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학으로 본 명당 서울
풍수지리에 의하면, 明堂이란 높고 낮은 산이 사방을 에워싼 가운데 작은 하천이 모여 흘러 나가는 입구가 남쪽으로 터져 있는 곳을 말한다. 즉, 음양오행설에서 만물을 생성시키는 근원적인 힘이라고 주장하는 氣가 산맥을 따라 흐르다가 특정 장소에 집중되어 穴을 이루는데, 이 혈에 도읍이나 집터 또는 묘지를 정하면 땅 속의 기를 받아 복을 누리게 된다는 토지관이다.
조선의 수도 한양(서울)은 명당의 좋은 예이다. 북악산(백악산)은 主山, 남산(목멱산)은 案山, 인왕산은 白虎, 낙산(낙타산)은 靑龍에 해당되며, 청계천은 明堂水, 한강은 客水에 해당된다
서울을 둘러싼 산세는 외사산(外四山)과 내사산(內四山)으로 이루어져 이들 산을 이용해 성곽을 쌓을 수 있는 천연적인 입지 조건을 갖추었다. 밖으로는 북쪽에 북한산(836m), 남쪽에 관악산(632m), 동쪽에 용마산(348m), 서쪽에 덕양산(125m)의 外四山이 둘러 있고, 안으로는 북쪽의 북악산(342m), 남쪽의 목멱산(남산, 262m), 동쪽의 낙산(125m), 서쪽의 인왕산(338m)의 內四山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이들 산봉(山峰)을 따라 성곽이 연결되어 있다.
서울의 지리
서울은 풍수적으로도 훌륭한 위치에 있다. 우리의 전통적인 마을이나 도시는 보통 배산임수(背山臨水)라는 풍수 원칙에 맞추어 위치하고 있는데, 이 마을이나 도시를 사방에서 감싸주고 있는 조산(組山) 중 뚜렷한 네 산을 외사산(外四山)이라 한다.
또한 조산에서 갈라져 나온 뒷산을 주산(主山)-후현무-, 앞산을 안산(案山)-전주작-, 주산의 좌측 즉 동편의 산을 좌청룡, 주산의 우측 즉 서편의 산을 우백호라 한다.이들을 내사산(內四山)이라 하는데, 곧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이 감싸 보호해 주고 있는 형국이 된다.
내사산 안쪽은 필연적으로 분지 형태를 띄게 되며, 물이 흐르게 된다. 이 물을 내수(內水)라 한다. 내수는 안산 밖으로 흐르는 큰 강과 만나게 되는데, 이를 외수(外水)라 한다. 즉 조산과 주산을 등지고, 내수와 외수를 바라보는 배산임수의 형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서울의 외사산은 북쪽의 북한산, 남쪽의 관악산, 동쪽의 용마산-일명 아차산-, 서쪽의 덕양산이며, 외수는 한강이다. 서울의 다른 이름 '한양(漢陽)'에서 '양'이란 산의 남쪽, 강의 북쪽이란 뜻으로, 곧 북한산의 남쪽 기슭, 한강의 북쪽 가를 이름이다.
서울의 내사산은 후현무로서 백악과 응봉, 좌청룡으로서 응봉에서 이어진 타락산, 우백호로서 백악에서 이어진 인왕산, 전주작으로서 흔히 남산으로 불리우는 목멱산이다.
이 내사산에서 발원한 물이 한데 모여 서울의 내수인 청계천을 이루고, 청계천은 중량천-흔히 중랑천이라고 하는-과 합수하여 한강과 만나게 된다. 이렇게 서울은 산과 물이 한데 어우러진 명당 중의 명당이라 할 만 하다.
한양으로의 천도
많은 지역 중에서 하필이면 지금의 위치를 수도로 잡았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무학대사에 관련된 이야기이다. 무학이 도읍지를 정하라는 태조의 명을 받고 지금의 왕십리 지역에 이르러보니 지세가 도읍이 되기에 적당하게 여겨져 도읍지로 정하려 했다.
