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지리산 연가1

餘香堂 2015. 7. 5. 03:26

지리산 연가1

 

  산은 깊고 그 길을 걷는 내 발자국은 더 깊다. 먼 길은 먼 곳의 시간을 예비하는 것이며 지금의 시간을 조율하는 것이다. 이틀간의 예비 된 시간을 생각하니 더 없이 마음이 평화로웠다. 설렘이 조금씩 잦아들면서 나무들과 흙으로 이루어진 숲의 향기가 코끝에 번져왔다. 이곳이 지리산 자락이라는 선입견 탓인지 모르지만 동네 산행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아마도 흔적은 있으되 사람들을 자주 만나지 않는 호젓함 때문이 아닐까.

   남원시 인월면에서 시작해 운봉읍을 거쳐 주천면에 이르는 지리산 둘레길 1,2코스를 걷자고 4시간을 불나게 달려왔다. ‘제주 올레길“이라는 장시(長詩)를 아직도 마무리 못했는데 ’지리산 둘레길‘이라는 장시를 또 시작했다. 3개 도(전북, 전남, 경남), 5개 시군(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 21개 읍면, 100여 개 마을을 잇는 285km에 달하는 장시.

 

   사람을 만나고, 마을을 만나고, 역사와 문화를 만나 삶의 의미를 보듬는 길. 어느 곳에서는 사람이 그리워 하염없이 동구 밖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있을 것 같고, 누렁이 황소가 지극히 평화롭게 밭을 가는 모습이 있을 것 같고, 가녀리지만 끈질긴 생명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것이 길이다.

   나는 몇 년째 길을 걷고 있다. 길이 내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길을 걸으며 어떤 의미를 만들어가고 있다. 처음에는 일상으로부터 멀어지려고 무던히 애를 쓰고 무엇인가를 내려놓기 위해 고심하면서 물 위에 뜬 기름방울처럼 길과 겉돌았다. 하지만 지금은 길과 쉽게 동화되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길마다 리듬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길들이 고유한 감성을 간직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인월 지리산탐방지원센터에서 안내지도 한 장을 받아들고 배낭에 달린 보조 버클을 채우고 나니 가을 하늘은 왜 그리 맑고 투명하던가. 여름날의 무수한 앙금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인가. 산들을 왜 자꾸 버선발로 마중을 나오는가. 부드럽게 쏟아지는 빛살들은 다 어쩌란 말인가. 나는 고요한 눈동자를 떠올리고 눈동자에 비치는 호수를 떠올렸다. 환장하게 이쁘던 시골 마을의 가시내를 떠올렸다.

   담장마다 벽화가 선명한 월평마을에 카메라 앵글을 들이댔다. 지리산 둘레길이 개통되면서 시골마을에 활기가 돈다. 민박집이 지천이다. 지역 경제가 살아났다는 이야기가 들리고 무분별한 사람들 탓에 농작물 훼손이 심각하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길이 거느린 이 양면성은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나 존재한다. 긍정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마을을 벗어나 산길에 들어서자 눅눅한 숲 냄새가 에워쌌다. 길가에 고사리 밭이 지천이었다. 오솔길에 밤송이들이 터져서 알밤들이 뒹굴었다.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한두 알 줍다보니 금방 양손에 가득했다. 욕심이라니. 둘레길을 걸으며 지켜야 할 일이 있다면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몸에 배인 습성은 늘 생각을 앞질러 간다.

   달오름 농장의 사과가 탐스러웠다. 아직 빨갛게 익지 않았지만 지리산에서 사과밭을 만나다니. 뜻밖의 소식처럼 반가웠다. 흥부골자연휴양림 쉼터에서 잠시 쉬었다. 오늘 계획한 구간은 4시간 정도. 놀멍 쉬멍 걸어도 저녁 전에는 예약해둔 민박집에 도착할 수 있겠다 싶었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니 발걸음도 느려졌다.

    오붓한 산길을 벗어나 산정호수 만큼 높은 곳에 위치한 옥계호를 내려오자 들판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농로를 따라 억새와 갈대들이 긴 울음을 뽑아내고 있었다. 더 빠른 자동차 길이 있지만 둘레길은 에둘러 간다. 일부러 고샅길로 이끌고 오솔길과 들길을 고집한다. 느리지만 그 느림을 밟으며 여유로워진다.

