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스크랩] 철저한 장인정신으로 대 잇는 전각 부자:석불(石拂)정기호(鄭基浩,1899~19

餘香堂 2013. 1. 7. 15:17

 

정 선생이 23일 언론 인터뷰에서 “민홍규씨가 지금 하는 행동은 우리 아버지의 명예와 나, 내 제자들에게까지 내려오는 전통에 먹칠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그의 부친이 누굴까에 관심이 미친다.

그의 부친 석불(石拂) 정기호(鄭基浩, 1899~1989) 선생은 우리나라 초대 국새를 제작한 한국 전각계의 거장이다.

경남 창원에서 면장의 외아들로 태어난 정기호 선생은 17세때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부친 주선으로 중국 봉천(奉天)시의 전각 대가인 서전각(西篆刻) 문하에 입문한 뒤 현대동장각(漢代銅章刻)에서 공부하는 등 10년을 공부하고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최고 실력자들과 실력을 겨뤘다.

1944년 국새 1호를 제작한 것으로 기록돼 있고 1954년 마산 고중당전각부를 설립해 후학들을 가르쳤으며 1973년 눌원문화상에 이어 1980년 부산시문화상을 수상했다. 1985년에는 정기호-정민조 부자전을 열기도 했다.

한국미술관 김윤순 관장은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은 생전에 석불을 가르켜 중국의 진나라와 한나라를 능가한다고 극찬했다”고 ‘고죽산방’(http://www.eztake.com/~mokbul) 인터넷 홈페이지 소개글에서 소개했다.

김 관장은 또 “석불은 정확하고 강렬한 중국의 기법을 익히고 일본의 다양한 기법과 풍부한 조화기법을 배우고 한국의 독창성과 불의와 타협을 거부하는 인격을 갖춘 분”이라고 평가했다. 김 관장은 한국 미술계와 박물관계에서 독보적인 발자취를 남기면서 한국 미술계의 대모로 불리는 인물이다.

이번에 옥새 전각장 계보에 의혹을 제기한 목불(木佛) 정민조(鄭民朝) 선생은 전각계의 명인인 석불의 외아들이며 부친의 정신을 전수받아 현대전각으로 계승·발전시킨 장본인이다.

석불은 외아들 목불에 이어 손자 경원군이 4세때 토불(土佛)이라는 호를 내려 3대가 전각예술의 맥을 이어가는 불(佛)자 돌림의 부자손이 되었다. 

 

 

 

 

▲고죽산방 목전각회 대구경북지회 목각전시회장에서.....

 

 


TJB(대전방송) ‘화첩기행’ 촬영이 있었습니다.
제목은 <백만번의 손길, 펜끝으로 만나는 세상>으로
1월 4일부터 8일까지 5일간 진행되었습니다.
양산 통도사에서 출발하여 부산, 울주, 포항을 돌아 서울 인사동 연구실까지
여행과 펜화 작업을 함께하는 과정을 담은 것입니다.
이곳저곳에서 경치도 보고, 유명 장인과 향토 사학자를 만나 대담을 하면서
작품을 완성해가는 과정을 밤낮없이 HD화면에 담았습니다.

4일 아침 10시 대전에서 만난 TJB 촬영 팀과 양산 통도사로 직행하였습니다.
통도사에 도착하니 아침부터 내리던 눈이 그치고 해가 나서
파아란 하늘과 소나무 숲길의 설경이 기가 막힌 배경 화면이 되었습니다.
이번 화첩기행은 스타트부터 행운이 따른 것입니다.
통도사 입구 도로에서 부터 카메라를 돌리며
피디와 촬영감독 모두 흥분한 모습이 역력하더군요.




조형주 촬영감독이 설경을 담고 있습니다.



오른쪽이 홍성진 피디, 왼쪽이 리포터를 맡은 박상인 선생.
백민 박상인 선생은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인 문인화가 입니다.
여러 가지 질문을 하여 화제를 이끌어 내기도 하고,
능숙하게 상황 설명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통도사에 1년 반을 살았지만 이런 기막힌 설경은 처음입니다.
이번 ‘화첩기행’이 무척 멋있을 것 같지요?
기대해 봅시다.
2월 초 금요일 밤 11시에 방영된답니다.