그 때 웬 노인 하나가 소를 몰고 그의 옆으로 지나가며, "이놈의 소! 미련하기도 마치 무학 같구나. 바른 길을 버리고 지름길로 가려느냐"하였다. 놀란 무학이 노인에게 자문을 구하니 "이곳에서 십 리만 더 들어가시오"라고 가르쳐 주어 십 리를 더 들어갔더니 백악과 인왕, 타락산과 목멱산으로 둘러싸인 지금의 서울 도성 안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무학이 노인을 만난 곳을 '왕십리(往十里)'라고 이름붙였다는 일화이다. 이 이외에도 무학이 만경대 서남쪽 비봉에 이르니 돌비석에 '무학이 길을 잘못 찾아 이곳에 오다'라고 씌어 있어 길을 바꾸어 만경의 정남향으로 백악 아래에 이르렀다는 이야기 등, 한양에 도읍지를 정한 유래에는 무학대사와 관련된 것만 2가지가 있으며 그외에도 정도전 등과 관련된 일화 등 수많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많은 이야기들 중 어떤 것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렇게 많은 유래가 존재할 만큼 서울 지역이 도읍지로 정할 만한 곳이었다는 사실에는
서울 4대문
조선조 초에 정도전(鄭道傳)은 한양의 성문과 중앙의 종루 이름을 사람이 살아가면서 늘 지켜야 할 다섯가지 도리, 즉 인(仁) 의(義) 예(禮) 지(知) 신(信)의 오상(五常:五行)을 따서 붙였다. 그리하여 흥인지문(興仁之門:동대문), 돈의문(敦義門:서대문), 숭례문(崇禮門:남대문), 홍지문(弘知門), 보신각(普信閣)이란 이름을 지었다.
그런데 서울의 4대문이라 하면 동대문, 서대문, 남대문만을 떠올린다. 어찌된 일인지 ‘북대문’하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흔치 않다. 이는 북대문이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에 있는데다 풍수지리설과 속설에 휘말려 창건한지 18년만에 폐쇄되었기 때문이다.
북대문인 숙정문은 북한산 동쪽 산마루턱의 성북구 성북동 계곡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숙정문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나라를 세운지 5년만인 1396년에 완공하였던 것. 그러나 당시 풍수학자 최양선(崔楊善)이 “동쪽, 서쪽 봉우리는 정궁인 경복궁의 양 팔과 같아 닫아 두어야 한다”고 건의, 축조한지 18년만인 1413년에 폐쇄하였다.
그 뒤 가뭄이 심하면 음의 기운이 강한 숙정문을 열어 비가 오기를 기원했으며 장마가 심하면 닫았다고 한다. 또 순조때 실학자 오주(五洲) 이규경(李圭景)은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篆散袴)’에 ‘숙정문은 음의 자리에 있어 열어두면 서울 장안의 여인네들이 바람난다’고 쓰고 있다.
이는 정월 보름 이전에 숙정문을 세 번 오가면 액운이 없어진다고 해서 부녀자들의 나들이가 많아지자 남정네들도 모여들어 풍기가 문란해졌기 때문에 그와 같은 속설이 퍼진 것이라 한다.
숙정문은 태종 13년에 폐쇄된 채 있다가 1504년(연산군 10년)에 동쪽으로 약간 옮겨 석문만 세웠던 것을 1976년 북악산 일대의 성곽을 복원하면서 문루를 짓고 ‘숙정문’이란 편액을 달아 오늘에 이른 것이다. 현재의 숙정문은 군부대의 바깥 쪽에 있어 보안상의 이유로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된 채 굳게 잠겨있다.
북대문(홍지문:弘智門) : 북문은 오행상 土요, 智를 상징하며, 현재 삼청동 터널 위쪽에 복원해 놓은 숙정문(肅靖門)입니다. 그런데 이 숙정문은 본래 방위에 맞추어 문을 내기는 했지만 문의 구실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풍수설에 의해, 북문을 열어 놓으면 음기(淫氣)가 침범하여 서울 부녀자들의 풍기가 문란해 진다 하여, 문을 만들어놓기만 했을 뿐, 그곳을 통해 드나들지는 않았습니다. 숙정문 축조한지 18년만인 1413년에 폐쇄 하였습니다. 대신 숙정문 서북쪽으로 약간 비껴 오늘날 상명대학교 앞쪽에 홍지문(弘智門)을 내고 그쪽을 통해 다니게 되었습니다.
도성의 북대문으로 본래 이름은 홍지문이지만 보통 숙정문이라 불렸다. 다른 문과 달리 항상 닫아놓아 사람이 통과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 그것은 일반적으로 당시 전염병이 북쪽에서 시작하여 점차 남쪽으로 번져갔으므로 이를 막는다는 의미에서라 한다.
