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소걸음이 천리를 간다.
생활을 떠나서 불법을 따로 구하지 말라.
생활을 외면하고 따로 그 어떤 것이 있다고 믿지 말라.
살아가는 모든 것이 곧 불법이니 내가 있는 것이 불교요,
내가 살아가는 것이 불교다.
생활을 불교식으로 바꾸는 것이 작은 일이라면
생활과 존재 그 자체가 불법임을 깊이 깨닫는 것은 큰 일이다.
불교를 생활화하기 보다 생활이 진리임을 알라.
어떤 사람이 봄소식을 살피려고 산과 들을 헤매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마당에 매화가 피어 있더라고 했다.
불법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생활 속에 있다.
물 한 모금 마시는데, 밥 한 술 떠 넣는 데에 불법이 있다.
일하고 움직이는 거기에 불법이 있다.
말하고 생각하는 자리에,
손 한번 뻗고 발걸음 떼어놓는 데에 불법이 있다.
불법은 법당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안방에도 있고 부엌에도 있고 직장에도 있다.
밥 짓는 일,
청소하는 일,
설거지 하는 일,
아이 돌보는 일에도 불법이 있다.
물건을 만드는 일, 농사일에도 불법이 있다.
그러기에 풀 한 포기라도 불법 아닌 것이 없다고 한다.
스님들의 살림에만 불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중생들의 살림살이 구석구석에도 불법이 있다.
고로 사찰만이 도량이 아니라
내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도량이 되고 법상이 된다.
내가 딛고 선 어떤 곳이든 그대로 여래의 집이 된다.
불법은 현실의 법이요 생활의 법인 것이다.
따라서 불법공부란 경전이나 예불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공부하기로 들면 언제 어느 곳에서나 가능하다.
그래서 스님의 살림이나 중생의 살림이나 공부하는 데는 다를 게 없다.
법당에 가야만 공부가 되는 게 아니고
산 속으로 들어가 틀고 앉아야만 공부가 되는 것이 아니다.
공부는 지하철 속에서도 되고 저자거리 에서도 된다.
거기서 되지 않으면 산에 가서도 되지 않고 법당에 가서도 되지 않는다.
주부들이 밥 짓고 빨래하는 일에도 도가 있다.
더불어 먹고 더불어 사는 공양의 도리가 있을 수 있고
더럽혀진 마음을 깨끗이 세탁하는 도리가 있을 수 있다.
설거지를 하면서는 마음 비우는 도리를 염할 수 있을 것이고
청소를 하면서는 청정한 마음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공부하기로 들면 불법공부야 말로
세수하다가 코 만지기만큼 쉽다는 비유도 있다.
마음 공부 하는 데는 비용이 들지 않는다.
따로 시간을 떼어 낼 필요도 없다.
누구와 겨룰 일도 없고 누구와 자리다툼할 일도 없다.
세간의 어떤 일이 이와 같겠는가.
세간 일 쳐 놓고 돈 안 들고 시간 안 드는 일이란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불법공부를 어렵다고 한다.
빨리 뭔가를 이뤄보겠다는 욕심 때문이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자. 대학 졸업장 하나를 따는 것에만
초등학교부터 시작해서 꼬박 16년이 걸린다.
비용은 또 얼마나 들어 가던가.
석사 박사를 따자면 또 몇 년 세월을 더 투자해야 한다.
한 세상 살아가기 위한 준비를 위해서
그만한 시간과 비용과 노력이 소요되는데
불법공부만은 쉽게 하고 싶어 한다면 뭔가 크게 잘못된 생각이 아닐까?
불법은 세상이치를 깨닫기 위한 법이니까
불법공부는 평생 살아가는 동안 그냥 생활처럼 하면 된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가르침에 대한 믿음과
그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그대로 실천해 보겠다는 의지뿐이다.
믿음과 의지를 밑천 삼아 뚜벅뚜벅 황소처럼 걸어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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