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일기

[스크랩] 왕희지(王羲之) 난정집서(蘭亭集序) / 조정육 미술사가

餘香堂 2015. 4. 15. 14:15

.

 

 

그림, 詩에 빠지다

스타 따라잡기 조선에도 있었네

 

왕희지 난정집서

 

난정집 서문(蘭亭集序)
왕희지(王羲之)

 

영화 9년 계축 3월 초 (永和九年,歲在癸丑,暮春之初)
회계군 산음현의 난정에 모여 수계를 열었다(會于會稽山陰之蘭亭,修稧事也)
많은 선비와 늙은이 젊은이가 모두 모였다(群賢畢至,少長咸集)

이곳은 높은 산과 험한 고개와 무성한 숲과 곧은 대나무가 있고(此地有崇山峻嶺,茂林修竹)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이 좌우로 띠를 이루었다(又有淸流激湍,映帶左右)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차례대로 자리에 앉으니(引以爲流觴曲水,列坐其次)
비록 사죽의 관현악 같은 성대함은 없으나(雖無絲竹管絃之盛)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 그윽한 정을 펴기에는 충분하다(一觴一詠,亦足以暢敘幽情)

 

 

▲ 유숙 ‘수계도권’ 1853년, 종이에 연한 색, 30×800㎝, 개인 소장

 

 

왕희지의 이 글은 시(詩)가 아니라 시를 엮은 ‘난정집(蘭亭集)’의 서문 일부다. ‘난정집’은 중국 동진(東晋·265~316)의 서예가 왕희지(王羲之·307~365)가 353년 3월 3일 난정에 문인 42명을 초대하여 수계(修稧)를 열면서 지은 시를 엮은 문집이다. ‘수계’는 음력 삼월 삼짇날에 맑은 계곡물에서 몸을 씻어냄으로써 겨우내 쌓인 묵은 때와 부정한 기운을 떨쳐버리는 세시풍속이다.

왕희지는 이런 의미 있는 날에 풍광이 빼어난 멋진 장소에서 시회(詩會)를 열어 후대의 많은 문인들이 그리워할 역사를 만들었다. 최초의 문인 시회였다. ‘난정집’에는 수계에 참석한 문인 21명이 쓴 37편의 시가 담겨 있는데, 본문에 있는 시보다 서성(書聖)으로 일컬어지는 왕희지의 서문이 더 인기가 많아 후대 사람들은 이 사건을 화제(畵題)로 삼아 ‘난정수계도(蘭亭修稧圖)’를 그려 그날을 기념하였다.

 

42명의 선비가 난정에 모인 뜻은

 

왕희지의 글은 계속된다. 그의 글 속에는 자연 속에서 인생을 관조하며 영원한 것을 그리워하는 고아(高雅)한 문사(文士)의 간절함이 담겨 있다. 길지만 워낙 문장이 유명하니 나머지 글도 살펴보기로 하자.

 

“이날 하늘은 깨끗하고 공기는 맑으며, 봄바람은 더없이 따스하고 부드럽다. 머리를 들어 우주의 넓음을 우러르고 고개를 숙여 만물의 흥성함을 보며, 경치를 둘러보며 마음 가는 대로 생각하니, 보고 듣는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기에 충분하여 참으로 기쁘기 한이 없다. 무릇 사람이 서로 어울려서 한평생을 살아가되, 어떤 이는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벗과 마주 앉아 이야기하고, 어떤 이는 자신에게 맡겨진 바를 대자연에 맡기어 노닐기도 한다. 비록 나아감과 물러남이 서로 다르고, 고요함과 시끄러움도 같지 않으나, 자신의 처지를 만족하며 잠시나마 득의(得意)하면 기쁘고 흡족하여 장차 늙음이 다가오고 있는 것도 모르는 법이다.

 

급기야 그 즐거움도 권태롭고, 감정이란 일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감회란 단지 그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예전의 기쁨도 짧은 순간에 시들해지니 더더욱 감회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하물며 사람의 수명이 짧든 길든 자연의 조화에 따라 결국에는 죽음에 이름에서야!