당시만 해도 전염병이 한번 발생하면 전국적으로 퍼져 희생자 숫자가 매우 커서 전염병 방지는 국가적으로 매우 중대한 사안이었다. 다른 이유로는 도성 방위상의 이유가 있었는데 숙정문은 위치상 이곳만 지나면 곧바로 북악산을 거쳐 경복궁에 이르렀으므로 혹시 있을지 모르는 반란등에 대비하였던 것이다.
백악(지금의 북악산)을 금산(禁山)이라 하여 출입을 통제하였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지금도 북악산은 정해진 곳 이외에는 민간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고 있다.
북악산(北岳山)
북악산(343m)은 경복궁의 주산이며 산세가 좌우 균형을 이루면서 중심 부분이 반듯하게 솟아 있어 마치 갓 피어난 꽃봉오리와 같다. 백악산(白岳山)이라고도 하는데 조선시대부터 백악(지금의 북악산)을 금산( 禁山 )이라 하여 출입을 통제하였다.
낙산의 산세
낙산은 원래 서울 동쪽산으로 좌청룡에 해당하나, 산세가 약하여 기운이 빠져 나간다고 보고 세종 때 문을 고치면서 흙으로 더 높이고 ‘지(之)’자 하나를 더 붙여 기운이 빠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울이 팽창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낙산은 암석이 좋고 물이 깨끗하여 즐겨 찾는 곳이었다고 한다. 성벽은 산세를 따라 완만하기도 하고, 급하기도 하면서 낙산 정상까지 상승한다. 성벽 몇 군데 암문을 두어 성의 내외가 소통될 수 있도록 하였다. 좌우를 둘러보고, 앞뒤를 재어봐도 빼곡하게 들어찬 집들은 낙산성곽의 매력을 반감시킬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도 풍광임에는 분명하니 바라보는 성의 이쪽과 저쪽은 사뭇 다르다.
안쪽은 낡은 한옥과 일본식 집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는 반면, 성곽 너머로 건너다보이기도 하고 내려다보이기도 하는 성 밖은 다세대 주택과 빌라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낙산 정상 중앙광장에 이르는 동안 이러한 풍광은 이어진다. 마을버스 종점인 낙산 정상, 서울 시내가 가장 잘 조망되는 곳이라 한다. 동숭동과 이화동은 물론 창경궁과 후원도 내려다 보인다. 사진 전공인 듯한 학생 몇이 각자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비우당(庇雨堂)을 들리거나 자지동천(紫芝洞泉)을 들러도 좋을 법하다. 비우당은 조선 초의 청백리 정승인 유관 선생의 고택으로, 유관 선생이 비가 새는 허름한 집에서 살며 비가 오면 우산을 받쳐들었다는 곳이다.
단종이 영월 청령포에서 귀양살이 할 때, 단종 비 정순왕후 송씨는 불가(佛家)에 입문, 청룡사에 머물렀다. 이때 곤궁한 생활을 위해 비단에 자주물을 들여서 댕기·저고리깃·고름·끝동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팔아 생계를 이어갔다. 자지동천은 정순왕후 송씨가 비단을 빨아 자주색 물을 들여 널어 말린 바위 아래 샘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기거하던 이화장에 들러도 좋다. 이화장을 나오면 동숭동 대학로로 이어진다.
하산길 제3전망 광장 부근, 낙산 능선 너머로 지려는 해를 만났다. 붉고 뜨거운 것의 몰(沒). 길고 뜨거웠던 왕조의 시대도 그렇게 저물어 간 모양이다.
목멱산 유래
남산은 중구와 용산구가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높이가 265m이고, 면적은 2.97㎢(약90만평)에 이른다. 남산은 조선개국과 더불어 내4산(북 현무인 북악산, 남 주작과 안산인 남산, 우 백호인 인왕산, 좌 청룡인 낙산)의 하나로, 안산은 천성(天星)으로 말하면 천상(天床)과 사귀인(四貴人)이 되는데 천상이 잘못되면 왕위를 잃게된다는 매우 중요한 산으로 지기가 흥해야 나라가 안정된다는 생각 하에 금표를 세워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물론 봉수대가 있어 보완상의 문제라든지 경복궁을 바라 볼 수 있어서 일지도 모르지만 역대 임금의 실록에서도 남산에 관한 문제가 자주 등장한다.