   가왕 송흥록 생가에 들어 잠시 판소리에 젖었다. 쉼터에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삼삼오오 점심을 먹고 무거운 다리를 풀고 있었다. 단조로운 둑방길이 계속 되고 있었으나 하늘은 시리도록 푸르고 구름들이 한가로이 흐르고 있었다.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농촌 풍경들을 뒤로 남긴 채 민박집을 예약해둔 운봉읍 삼산마을에 들어섰다. 공동 빨래터가 있었다. 요즘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것인데 맑은 물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이 마을을 돌아나가고 있다니. 산과 마을을 잇는 또 하나의 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리 다녀와서 블로그에 포스팅 해준 사람들 덕택에 시간을 절약하고 혜택을 본다. 배낭여행이 아니고서야 빠듯한 일정이 삐끗하면 후회하기 십상이다. 지금 걷는 코스도 역방향으로 걷는 것이다. 좀 더 쉬운 길이다. 민박집도 친절하고 맛있다는 장수민박을 수배했다. 여장을 풀고 동네를 둘러보았다. 마른 깻단을 태우는 연기가 가을 하늘에 버무려지고 있었다. 텃밭에는 싱싱한 푸성귀들이 푸근했다. 탐스런 감들이 주렁주렁 열린 고샅길과 마을 입구의 아름드리 소나무들. 이런 풍경들은 어릴 적 내 고향이 간직한 그런 모습처럼 살갑게 다가왔다.

   두레밥상을 받았다. 손님들 상을 일일이 봐줄 수 없어 식사시간을 맞춘다는 할머니 말씀이 조금 야박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막상 밥상을 받고 보니 입이 떡 벌어졌다. 6천 원짜리 밥상에 온갖 산나물이 가득했다. 내 생애 처음 먹어보는 민들레김치와 생강나무잎 장아찌. 그 두 가지만으로도 행복했다. 거기다 두레 밥상에 같이 엉겨 붙은 천안에서 온 아가씨 둘과 또 서울에서 온 아가씨 둘. 할머니가 반주로 내놓은 약주를 한 잔씩 나누며 두레밥상이 점점 가벼워지면서 흥겨워졌다. 마무리는 오미자차로 했다. 소문이 나니 이렇게 안할 수가 없다는 할머니 말씀에 힘들지만 최선을 다한다는 속마음이 비쳤다. 기대가 기대 이상일 때 여행자들은 뜻밖의 선물을 받은 것처럼 행복해진다.

  

   다음날 아침 전날 저녁과 마찬가지로 맛있는 두레밥상을 받고 길을 나섰다. 운봉에서 주천 가는 길, 대략 6시간 코스. 길을 잘못 들어 행정마을 서어나무 숲을 지나치고 말았다. 때론 아쉬움도 있게 마련이다. 간들거리는 억새밭을 지나 덕산 저수지에 이르러 가슴이 탁 트였다. 산비탈에 자리 잡은 저수지의 품이 넉넉했다. 저수지를 끼고 도는 길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몇 번이고 돌아보았다. 여행자의 가슴을 적시는 길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길들은 인공적으로 조성할 수가 없다. 가을 햇살과 빈 들녘과 저수지와 바람과 젖은 흙길이 어우러져 가슴 밑바닥을 훔치고 있었다.

 

 

  노치마을에서는 풍수를 보고 반했다. 풍수지리에 대해 일자무식이지만 한눈에 명당처럼 보였다. 안산에 좌청룡, 우백호, 그런 곳에 집을 집고 텃밭이나 가꾸며 여생을 보내고 싶었다. 회덕마을에서 구룡치로 이어지는 숲길은 이틀간 걸었던 길 중에서 단연 으뜸이었다. 꼬부랑거리며 숲으로 들였다가 가장자리로 밀어냈다가 빨아들였다가 내뱉었다가 숲이 나를 가지고 놀았다. 시원하고 아늑하고 편안한 잠자리에서 좋은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구룡치에서는 경사가 심한 내리막길이 계속 되었다. 역방향으로 걷길 잘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정방향으로 오르는 사람들을 보니 몹시 힘들었다. 산과 들과 마을을 이은 환형의 둘레길 한 도막을 잘 우려먹고 나니 갑작스레 더 걷고 싶었다. 기왕에 온 길.