옛사람이 이르기를 ‘죽고 사는 것은 중대한 일이로다’라고 했으니 어찌 비통하지 않으랴? 옛사람이 감흥을 일으켰던 이유를 살펴보면 마치 부절을 하나로 맞춘 듯 일치하여, 옛 문장을 보면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마음을 달랠 수 없도다. 죽고 사는 것이 같다는 말이 참으로 허황되고, 장수와 요절이 같다는 말도 망령된 것이라 하겠다. 후세 사람들이 지금 우리를 보는 것도 지금 우리가 옛사람을 보는 것과 같으리니, 슬프다!

그래서 여기 사람들을 순서대로 열거하여 그들이 지은 바를 적는다. 비록 세상이 달라지고 세태가 변해도 정회가 일어나는 까닭은 하나이니, 후인들이 이 글을 보면 또한 감회가 있으리라.”

 

왕희지, 조선에 오다

 

중국 난정에서 수계가 있은 지 1500년이 지났다. 그 시간 동안 문인들의 뇌리에는, 구불구불하게 굽이치는 물길 위로 연잎에 술잔을 얹어 띄우는 ‘유상곡수(流觴曲水)’와 물길을 따라 사람들이 주욱 앉아 있는 ‘열좌(列坐)’의 장면이 생생하게 각인되었다. 후인들은 왕희지가 기획하고 진행한 품격 높은 난정에서의 이벤트에 열광했다. 흠모의 시가 줄을 이었고, 풍류가 넘치는 아회(雅會)를 기념하는 그림이 수북이 쌓였다. ‘왕희지를 사모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왕사모’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결성되었다.

 

왕희지에 대한 열광은 단지 그를 추억하고 기념하는 선에서 끝나지 않았다. 급기야는 ‘왕희지 따라잡기’로 발전했다. 조선시대의 화가 혜산(蕙山) 유숙(劉淑·1827~1873)이 그린 ‘수계도권’은 30명의 중인(中人)들이 1853년 3월 3일 서울 남산 기슭에서 ‘왕희지가 놀았던 놀이를 좇아서’ 계를 닦고 시 한 수씩을 지은 장면을 증명한 인증샷이다. 장소와 등장 인물은 다르지만 모임의 취지와 뜻을 고스란히 계승한 난정수계의 조선 버전이다. 그 버전은 형식만 빌려온 것이 아니라 주인공과 장소가 조선이라는 실정에 맞게 갓 쓰고 한복 입은 조선 사람으로 완벽하게 거듭났다. 왕희지가 중국 산음의 난정에서 출발하여 1500년의 시간 동안 걷고 걸어 조선의 남산에 도착해보니 소당(小棠) 김석준(金奭準·1831~1915)이 자신의 역할을 맡아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참석자의 연령층도 다양했다. 모임을 주도한 김석준은 23세였고 그림을 그린 유숙은 27세였다. 최연소자인 안재흥(安在興)은 20세였고 최고령자인 변종운(卞鍾運)은 63세였다. 마치 우리 시대의 동호회 모임 같다.

 

그림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시회 장소로 들어가는 사람과, 중앙 탁자를 중심으로 앉아 있는 사람, 그리고 왼쪽 끝에서 곡수(曲水)를 바라보며 시상(詩想)에 잠긴 사람이다. 특히 중앙에는 총 참석자 30명 중 22명의 인물을 배치하여 시선을 집중시켰다.

 

유숙은 초상화를 잘 그린 화가답게 세밀한 관찰을 바탕으로 각 인물의 특징이 최대한 잘 드러날 수 있게 정교하게 그렸다. 담청(淡靑)과 담홍(淡紅)이 두드러지는 그림 속 인물들은 담박하고 아취 있는 문인의 모습을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신분상으로는 사대부가 아닌 중인이지만 그들이 누리는 문화만큼은 사대부에 뒤지고 싶지 않은 여항(閭巷) 문사들의 지향성이 녹아 있는 작품이다.

 

길이가 8m에 이르는 ‘수계도권’은 이미 끝나버린 과거의 사건을 관념적으로 구성하여 그린 데서 벗어나 화가가 직접 참여한 실제 장면을 그렸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사대부라는 특권층의 전유물로 여기던 시회를 중인 계층이 적극 즐기고 향유할 만큼 위상이 높아졌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자신의 삶의 모델을 부러워하는 차원을 넘어 직접 현실 속에서 실현시키고자 했던 사람들의 모임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조정육 미술사가

 

 

...