남산(南山)은 흔히 마뫼, 앞산, 목멱산(木覓山), 인경산(引慶山), 열경산(列慶山), 잠두봉(蠶頭峯), 종남산(終南山) 등의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남산은 경복궁의 정남쪽에 있는 산이란 뜻이고, 앞산, 마뫼는 순수한 우리말이고, 목멱산은 필자 소견으로 파자(破字)를 하면 외사산의 하나인 관악산이 호시탐탐 경복궁을 넘보고 있는 형상이라 남산에 나무(木)를 많이 심어 경복궁을 아니(不)보게(見) 하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잠두봉은 산의 형상이 누에의 머리를 닳았다해서 붙여졌고 한강 건너 사평리(沙平里)에 국가시책으로 누에의 먹이인 뽕나무를 많이 심어 안산의 기를 증진시키려 했단다. 지금은 뽕나무 대신 아파트와 고층건물이 들어선 잠실(蠶室), 잠원(蠶院)동 등이 그 옛날의 유래를 말해주고 있다.
인경산(引慶山)과 열경산(列慶山)은 서울의 안산인 밝고 양지 바른 남산이여 길이 길이 경사스러운 일들을 끌어들이라는 축원의 뜻이 있는 명칭이라 한다. 종남산은 조선8도 봉수가 끝나는 남산이라는 의미에서 종남산 이라 불렸다. ‘한양 8경’의 하나인 목멱상화(木覓賞花:남산의 꽃구경)에 맞춰 중구청에서는 좋은 날을 골라 남산 걷기 대회(4월 13일)를 실시한다고 한다. 가족과 이웃이 함께 참가하여 남산도 이해하고 건강도 증진시켜 보자.
인왕산
서울특별시 종로구와 서대문구 홍제동 경계에 있는 산.
높이 338m이다. 전체가 화강암으로 구성된 서울의 진산(鎭山) 중 하나이다. 이 산의 능선을 따라 성곽이 이어지며 동쪽 산허리로 북악(北岳)과 연결되는 인왕산길이 지난다. 조선 초에 도성(都城)을 세울 때, 북악산을 주산(主山), 남산(南山)을 안산(案山), 낙산(駱山)을 좌청룡(左靑龍), 인왕산을 우백호(右白虎)로 삼았던, 조선조의 명산이다. 봄에는 진달래가 만발하고 곳곳에 약수와 누대(樓臺)가 있었다.
경치가 아름다워 이를 배경으로 한 산수화가 많은데, 특히 정선(鄭)의 《인왕제색도》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일제 강점기에 인왕산의 표기를 ‘仁旺’이라 하였으나, 1995년 ‘仁王’으로 옛지명이 환원되었다.
인왕산 치마바위
서울 종로구 옥인동에서 인왕산을 바라보면 병풍바위 밑에 오똑하게 튀어나온 ‘치마바위’가 보인다. 이 바위에는 조선조 중종과 폐비 신씨와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이 왕위에 오르자 반정(反正) 공신들은 왕비인 신씨의 아버지가 연산군측 사람이라는 이유로 신씨를 폐위시켜 인왕산으로 쫓아냈다. 신씨를 잊지못하던 중종은 날마다 경회루에서 인왕산 쪽을 바라보았고, 신씨도 중종이 볼 수 있도록 자신의 붉은 치마를 이 바위에 걸쳐놓고 중종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이 때부터 치마바위로 불렸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오늘날 ‘무악재’라 불리게 된 것은 조선조 초기에 도읍을 잡으면서 풍수지리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삼각산(837m)의 인수봉(810m)이 어린 아이를 업고 나가는 모양이라 하여 이것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안산을 어머니 산으로 삼아 무악이라 하고 이 고개를 무악재라고 하였던 것이다.
또 별칭으로 ‘무학재’라고도 하는데 이는 이성계가 도읍을 정할 때 하륜의 건의에 따라 무악의 남쪽을 잡았으나 반대론에 부딪혔고 결국 왕사였던 무학대사의 의견이 채택돼 북악산(342m)밑으로 결정됐다. 이런 연유로 무악재와 발음이 비슷해 무악재와 무학재를 서로 혼용하기 때문이다.
무악재는 우리 역사에 얽힌 영욕과 애환이 스며있는 고개다.
이를테면 조선조 인조 13년(1636) 병자호란을 맞아, 도성 안팎의 수 많은 청춘남녀가 볼모로 잡혀 멀고도 먼 북쪽 만주벌로 끌려가며 눈물로 뒤범벅이 된 채 이 고개를 넘어야만 했다.
그 뒤 세월이 흘러 인질에서 풀려 난 병든 여러 군상(郡像)들이 돌아오며 오랑캐에서 더럽혀진 몸을 모래내에서 목욕재계하고 넘어 오던 고개도 이 무악재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난의 논공행상을 함에 있어 불공평한 상벌에 불만을 품고 이괄이 반기를 들고 넘어 오던 고개도 바로 무악재였다.
