이다.
녹우당은 'ㅁ'자형을 이루며 안뜰을 둘러싼 안채와 사랑채를 중심으로 행랑채가 여러 동 있고 집 뒤편 담장 너머로
동쪽에 해남윤씨의 중시조인 어초은 윤효정과 윤선도의 사당이 있다.
집 전체의 규모 60여 칸 가운데 집주인보다도 일하는 사람들에게 소용되는 공간이 더 넓어서 대지주 계층의 살림살이를 보여 준다.
집안으로 들어가면 맨 먼저 보이는 작은 못 가와 안뜰의 입구 쪽에 여러 가지 꽃나무가 가꾸어져 있고 사당이 있는 후원 쪽에는
갖가지 과일나무들과 함께 채소밭이 꾸며져 있다. 짙은 대밭이 폭 감싸듯이 집 뒤를 둘러싸고 있어 그 운치를 더해주는 곳이다.
잠긴 대문 사이로 보이던 풍경...마루 위에서 낮잠을 즐기는 고양이가 보였다...
부드럽게 휘어진 담벼락이 운치 있게 이어진다.
녹우당 주변은 정말 아름답다.
예쁜 길이 많아서 거닐기에 참 좋다.
울 어머니와 손잡고 걷던 느낌이 돌아와 생각해도 가슴이 따뜻해진다.
앞서 걸으시는 울 어머니 뒷모습만 담았다.
앞모습을 담으려는데 한사코 손사래를 치셨다.
사당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는 길 담장이 멋스럽고...
고산 사당 앞에는 300년이 훨씬 넘은 노송이 꿋꿋하게 서 있는 모습이 아주 당당해 보이고..
고산 사당
고산 사당은 고산 윤선도(1587~1671)를 배향하고 있는 불천지위 사당이다.
고산 사후인 1727(영조 3년)에 불천지위로 지정되었다.
불천지위는 안사당에서 4대까지 모시고 묘로 가는 대신 영구히 사당에서 모실 수 있게 하고 있으며,
보통 나라에서 공이 인정될 때 허락한 신위다.
매년 음력 6월 11일 이곳에서 기제사를 지낸다.
고산 사당 옆으로 있는 어초은 사당으로 가는 길..
어초은 사당
어초은 사당은 어초은 윤호정(1476~1543)을 배향하고 있는 불천지위 사당이다.
윤효정은 덕음산 아래 이곳 백련동에 처음 터를 잡고 해남윤씨 가를 중흥시킨 인물로 사당 뒤에는 윤효정의 묘가 있다.
녹우당 공간에서 어초은 제각, 어초은 묘와 함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윤효정은 "삼개옥문적선지가"라 불리게 할 정도로 적선을 실천하며 가문을 빛내게 하였다.
매년 음력 11월 15일 시제사를 지낸다.
여기서 "삼개옥문적선지가"란 흉년이 들어 백성이 세금을 내지 못해 옥에 갇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어초은 윤효정이
관아에 찾아가 백성의 세금을 대신 내어주고 풀어주는 일을 세 번이나 했다.
이 일로 인하여 해남 윤씨 가는 "삼개옥문적선지가"라는 칭호를 얻게 된것이다.
천연기념물 제241호인 비자나무 숲과 대나무 숲이 있어 바람이 불면 고산이 들었던 녹색의 빗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해남군에서는 이곳 전체를 ‘고산 윤선도 유적지’로 묶어 관리하고 있다.
비자나무 숲으로 가는 길에 들어서자 가슴까지 물들듯 불어오던 상큼한 바람..
정말 한없이 걷고 싶은 길이었다.
어초은 윤효정 할아버지 묘소 앞에서 잠시 인사드리고...
묘소는 사진에 담지 않았다.
“뒷산에 바위가 보이면 마을이 가난해진다.”는 그의 유훈을 받들어 후손들이 비자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곳 비자나무 숲이 생겨나면서 해남 별미 비자강정이 만들어진 이유가 된 것이며,
그 시절 양반들은 해남윤씨 종택을 방문하면 비자로 만든 한과와 차를 대접받았단다.
이 숲을 거니는데 정말 바람이 불었고 나뭇잎이 서로 비벼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비자나무 숲길을 다 걸어보지는 못하고 입구만 거닐었다.
정말 스치는 바람 소리가 사각거리는 듯... 빗소리 같은 느낌?