 

 

 

永和九年, 歲在癸丑, 暮春之初, 會於會稽山陰之蘭亭, 修禊事也.

群賢畢至, 少長咸集. 此地有崇山俊嶺, 茂林修竹; 又有淸流激湍, 映帶左右.

引以爲流觴曲水, 列坐其次; 雖無絲竹管弦之盛, 一觴一詠, 亦足以暢敍幽情.

 

 

是日也, 天朗氣淸, 惠風和暢;

仰觀宇宙之大, 俯察品類之盛;

所以游目騁懷, 足以極視之娛, 信可樂也.

“이날 하늘은 깨끗하고 공기는 맑으며, 봄바람은 더없이 따스하고 부드럽다.

머리를 들어 우주의 넓음을 우러르고 고개를 숙여 만물의 흥성함을 보며,

경치를 둘러보며 마음 가는 대로 생각하니, 보고 듣는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기에 충분하여 참으로 기쁘기 한이 없다.

 

夫人之相與, 俯仰一世,

或取諸懷抱, 悟言一室之內;

或因寄所託, 放浪形骸之外.

雖趣萬殊, 靜躁不同;

當其欣於所遇, 暫得於己,

快然自足, 不知老之將至.

무릇 사람이 서로 어울려서 한평생을 살아가되,

어떤 이는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벗과 마주 앉아 이야기하고,

어떤 이는 자신에게 맡겨진 바를 대자연에 맡기어 노닐기도 한다.

비록 나아감과 물러남이 서로 다르고, 고요함과 시끄러움도 같지 않으나,

자신의 처지를 만족하며 잠시나마 득의(得意)하면

기쁘고 흡족하여 장차 늙음이 다가오고 있는 것도 모르는 법이다.

 

及其所之旣倦, 情隨事遷, 感慨係之矣.

向之所欣, 俯仰之間,

以爲陳迹, 猶不能不以之興懷;

況修短隨化, 終期於盡.

급기야 그 즐거움도 권태롭고, 감정이란 일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감회란 단지 그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예전의 기쁨도 짧은 순간에 시들해지니 더더욱 감회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하물며 사람의 수명이 짧든 길든 자연의 조화에 따라 결국에는 죽음에 이름에서야!

 

古人云: "死生亦大矣." 豈不痛哉!

每覽昔人興感之由, 若合一契; 未嘗不臨文嗟悼, 不能諭之於懷

固知一死生爲虛誕, 齊彭殤爲妄作. 後之視今, 亦由今之視昔, 悲夫!

옛사람이 이르기를 ‘죽고 사는 것은 중대한 일이로다’라고 했으니 어찌 비통하지 않으랴?

옛사람이 감흥을 일으켰던 이유를 살펴보면 마치 부절을 하나로 맞춘 듯 일치하여, 옛 문장을 보면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마음을 달랠 수 없도다.

죽고 사는 것이 같다는 말이 참으로 허황되고, 장수와 요절이 같다는 말도 망령된 것이라 하겠다. 후세 사람들이 지금 우리를 보는 것도 지금 우리가 옛사람을 보는 것과 같으리니, 슬프다!

 

故列敍時人, 錄其所述,

雖世殊事異, 所以興懷, 其致一也.

後之覽者, 亦將有感於斯文.

그래서 여기 사람들을 순서대로 열거하여 그들이 지은 바를 적는다.

비록 세상이 달라지고 세태가 변해도 정회가 일어나는 까닭은 하나이니,

후인들이 이 글을 보면 또한 감회가 있으리라.”

 

殤 일찍 죽을 상.1. 일찍 죽다 2. 어려서 죽다

彭殤 팽상. 오래 사는 일과 일찍 죽는 일. 彭傷/彭殤

 

 

 

열자(列子)(81) <제6편 力命篇(역명편)(1)>

030.