이보다 앞서 선조 25년(1598) 임진왜란으로 왕이 의주로 몽진(夢進) 길에 오르면서 왕과 조정 중신들도 이 고개를 넘었다.
조선조 초기 왕사인 무학대사와 중신 정도전이 의견충돌을 벌이다 결국 조정을 떠나게 된 무학이 이 고개에서 고개 밑, 그러니까 오늘날 현저동을 내려다 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세는 참으로 좋건만, 그러나 어찌할꼬! 앞으로 수 많은 선남 홀아비들이 우글거릴 곳이로고…, 쯧쯧쯧” 그 자리에 서대문 형무소(오늘날 독립공원)가 자리했으니 수 많은 우국지사들이 갇힐 자리임을 예언한 것일까.
예전에는 대륙으로 통하던 관문이었던 무악재가 오늘 날에는 신의주로 통하는 1번 국도로서 통일가도로 이어지는 멀고도 먼 고난과 기다림의 관문이면서 동시에 모진 고개(惡峴)가 됐다. 세월이여!
무악동 국사당 방면
▶ 기도터와 굿당의 위치
독립문 사거리에서 무악재 방향으로 50여 미터(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부근) 가다보면 도로 우측에 국사당이란 안내간판이 보인다. 안내간판 쪽으로 우회전하여 골목길을 따라 직진하여 150미터 가량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가면 인왕산 인왕사(仁旺山 仁王寺)라고 쓴 현판이 붙어있는 일주문이 나온다. 일주문을 지나(일주문을 지나면 주차할 수 있는 공터가 있음) 급한 경사길과 계단을 따라 70여 미터 올라가면 큰 범종이 달려있는 누각이 나온다. 이 누각의 맞은 편에 국사당을 관리하는 당주집이 있으며, 누각 옆에 향, 초, 쌀 등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는 작은 슈퍼마켓이 있다. 이곳에서 30여 미터 올라가면 ‘국사당’이 있다.
국사당을 지나 계단으로 10여 미터 올라가서 우측 길을 따라 5미터 정도 가면 ‘약수터’(용궁)가 있으며(이 약수터는 산 위쪽에서부터 내려오는 좁은 계곡에 위치함), 좌측 길을 따라 20여 미터 올라가면 ‘선바위’가 있다.
선바위를 지나 위쪽으로 30여 미터 올라가면 우측에 ‘산신각’이 있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바위틈을 타고 가파른 길을 돌아가면 큰 바위들이 있으며 곳곳에 기도터가 있다. 이곳을 찾는 기자(祈者)들에 의하면, 이쪽 기도터에서 기도를 하면 대신
할머니가 많이 실린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 산 정상 쪽을 보면 정상은 두 개의 바위 봉우리(두 바위 봉우리의 거리는 40여 미터 떨어져 있음)로 되어 있다. 기자(祈者)들은 좌측 바위 봉우리를 ‘천존전’ 또는 ‘칠성전’이라고 부르며, 우측 봉우리를 ‘장군당’이라 부른다. 천존전 아래에는 기도할 수 있는 제단과 작은 용궁, 돌탑이 있다. 기자들은 돌탑을 서낭으로 모신다. 장군당 아래에도 제단이 있다.
산 정상이나 장군당 우측 넘어 능선 쪽으로는 군부대가 지키고 있어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인왕산 선바위의 좌측 아래 즉, 관리사무소 뒤쪽에도 기도터가 있는데 그곳에서는 기자들이 자손을 바라는 기도를 많이 드린다. 인왕산은 바위가 많은 산이다. 바위 곳곳에 허공 기도터들이 많이 있다.
▶ 국사당(國師堂)
국사당은 중요민속자료 제2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조선초기부터 있었던 오래된 신당(神堂)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태조 4년(1404) 겨울 12월에 이조(吏曹)에 명하여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한 뒤, 경대부(卿大夫)와 사서(士庶)는 제사하지 못하게 했다. 『여람(輿覽)』에 의하면, 목멱신사는 목멱산 마루에 있어 항상 봄가을로 초제(醮祭)를 행하였다고 한다.
『오주연문(五洲衍文)』에 의하면, 경성 목멱산 잠두봉(蠶頭峯)의 국사당을 음사(淫祀)라 하였고, 목멱산신 향사(享祀) 때에는 전사청(典祀廳)을 속칭 국사당이라 했다.