  

   개천절 연휴를 맞아 어머님 생신을 쇠러가던 일정을 하루 더 당겨서 3코스를 걷기로 했다. 주천에서 남원으로 가서 차를 가지고 다시 인월로 갔다. 인월에서 금계까지 8시간 정도. 절반만 걷고 매동마을에서 숙박을 한 다음 다음날 절반을 걷는 계획을 세웠다. 상당히 긴 코스인데 시간을 어림하니 충분히 마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리였을까. 오금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도에 그만 둘 수도 없었다. 어떻게든 중간 지점인 매동마을까지 가야했다. 산길이 많았고 오르막이 많았다. 정상으로 치닫는 오르막은 나를 무척 지치게 한다. 나는 산을 좋아하나 정상에 오르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호연지기가 부족한 탓인지 모르겠다. 고통을 견딘 후 더는 오를 곳이 없는 정상에서 느끼는 상쾌함은 말할 수 없이 좋지만 너무 힘들게 오르는 과정이 싫고 그보다 정상에서 내려올 때의 허허로움이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정복자나 탐험가의 유전자가 없다는 것일 게다. 백두대간을 종주했다거나 천 몇 백 고지 산을 올랐다는 이야기들이 부럽기는 하지만 나는 웬만해서는 엄두를 내지 않는다.

  

   도중에 만난 황매암의 아름다운 고적함을 뒤로하고 한 무리의 길꾼들과 함께 장항마을의 당산소나무를 지나 매동마을로 향했다. 1박2일 팀이 다녀간 뒤로 지리산 둘레길이 유명해졌고 그들이 다녀간 쉼터나 민박집은 늘 그들의 포스터가 걸려있다. 매동마을도 그로 인해 유명세를 탄 곳이다. 느닷없이 일정을 변경한 탓에 겨우 예약을 해두었다. 하지만 마을로 들어가는 이정표가 없어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서서히 어둠이 내리는 산길을 무작정 걸어가야만 했다. 길옆에 있겠거니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 지리산 둘레길의 마을들은 포도송이처럼 다닥다닥 길에 붙어 있지 않았다. 

 

 

   불안감 끝에 상황마을 외딴 펜션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숙박료가 더 비쌌고 밥상도 형편이 없었다. 그나마 어둠 속에서 걷지 않았다는 위안이 있었지만 아침을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 사과 한 알로 아침을 때우고 길을 나섰다. 아스하란 고개가 기다리고 있었다. 등구재. 중턱에 서니 지리산 주능선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다랭이 논이 펼쳐졌다. 분지에는 마을들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손수 지었다는 황토집에 마음을 뺏겼다. 주인장의 물 받아 가라는 친절함에 감사했고 아담한 집의 탁 트인 전망이 매혹적이었다. 길을 걸으며 정말 마음에 드는 집을 만나곤 한다. 으리으리한 집이 아니라 주인의 정성스런 손길이 느껴지고 자연과 어우러진 집. 담양 소쇄원이나 명옥헌 같은 집.

  

   등구재를 넘으니 경상남도 땅이다. 장터에서 국밥 한 그릇을 먹고 힘들게 이 고개를 넘었을 장사치들이 떠올랐다. 간난하게 살았던 옛 시절이 뭉클하게 만져졌다. 운무가 드리운 푸르스름한 아침 산에서는 신성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밤새 감싸고 있다 서서히 놓아주는 저 순연한 손아귀. 멀리 천왕봉이 바라다보였다.

  2박 3일 동안 47킬로미터를 걸었지만 길에서 어떤 것을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주는 것만 받았음에도 때로는 성찰이 와서 평정심을 오래도록 간직할만한 마음공부를 하였다. 길을 왜 걷느냐고 물을 까닭도 없고 딱히 모범답안을 제시할 수도 없다. 다만 길이 좋아서 걸을 뿐이다. 길 위에서 만나는 타인의 삶을 통해 나를 반추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거니와 내 맘 속에 깃든 또 다른 나를 만나보게 되는 것이다.

   

 

    하늘은 얼마나 파랗던가. 그 바람은, 그 햇살은, 그 푸르스름한 산들은, 은빛 억새 물결과 황금들판은. 언제든지 경로를 바꿀 수 있고 언제든지 유예가 가능한 길 위에서 나는 행복하게 늙어가는 것이다.

출처 : 눈빛고을
글쓴이 : 꼬치까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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