팽조(彭祖) 역사 이전 시대 전설 속의 인물로 성은 전(錢), 이름은 갱(鏗)이다. 전욱의 현손이라고도 한다. 전설에는 하나라 때 태어나 은나라 때 나이가 이미 767세나 되었다고 하며, 또 800살이었다고도 한다. 이 때문에 팽조는 장수의 상징이 되었다. 鏗 금옥소리 갱

 

 

列仙小傳 11 팽조(彭祖)

 

800세 장수

팽조(彭祖)는 성이 전(錢)씨이고 이름이 갱(?)이다. 전설상의 제왕인 오제 가운데 전욱 고양씨(高陽氏)의 현손(玄孫)이며 육종(陸終)의 세 번째 아들이었다. 일찍이 요임금, 순임금과 하(夏)나라, 상(商)나라를 거쳐 은(殷)나라 말기 주왕(紂王)때 이미 767세였다. 전설에 따르면 팽조는 800여 세를 살았으므로 신선이면서 중국 고대 장수(長壽)의 대명사로 알려진 특색 있는 인물이다.

 

팽조는 유복자로 태어났으며 3살 때 어머니마저 죽어서 고아가 되었다. 홀로 어려서부터 고생을 하면서 살았는데 어느 때인가 오랑캐 견융(犬戎)이 중원을 침범하여 소란해지자 난리를 피하기 위해 서역으로 건너가 일백여 년을 보낸 적도 있다.

 

장수비결은

팽조는 평생을 살면서 49차례나 상처(喪妻)하였고, 54명의 자식들이 먼저 죽었다고 한다. 팔백여 세, 기나긴 삶의 세월에서 불행도 많았다고나 할까? 그러면 팽조는 어떻게 팔백여 세나 살 수 있었을까? 원래 팽조는 양생의 도리(養生之道)를 매우 중요시 여겼으며, 여러 방면의 장수비결을 총괄하여 정리하였다. 그들 저작내용 중에는 현묘한 점이 있는가 하면 상당한 이치도 포함하고 있었다. 팽조는 타고난 성품이 평온하고 조용(恬靜)함을 좋아하였고 어지러운 세상의 잡다한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헛된 명예나 재물을 추구하지 않았다.

 

화려한 의복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며 마음을 맑게 비워두고 무위를 즐겼고, 오직 심혈을 기울여 삶을 잘 길러 오래 사는 법(養生長壽之道)을 추구하였다. 팽조의 스승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의 스승이 남긴 “구도(九都), 절해(節解), 지교(指敎), 은수(隱修), 사극(四極), 구령(九靈)” 등 여러 경서를 소지하고 오로지 마음을 다 기울여 읽고 연구하여 여러 가지 양생과 장수의 도리와 이치에 정통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늘 수정과 운모가루, 사슴뿔(녹용)을 상복하였다고 하며 얼굴은 청춘을 유지하였다고 한다.

 

걸어 다니며 유람

혼자 외출하여 멀리 유람할 일이 있을 때 수레나 말이 있어도 이를 타지 않았으며 수중에는 돈이나 식량 등 어떠한 것도 휴대하지 않았다 한다. 한번 외출하면 수십일 심지어는 수백일 씩 여행하였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은 팽조가 어디를 갔다 오는지 종적조차 몰랐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도 의식주(衣食住)와 행동이 보통사람과 똑같아 여행 후의 피곤함이라든지 어떤 변화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팽조는 일상생활 중에 침묵을 지키고 말수가 적었으며 단 한번도 자신이 도술(道術)을 소지하고 있다고 자랑한 적이 없었고 어떠한 신기(神奇)하고 괴이(怪異)한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팽조는 늘 가부좌하고 단정히 앉아 정신을 통일하여 숨을 가늘게 하며 기공을 연마하였다고 한다. 이른 아침부터 해가 중천에 이를 때까지 앉아서 숨쉬기를 하였으며 그리고 두 눈을 잘 문지르고, 신체 여러 부위를 골고루 안마하였으며, 혀로 입술을 핥고, 입안에 가득 고인 침(玉津)을 삼켰다. 두루 몸을 크게 한 번 쭉 편 후 일어나 움직였으며, 얼굴에는 노여움이 없었고 항상 빙그레 웃는 모습이었다 한다.