거기에는 고려의 공민왕, 본조(本朝)의 승(僧) 무학, 고려의 승 나옹, 서역(西域)의 승 지공상(指空像) 및 기타 제신상이 있으며, 또 맹자상(盲者像)과 작은 여아상(女兒像)이 있는데 여아는 두신(痘神)이라 하여 신전(神前)에 지분(脂粉, 연지와 백분) 등을 베풀어 지나치게 설혹(褻惑)하였고, 기도 또한 성대히 베풀어 나라에서도 금하지 못했다”(이능화,『조선무속고』이재곤 역 동문선 1991, 210쪽).
조선 고종 초에 만들어진 『동국여지비고』한성부 편에 “목멱신사는 목멱산 마루에 있어 봄'가을에 초제를 지냈었는데, 지금은 폐지하고 사당만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국사당 앞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국사당은 호신신장(護身神將)을 모시는 당으로 태종대왕 때 三神(天神, 山神, 水神), 이태조, 무학국사와 제호신장(諸護神將)을 모시고 국사당이라 명명했다. 후에 최영장군, 나라 제군신(帝君神)과 군웅별상(軍雄別相) 등도 모시게 되었다. 이곳은 삼지부 국사당 대표자인 동의 각심사, 서의 구파발, 남의 우수현 등 세 곳의 만신들이 모여서 신봉하고 국태민안을 기원하던 당이다. 이 당은 처음에는 남산(팔각정자리)에 세웠으나 일제 당시 일인들이 남산에 일인 신궁(神宮)을 건립하고자 서기 1925년 7월에 인왕산 현지에 옮겨다 세웠다.”
국사당 유래와 관련된 설화 한편이 전해진다.
함경도 영흥땅 어느 마을에 노파 한 사람이 살았는데 슬하에 딸 하나가 있었다. 이태조가 아이 때 그 집 앞을 지나가자 노파는 태조에게 몰래 말하기를 “장차 임금이 될 것이니 몸을 조심하시고 시장하거나 무슨 의심나는 일이 있거든 꼭 찾아오시오”하였다.
하루는 태조가 그 집 앞을 지나가는데 비가 몹시 와서 그 집에서 자게 되었다. 노파가 웃으면서 “오늘은 조용히 할 말이 있으니 잘 오셨소”한다. 저녁이 되어 태조는 아랫목에 눕고 딸은 윗목에 누웠다. 밤이 깊자 할머니는 태조에게 앞으로 어찌어찌 할 것이며 임금이 되거든 도읍을 한양에 정하라고 하고 여러 가지 비밀을 말하는데 그 딸이 말참견을 한다.
노파가 “방정맞은 년 왜 자지 않고 이러는 것이여”하고 태조에게 “도련님 고년 빰을 때리시오”한다. 말하던 것이 누설되면 큰일이라고 생각하여 뺨을 한 대 몹시 쳤더니 그 딸이 사지를 바르르 떨고 죽는다. 태조는 어이가 없어 “내가 당신 딸을 죽였으니 나를 관에 고발하여 죄를 받게 하시오”하였다. 노파는 태연히 “이 일은 제가 잘 못하여 죽은 것이고 저의 운명이요. 그러나, 이 밤으로 나가 저 아이를 묻읍시다”한다.
태조는 그 아이의 시체를 지고 노파는 땅 팔 것을 메고 나가 뒷산에 묻은 뒤에 태조의 소매를 잡고 울면서 “내가 도련님의 큰 사업에 누가 끼칠까 한 것이오. 이 길로 가시어 대업을 이루시고 잊지나 마십시오. 나도 새벽이 되면 다른 데로 가겠소”하였다.
그 뒤 태조가 세상에 나와 현관(顯官)이 된 뒤에 그 할머니를 함경도 전역으로 수소문했으나 영영 찾을 수 없었다. 그 뒤 태조는 조선을 개창하고 한양에 도읍을 정한 뒤에 남산 중턱에 집을 짓고 그 모녀의 초상을 그려 달고 ‘국사당’이라 칭호하고 춘추로 무당을 시켜 굿을 하여 그 영혼을 위로하였다(장주근, 「국사당」,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제16호, 문화재관리국, 1965, 11-14쪽)
이성계가 남산을 목멱대왕으로 봉하고 국가에서 춘추로 관리를 보내어 남산산신께 제를 지냈다는 것과 조선왕조 초기부터 남산에 신당(神堂)이 있었다는 점으로 보아 국사당은 남산과 관련된 신앙에서부터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현재 국사당 안에는 삼불제석, 무학대사, 강씨부인, 호구아씨, 최영장군, 별상님, 나옹님, 칠성님, 용궁님, 민중전(명성황후), 산신님, 이성계, 단군님, 신장님, 곽곽님, 창부씨의 환이 모셔져 있다.