고산 할아버지도 이 소리를 들으셨던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숲길을 내려왔다.
600년의 녹우당의 역사만큼 주변엔 오래된 나무가 즐비하다.
추원당으로 가는 길...
추원당
추원당은 이곳 백련동에 처음 터를 잡은 어초은 윤효정의 제각으로
1935년 윤정현(1882~1950)의 발의에 의하여 지어졌다.
추원은 돌아가신 조상이나 부모를 추모하고 숭배함을 뜻한다.
추원당은 문이 잠겨 있었지만 녹우당 사랑채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 건물이다.
다시 돌아내려 오면서 바라본 녹우당 주변 풍경이 멋스럽고 자랑스럽게 보여 가슴 뿌듯했다.
아직 이른데 벌써 동백꽃이 피어 낙화하고 있었다.
충헌각은 원래 유물전시관이었으나 새로 유물전시관을 만들고 지금은 충헌각으로 바뀌었다.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시비
어부사시사
[春詞]
우는 것이 뻐꾹샌가 푸른 것이 버들숲가
배 저어라 배 저어라
어촌의 두어 집이 안개 속에 들락날락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맑은 깊은 연못에 온갖 고기 뛰논다
[夏詞]
석양이 좋다마는 황혼이 가까웠도다
배 세워라 배 세워라
바위 위에 굽은 길이 솔 아래 비껴 있다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푸른 나무숲 꾀꼬리 소리 곳곳에 들리는구나
[秋詞]
강촌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쪄 있다
닻 들어라 닻 들어라
넓고 맑은 물에 실컷 즐겨 보자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인간세상 돌아보니 멀도록 더욱 좋다
[冬詞]
물가에 외롭게 선 솔 홀로 어이 씩씩한고
배 매어라 배 매어라
험한 구름 원망 마라 인간세상 가린다
찌그덩 찌그덩 어야차
파도 소리 싫어 마라 속세 소리 막는도다
어부사시사는 고산이 65세 때(1651년 효종2) 벼슬을 버리고 보길도로 들어가
51세 때 만들어 놓은 부용당에서 한적한 나날을 보내며 지은 시로
봄 노래(春詞)·여름 노래(夏詞)·가을 노래(秋詞)·겨울 노래(冬詞)로 나뉘어 각각 10수씩 모두 40수로 되어 있다.
고려 때부터 전하던 <어부가>를 이현보가 9장으로 고쳐 지었고, 다시 윤선도가 시조의 형식에 여음만 넣어 완성한 것이지만,
이현보 한시 구의 어의나 어음에 상응하는 우리말로 재해석해 어부의 생활을 아름답게 나타낸 작품이다.
오우가
내 버디 몃치나 하니 水石(수석)과 松竹(송죽)이라
東山(동산)의 달 오르니 긔 더옥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삿 밧긔 또 더하야 머엇하리
구룸빗치 조타 하나 검기랄 자로 한다 <水>
바람 소래 맑다 하나 그칠 적이 하노매라
조코도 그츨 뉘 업기난 믈뿐인가 하노라
고즌 므스 일로 퓌며셔 쉬이 디고 <石>
플은 어이 하야 프르난 닷 누르나니
아마도 변티 아닐산 바회뿐인가 하노라
더우면 곳 피고 치우면 닙 디거 <松>
솔아 너난 얻디 눈서리랄 모라난다
九泉(구천)의 불희 고단 줄을 글로 하야 아노라
나모도 아닌 거시 플도 아닌 거시 <竹>
곳기난 뉘 시기며 속은 어이 뷔연난다
뎌러코 四時(사시)예 프르니 그를 됴하 하노라
쟈근 거시 노피 떠서 만물을 다 비취니 <月>
밤듕의 光明(공명)이 너만하니 또 잇나냐
보고도 말 아니 하니 내 벋인가 하노라
'오우가' 현대어 풀이
[1] 5 벗
나의 벗이 몇이나 있느냐 헤아려 보니 물과 돌과 소나무, 대나무다.
게다가 동쪽 산에 달이 밝게 떠오르니 그것은 더욱 반가운 일이로구나.
그만두자, 이 다섯 가지면 그만이지 이 밖에 다른 것이 더 있은들 무엇하겠는가?
[2] 물
구름의 빛깔이 아름답다고는 하지만, 검기를 자주 한다.
바람 소리가 맑게 들려 좋기는 하나, 그칠 때가 많도다.