통도사 주지실 앞 계곡에도 눈꽃이 죽여주게 피었습니다.



사진작품 하나 건진 것 같습니다.
공모전에 출품해 볼까나 ㅋㅋㅋ



난간도 없고 폭이 60cm 밖에 안되는 일승교 위에서
목숨 걸고 촬영을 했다는 거 아닙니까.
“아차 하여 발이 미끄러지면 죽거나 최하 중상 이겠구나” 생각이 드니
간이 땅콩만해 지더군요.

PR에 목숨내건 셈입니다.



2002년 통도사 캘린더 만드는 소임을 맡아
통도사에서 살면서 처음 그린 그림입니다.
이때만 해도 그림이 무척 엉성했지요.
누운 소나무는 그림 그린 후 친해졌는데
2004년 경 홍수에 떠내려갔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적하시기 전 수제자 가섭존자에게
발우(밥그릇)를 맡기며
“잘 간직하고 있다가 미륵불이 나타나면 전해 주거라”고 했습니다.
완벽한 무소유로 사셨던 부처님이 법을 전하는 제자에게 내려 줄 유산이라고는
발우 하나와 입던 옷 밖에 없었지요.
이때부터 수제자에게 발우를 내려 주는 것이 불가의 전통이 되었지요.
미륵부처를 모신 용화전 앞에 돌로 만든 ‘석조발우’를 세운 이유입니다.

요즈음에는 물려줄 절이나 큰 재산이 없는 스님은 제자 한명 거두기도 어렵답니다.

발우 뚜껑 위에 눈이 소복하게 쌓여 ‘고봉밥’ 모양이 되었습니다.
‘고봉밥’이란 가난하던 옛날, 농사짓는 머슴의 밥그릇에는
밥을 수북하게 담아주던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통도사 주지 정우 큰스님의 배려로 옛 법사실을 촬영 장소로 배정 받았고,
통도사에서 인수한 ‘자비도량’이라는 호텔 방도 3개나 내 주셨습니다.
저녁 공양도 특실에서 특별 공양을 받았습니다.
반찬 가지 수도 많았고, 맛도 좋았습니다.
통도사 공양간(식당) 인테리어 수준은 호텔급으로 우리나라 사찰 중 최고입니다.
통도사는 우리나라 사찰 명단에 제일먼저 이름이 올라가는 우두머리 절입니다.



통도사 산내 암자인 ‘자장암’은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 스님이
통도사를 세우기 전에 수행하던 장소입니다.
이 후 중국에 유학을 가서 큰 스님이 되었고,
선덕여왕의 부름을 받고 돌아와 세운 절이 통도사니
자장암의 역사가 본사인 통도사 보다 오래 되었지요.


 

 

펜화에는 돌로 둥글게 만든 석문을 제외하였습니다.



법당 뒤에 감로수가 나오는 샘물이 있습니다.
개구리들이 샘물을 혼탁하게 하기에
자장 스님이 암벽에 손가락으로 구멍을 뚫고 그 속에서 살게 하였답니다.
자장스님의 엄지손가락이 고강도 텅스텐이었다지요, 아마 ㅋㅋㅋ

중앙 상단 암벽에 보이는 작은 구멍(주변이 흰곳)이 개구리 보금자리입니다.



엄지손가락 굵기 만한 바위구멍에 개구리가 삽니다.
통도사에서 살 때 여러 번 보았습니다.
이능화가 쓴 ‘조선불교통사’에도 기록이 있으니 자손 대대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입 주위가 금색이 난다고 ‘금와보살’이러고 부릅니다.
요즈음에는 동면에 들어갔습니다.
보고 싶으면 봄에 오세요.
그런데 ‘심뽀가 고약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답니다.



자장암 관음전 앞에 ‘거북이 바위’가 문 앞에서 부터 살아 있습니다.



법당 마루에 튀어 나온 ‘거북이 바위’
자연 사랑도 이쯤 되면 ‘세계 제일’이지요.



현 주지 현문 스님이 지은 다실 ‘취현루’에서 바라본 영축산.
프랑스 르몽드지 사장이 이 절경에 “뻑 갔다”고 합니다.