현재 모셔진 환(무신도)으로 보아 이성계와 그를 도왔던 무학대사 등은 물론, 서울지방 무속에서 전형적으로 모시는 제석, 호구아씨, 별상, 신장, 창부씨 등 여러 신령님과 우리민족의 국조(國祖) 단군, 고려의 충신 최영장군, 조선말기의 인물인 명성황후도 모셔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명성황후가 국사당에 모셔진 것은 그가 궁중 나인들을 시켜 국사당에 치성을 드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애초에 봄'가을의 초제를 지내기 위해 만든 신당이 후대로 내려오면서 국가의 관리에서 벗어나 서울지역의 모든 무속인들이 기도하고 숭배하는 기도터이자 굿당으로 대중화되고, 국사당에서 모시는 신도 이성계와 그를 도와준 이지란, 무학대사 등 조선 왕조의 건국 영웅들과 더불어 고려의 충신 최영장군 등 서울지방 무속인들이 모시는 일반적인 무속신들이 함께 모셔졌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국사당을 찾는 무속인들은 이성계보다는 최영장군을 크게 모신다. 서울의 무속인들은 진적굿을 할 때 국사당에 와서 장군님 “문고 받는다”고 하여 최영장군님 환 앞에 가서 절을 하고 당주로부터 도장을 받아간다. 국사당 당주는 먼저 최영장군님께 “아무개 보살이 언제 신사를 드린다고 하니 도와주세요” 하면서 아뢰고 축원을 해준 다음 사고지에 도장을 찍어준다. 지금도 서울굿의 옛법을 아는 서울 만신들은 이 풍속을 지켜가고 있다. 조선초기와는 달리 언제부터인가 국사당을 찾는 무속인들에게 최영장군이 조종(祖宗)으로 모셔지고 있는 것이다.
“국사당은 약 스무 평 남짓한 다른 전통적인 사당들에 비하여 비교적 공간이 넓은 단층 기와 건물이다. 이 사당은 원래 마루를 깐 열 두 평 짜리 큰 공간이 전부였으나 남산에서 현재의 인왕산 자리로 이사하고 나서 그 후 본건물의 양쪽 날개에다 각각 네 평 짜리 방을 덧붙였다”(조흥윤, 『한국의 무』, 정음사, 1983, 87쪽). 국사당 건물과 당 안에 모셔놓은 환(무신도)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국사당 앞의 작은 등나무는 서낭으로 모셔진다. 인왕산에 기도를 하러 오는 사람들은 이 서낭나무 앞을 지날 때 인사를 한다.
국사당 당주(여, 73세) 유순자에 의하면, 국사당이 남산에 있을 때 시아버지가 매입(買入)했는데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신사보다 국사당이 위에 있다고 하여 옮기도록 해서 인왕산 밑 임야에 터를 잡고 이전비는 일본인들이 부담하여 옮겼다고 한다. 유순자의 말을 들어보면 자신의 시아버지가 일제 말기인 1940년대에 국사당을 구입하여 인왕산으로 옮겼다고 하나 국사당 앞 안내판에는 1925년 7월에 옮긴 것으로 되어 있다. “어떤 사람이 국사당에 많이 오느냐”라는 조사자의 질문에 유순자는 “본토박이 서울만신들이 굿을 하러 많이 오며, 외지에서 오는 사람들은 가끔씩 기도를 하러 온다”고 말한다.
▶ 선바위
국사당을 지나 용궁 가는 방향으로 10여 미터 가다가 왼쪽으로 갈라지는 길을 따라 20여 미터 올라가면 선바위가 있다. 선바위는 거대한 암석 두 개로 되어 있는데 ‘禪’자를 따서 선바위라고 부른다. 이곳을 찾는 기자(祈者)들은 ‘석불님’이라고도 부른다. 선바위에는 무속인 뿐만 아니라 임신을 원하는 부인이나 불교신자, 일반인들도 많이 찾는 곳이다. 이곳에서 기도를 하면 한 가지 소원은 이루어진다는 말이 전해진다.