깨끗하고도 끊어질 적이 없는 것은 물뿐인가 하노라.
[3]돌
꽃은 무슨 까닭에 피자마자 곧 져 버리고,
풀은 또 어찌하여 푸르러지자 곧 누른빛을 띠는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바위뿐인가 하노라.
[4]소나무
따뜻해지면 꽃이 피고, 날씨가 추우면 나무의 잎은 떨어지는데,
소나무여, 너는 어찌하여 눈이 오나 서리가 내리나 변함이 없는가?
그것으로 미루어 깊은 땅 속까지 뿌리가 곧게 뻗쳐 있음을 알겠노라.
[5]대나무
나무도 아니고 풀도 아닌 것이, 곧게 자라기는 누가 그리 시켰으며,
또 속은 어이하여 비어 있는가?
저리하고도 네 계절에 늘 푸르니, 나는 그것을 좋아하노라.
[6]달
작은 것이 높이 떠서 온 세상을 다 바추니
한밤중에 광명이 너보다 더한 것이 또 있겠느냐?
보고도 말을 하지 않으니 나의 벗인가 하노라
오우가는 56세 때 전라도 해남 금쇄동에 은거할 무렵에 지은
<산중신곡(山中新曲)> 속에 들어 있는 6수의 시조로,
수(水-물)·석(石-돌)·송(松-솔)·죽(竹-대)·월(月-달)을 다섯 벗으로 삼아 서시(序詩) 다음에
각각 그 자연물들의 특질을 들어 자신의 자연애와 관조를 담아
고산 윤선도 문학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것으로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잘 나타내어 시조를 절묘한 경지로 이끈 작품이다.
어부사시사 시비 뒤로 아직 가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저 벤치에 잠시 앉아도 보고...
고산 윤선도 유물 전시관
유물전시관 내부에는 해남윤씨 대대로 내려오는 유물로 가득하다.
지난 2010년에 개관한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은 고산과 해남윤씨 종손들의 작품을 통해 당시 시대 상황을 보여준다.
내로라하는 명문 사대부가였던 해남윤씨 가계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고산의 육필은 물론 그의 증손 윤두서의 공재자화상(국보 제240호) 등 대대로 전해오는 가보들이 전시되어 있다.
한집안에 이렇게 많은 보물이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운 곳이다.
전시관을 가득 채운 유물 하나하나에 무엇도 가벼이 여기지 않고 고이 간직해 온 후손들의 정성이 전해진다.
[어부사시사], [오우가]를 통해 교과서에서나 만났었지만, 이곳에서는 자세한 설명과 함께 만나볼 수 있다.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을 제대로 살펴보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고산의 육필이 새겨진 [금쇄동기](보물 제482-2호), [산중신곡](보물 제482-3호), [어부사시사] 등의 책자를 비롯해
고려 시대 노비문서(보물 제483호), 고산 양자 예조입안문서(보물 제482-5호) 등 볼거리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증손 공재의 작품도 만만치 않다. 공재의 자화상 윤두서상(국보 제240호)을 비롯해 공재화첩(보물 제481호),
백마도(보물 제481호), 동국여지지도(보물 제481-3호), 정물화와 진경산수화 등을 볼 수 있다.
올라갈 때는 주차장까지 올라가서 녹우당을 먼저 돌아보고 내려오는 길에 주차장 바로 아래에 있는 연지를 돌아보았다.
녹우당을 향해 들어가다 보면 마을 어귀쯤 되는 곳 오른쪽에 나지막한 둔덕이 꾸며져 있고 네모난 연못이 파여 있다.
못 주변에는 해송이 작은 숲을 이루고 있으며 못 안에 마련된 두 개의 네모난 섬에도 해송이 심어져 있다.
예전에는 가꾸지 않은듯하여 사람들이 관심 없이 지나치곤 했었는데
지금은 연못을 예쁘게 꾸며놓은 듯 보였다. 이 연지가 있는 곳이 녹우당의 앞뜰이 되는 셈이다.
해남 여행의 시작은 고산 윤선도 유적지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다른 볼거리도 많지만 나는 이곳 녹우당을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고
600년의 세월을 그대로 느껴볼 수 있는 해남윤씨의 자부심을 볼 수 있어 자랑스러웠다.
어머니와 거닐었던 녹우당, 그리고 비자나무 숲을 거닐며
푸른 바람 소리를 들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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