 

기(氣)를 자유자재로

팽조는 때때로 신체가 불편하거나 피로하다고 느끼면 곧 기공(氣功)을 이용하여 그 좋지 않은 부분을 소통시켰다. 그리고 내기(內氣)를 조용히 돌려 신체 밖으로 드러난 눈, 코, 입 등 아홉 구멍에서부터 오장육부까지 이르게 하였으며 최후에는 팔, 다리, 등, 사지와 모발까지 통하게 했다. 몸속을 흐르는 기운은 마치 가벼운 구름처럼 신체 안을 두루 돌았다. 그렇게 해서 피로를 몰아냈을 뿐만 아니라 능히 질병을 치료할 수 있었다.

 

상(商)나라 주왕(紂王)이 찾아와

상(商)나라 주왕(紂王)은 팽조가 이인(異人)이라는 소리를 듣고 이를 중시하여 대부(大夫)벼슬을 내렸으나 정사에는 관심이 없었다. 주왕은 장수비결을 얻고 싶어서 여러 차례 몸소 팽조를 찾아와 물었다. 그는 얼버무리면서 요점을 피한 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주왕은 이러한 팽조를 나무라기는커녕 도리어 많은 금은보화를 상으로 내렸다. 수차례에 걸쳐 내린 상금이 은자 수만 냥이 되었다. 팽조는 이를 모두 받아서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데 사용하였을 뿐 스스로를 위해서 한 푼도 남겨놓지 않았다.

 

채녀(采女)를 대신 보내

주왕(紂王)은 팽조의 장수비결을 알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여자 도사인 채녀(采女)를 궁궐로 초빙하였다. 그녀를 팽조에게 보내어 그 장수비결을 전수받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 여도사 채녀는 수신양성(修身養性, 몸을 수련하고 성품을 잘 닦는 것)에 정통하여 270세나 되었으나 명공(命功, 신체수련을 통해 수명을 연장)을 잘 닦은 덕분인지 50~60세 정도로 젊어 보였다.

주왕은 이 여도사를 위해 궁전 안에 화려한 건물을 지어주었다. 이 건물에는 정성을 다하여 정교하게 조각한 자주색 누각도 있고 어떤 건물은 금, 은, 구슬 등으로 값비싸게 장식한 것도 있었다. 채녀는 주왕의 부탁을 받고 덮개가 있는 화려한 마차를 타고 팽조가 거처하는 곳으로 갔다. 팽조를 만나자 두 번 공손히 절하였다.

 

팽조의 장수비결은?

팽조는 채녀를 처음 만나는 순간 근기가 좋음을 간파하고 대답하였다.

 

“몸을 가볍게 하여 하늘에 오르고자하면, 이름이 선계(仙界)에 있어야 한다. 귀신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고, 하늘 높이 마음대로 비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자면 금단(金丹)을 복용해야만 도가의 태일원군(太一元君)처럼 백일승천(白日昇天)할 수 있다. 나는 보고 들은 것이 천박하여 당신 채녀를 가르치기에 부족하다. 대완산(大宛山)에 가면 청정(靑精)선생이라는 분이 계시는데 듣건대 이미 천 여세라 한다. 그러나 얼굴은 어린아이와 같고, 매일 오백리 이상을 걷는다고 한다. 일년 내내 아무것도 먹지 않을 때도 있고 어떤 때는 하루에도 아홉 끼니를 먹을 수 있다. 청정선생은 양생법(養生之道)에 정통해 있으므로 지금 바로 가서 물어 보거라.”

이 말을 듣고 채녀가 물었다. "청정선생은 어떠한 선인(仙人)입니까?". 팽조 대답하기를 "신선(仙人)이 아니다. 청정선생은 도를 얻은 사람(得道者)이지, 결코 선인이 아니다".