석불 좌측에는 관리사무소가 있는데 국사당 밑에 있는 본원정사의 스님이 사무소에 있으면서 선바위 주위를 관리한다. 석불 앞에는 제단이 있으며 좌측과 우측에는 촛불을 밝혀놓을 수 있는 시설물(비, 바람이나 화재를 막을 수 있도록 양철로 네모나게 주위를 막고 지붕을 만들어 놓은 것)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기도하는 사람을 위해 관리사무소에서 방석을 준비해 두었다. 선바위는 많은 기도자들로 언제나 붐비는 곳이다.
선바위의 유래는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의 명을 받고 천도할 곳을 찾다가 현재의 서울을 찾아 내고는 인근 산에 올라가 바라보니 국운이 5백년 밖에 유지하지 못할 것을 알게되자 이곳 선바위에 와서 천일 기도를 하였다고 하며, 그 뒤부터 이 바위가 유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성계가 도성을 쌓을 때 왕사(王師)인 무학대사와 문신인 정도전이 이 바위를 성 안으로 하느냐 성밖으로 하느냐로 크게 의견이 대립되었다.
태조는 결정을 미루고 돌아와 잠을 자는데 꿈에 4월인데도 눈이 쌓이고 있었다. 밖을 내다보니 낮에 회의하던 곳이 보이고 안쪽으로 들여쌓은 쪽의 눈이 녹아 버렸다. 태조는 이것이 하늘의 계시임을 알고 정도전의 주장대로 선바위를 성밖으로 두게 하자 무학대사는 크게 한숨을 쉬면서 ‘이제 중들은 선비 책보따리나 짊어지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하고 길을 떠나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이재곤, 『서울의 민간신앙』, 백산출판사, 1996, 206쪽).
선바위 앞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선바위는 부인들이 이 바위에서 아이 갖기를 기원하는 일이 많아 ‘기자암’(祈子岩)이라고도 한다. 그 모습이 마치 스님이 장삼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여 참선한다는 ‘선’(禪)자를 따서 선바위라고 불렀다. 선바위는 조선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상(像)이라는 전설과 태조 이성계 부부의 상이라는 전설이 있다.
일제(日帝)가 남산에 있던 국사당을 선바위 곁으로 옮기게 한 뒤로 선바위에 대한 신앙은 무속신앙과 더욱 밀접해 졌다. 국사당은 무신(巫神)을 모시는 제당으로 굿을 행하는 곳이나 국사당 뒤에 있는 선바위와 연계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옛 문헌에는 조선 태조 때의 한양 천도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일화를 전하고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한양 도성을 쌓을 때 선바위를 무학대사는 도성 안에 포함시키고자 하고 정도전은 성밖에 두고자 하였다. 이때 정도전이 말하길 선바위를 도성 안에 들이면 불교가 성하고 밖에 두면 유교가 흥할 것이라 하니 태조가 정도전의 의견을 따르도록 하였다. 이에 무학이 탄식하며 이제부터 승도(僧徒)들은 유사(儒士)들의 책 보따리나 지고 따라 다닐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조선 초기부터 인왕산의 특징적인 암벽으로 이 선바위가 주목을 끌었던 것을 말해주고 있다.
▶ 산신각
선바위를 지나 30여 미터 올라가면 우측에 기와지붕으로 된 산신각이 있다. 산신각에는 칠성님, 독성님, 산신님의 화상(畵像)이 모셔져 있으며 산신각 옆에 방이 한 칸 있는데 국사당 밑에 있는 ‘대웅전’이라는 절의 신도인 박씨 할머니가 현재 이곳에 거주하며 산신각을 관리하고 있다. 이 산신각은 대웅전에 소속된 산신각이다. 인왕산을 찾는 불자들이나 기자들이 산을 오가는 길에 이곳을 많이 찾는다.
▶ 천존전과 장군당
산신각 위에도 바위 곳곳에 기도터가 있으나 대표적인 곳은 천존전과 장군당이다. 천존전은 인왕산 정상에 있는 좌측 봉우리를 말하며, 장군당은 우측 봉우리를 말한다. 천존전을 ‘칠성전’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는 ‘칠성기도’가 잘 받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천존전 밑에는 작은 우물(용궁)과 돌탑(서낭)이 있다. 이곳은 인왕산을 찾는 무속인들에게 칠성과 서낭이 잘 받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천존전 기도터에서 오른쪽 산모퉁이를 50여 미터 돌아가면 ‘장군당’이라고 불리어지는 제법 넓은 터에 제단이 만들어져 있는 곳이 나온다. 이곳은 장군기도가 잘 받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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