취현루에서의 촬영장면.
내가 팽주(차를 우려내는 역할)을 하며 대담 형식으로 진행을 하였습니다.



자장암 공양주보살(음식을 만드는 여인)의 음식 솜씨가 좋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반찬이 자그만치 10가지에 매생이 국이 나왔습니다.



부산 송정 해수욕장 까페에서 펜화 작업을 하는 모습을 찍었습니다.



새우깡을 던져주면 갈매기가 기막힌 솜씨로 받아먹습니다.



울주에서 ‘목전각’을 하시는 목불 정민조 선생을
그의 작업실인 고죽산방에서 만났습니다.



끌로 각을 파는 정선생



정선생 사모님께서 점심상을 정성스럽게 차렸습니다.
그런데 굴이 들어간 반찬이 많아서 채식가인 나는
그림에 떡이었습니다.


눈이 엄청 온 포항에 대전방송 승합차로 엉금엉금 기어가서

한 밤중에 구룡포항에 짐을 내렸습니다.

아침나절 박선생과 구룡포 해변을 거니는 장면을 찍었습니다.


 


바람이 세게 불어 파도는 볼만 하였으나
추위에 고생 좀 하였지요.



과메기 덕장은 추위와 바람으로 제철을 만났습니다.
꽁치를 꼬리 쪽만 남기고 반으로 가른 후 뼈와 내장을 발라 ‘ㅅ’자 모양으로 만들어
대막대에 걸어 놓은 과메기는 4일이면 완성이 되어 출하 한답니다.
구룡포 향토사학자인 정태현 기자가 출연하여 설명을 하였습니다.



구룡포 항은 일본인들이 개발한 어항으로 아직도 일본인 집들이 남아 있어
‘일본인 거리’를 조성하여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현재 어획량이 전국 4위에 드는 중요 항구입니다.



인사동 고미술가게 ‘아취사’에서 구입한
1920년대의 통도사 범종루와 만세루 사진 엽서.
희귀한 자료입니다.




사진엽서를 이용하여 펜화를 그리는 연구실 촬영 장면입니다.



자세히 보니 범종루 기둥은 지금까지 바뀌지 않았습니다.

난간 모양이 조금 바뀐 정도 입니다.
종루 뒤의 만세루는 기둥만 있는 모습인데
통도사 스님들도 모르는 사실입니다.
요즈음에는 벽을 막아 기념품 판매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8일, 토요일 오후,
일주일간의 촬영이 모두 끝났습니다.
1시간짜리 다큐멘터리를 위하여 일주일간 밤낮으로 작업을 하였습니다.
‘화첩기행’을 위하여
고생한 팀이 모여 인사동 채식식당 ‘오세계향’에서
서로의 노고를 치하하였습니다.
오른쪽부터 김창곤 촬영기사, 조형주 촬영감독, 홍성진 피디,
나, 박상인화백, 김덕봉 님.

“모두 고생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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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샘 김영택님 1972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였다. 대한민국 산업디자인전 심사위원을 지냈으며, 1993년 국제상표센터가 전세계 그래픽 디자이너 중 탁월한 업적을 쌓은 탑 디자이너 54명에게 수여한 ‘디자인 앰배서더’에 국내 최초로 뽑혔다. 1994년 벨기에에서 개최된 제1회 세계로고디자인 비엔날레에 초대작가 및 연사로 초청되었다.

한국 전통건축의 아름다움에 반해 전국을 여행하면서 펜으로 그리고 있으며 삼성물산, 대한항공, 기업은행,

하나은행, HOARE GOVETT를 비롯한 많은 기업의 펜화작업을 하였고, 한국 최대의 사찰인 통도사의 건축문화재를 펜화로 수록하는 작업을 하였다. 한남대학교, 관동대학교에 출강하였으며 세종대학교 겸임교수를

지냈다. 2004년 학고재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현대백화점 전국순회전을 갖었다. 중앙일보 및 법보신문에 ‘김영택의 펜화기행’을 연재하였고, 현재 주간조선에  ‘김영택의 펜화로 보는 한국’을 연재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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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晛溪亭
글쓴이 : 晛溪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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