 

나는 선인(仙人)이 싫다

팽조는 채녀에게 선인(仙人)에 대해서 한바탕 설명했다.
“소위 선인이란 몸을 우뚝 솟구쳐 구름 속에 들어갈 수 있고, 날개가 없으나 날 수 있다. 때로는 용을 타고 구름을 탈 수 있으며, 곧바로 하늘(天宮)에 오를 수 있다. 혹은 새나 짐승으로 변해서 푸른 구름 사이에서 노닐 수도 있으며, 강이나 바다 깊이 잠수하여 놀기도 하고 비상하여 명산에 유람하기도 한다. 자연의 원기(元氣)를 먹고  약간의 지초(芝草)를 먹을 뿐이다. 혹 인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더라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으며, 스스로 몸을 은신하므로 사람들이 보아내지 못한다. 얼굴에는 기이한 골상(奇異骨相)이 드러나 있으며, 온몸에는 희한한 털이 자라고 있다. 그들 선인들은 사람이 없는 황량한 벽지에 깊이 숨어 있는 것을 좋아하고, 세속의 물결에 휩싸이는 것을 원치 않으며, 인정을 버리고 세상의 명예를 경멸한다. 선인들은 비록 장생불사할 수 있으나 사람으로서 천성은 완전히 잃어버린다. 그래서 나는 선인이 되기를 원치 않을 뿐이다.”

 

득도자(得道者)는 귀하다

이어서 팽조는 채녀에게 득도자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도를 얻은 득도자(得道者)는 신선과는 다르다. 득도자는 여전히 달고 아름다운 음식을 먹으며, 가볍고 화려한 의복을 입는다. 남녀지간의 즐거움을 향유하고 벼슬의 영예를 즐긴다. 신체와 영혼이 강건하면서 용모가 윤택하고 늙어도 쇠로하지 않으며 오래도록 인간 세상에 살고 있을 뿐이다. 추위 더위 바람 습기(寒暑風濕)가 능히 몸을 상할 수 없고, 귀신과 요괴가 감히 침범하지 못하며, 질병이나 재해가 몸에 가까이 올 수 없다. 성냄과 기쁨, 비방과 칭찬(嗔喜毁譽)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귀한 것이 아닌가?

 

도(道)를 알면 수명은 길어져

팽조는 채녀에게 득도자를 이야기하면서 인간의 수명에 대해 한바탕 설법을 이어갔다. 인간의 생명은 잘 보양하기만 한다면 120세까지는 살 수 있다. 120세까지 살지 못하는 것은 모두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상해(傷害)를 받기 때문이다. 만약 자연의 도(自然之道)를 조금 알면 능히 240세까지 살 수 있다. 도를 다소 많이 알면 능히 480세까지 살 수 있다. 만약 도(道)에 정통하다면 능히 죽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신선이 될 수 없을 뿐이다.
수명을 잘 보양하는 법을 한마디로 개괄한다면 곧 성명(性命: 타고난 천성과 수명)을 상하게 하지 않아야 한다. 팽조는 여기까지 말한 후 잠시 쉬었다가 계속 말을 이었다.

 

“겨울철에는 따뜻하게 보호하고, 여름에는 더위를 피해야 한다. 일년 사계절에 맞추어 조절하면 곧 신체를 편안히 할 수 있다. 아름다운 미녀를 접해도 담담히 즐거움을 맛볼 뿐, 욕심에 따라 도를 넘치지 말아야 곧 정신이 원활할 수 있다. 수레와 복장도 능히 존엄을 지켜야 한다. 응당 만족할 줄 알아야 하며 끝없이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뜻을 전일(專一)하게 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일에 한도를 초과하면 비단 삶을 잘 영유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반대로 재난을 만나게 된다. 이것을 늘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야기를 듣던 채녀가 맞는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팽조가 다시 말을 이었다.

“몸을 상하고 성품을 해치는 일이 너무나 많다. 머리를 과도하게 써도, 근심과 슬픔을 지나치게 해도, 너무 즐거워해도, 분노를 쌓아 놓아도, 무엇을 얻기 위해 조급해 해도, 음양의 균형을 잃어도 모두 사람을 해친다.”

 

달기의 유혹에 빠진 주왕

채녀는 궁궐로 돌아와 팽조에게 배운 양생법을 주왕(紂王)에게 전수해 주었다고 한다. 주왕도 팽조의 양생법을 실천하여 100여세 이상 오랜 수명을 누렸으나 나중에 미모의 음탕한 여인, 달기에 빠져 절제를 잃었다. 몸을 망치고 나라도 잃었다. 주왕은 팽조의 양생법이 효과가 있자 팽조의 술법이 세간에 전해지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팽조를 몰래 죽이려고 하였다. 이 사실을 미리 짐작하고 있던 팽조는 수도를 떠나 어디론지 표연히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