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家

[스크랩] 연주현씨 시조에 대한 글

餘香堂 2015. 5. 23. 02:11
 
연주현씨족보문헌국역본 역자 나주 정재진
 
연주 현씨 족보서문(국역문)
 
나라가 있으면 역사가 있고 집이 있으면 족보가 있으니, 족보는 집의 역사이다.
나라의 역사가 없으면 임금의 도(道)가 높여지지 않고 집안에 족보가 없다면 백성들의 풍속이 두터워지지 않는다.
조상을 높이고 일족을 공경함은 임금의 도를 높이는 까닭이요, 일족을 거둠은 그 근본을 무겁게 하는 까닭이다.

 주역에서 말하는 ‘군자는 겨레(일족)를 나눔’다는 것과 주례(周禮)의 ‘소목(昭穆)을 구분’한다는 것은 모두 이것이라 하겠다.

연주의 현씨는 고려시대로부터 우리나라에 알려졌으니, 경헌공(景憲公:연주 현씨 시조인 휘 담윤의 시호)에게서 성을 얻어 나라에서 알려져 팔거 광성 회원공(이들은 시조 휘 담윤의 아들들의 봉군된 군호를 따서 각기 관향한 것임)의 황금 같은 형과 옥 같은 아우들이, 어떤 이는 나라의 어지러움을 토벌하여 평정하고, 어떤 이는 횡포하고 권세가 있는 사람을 피하였으니, 예를 들면 원수(元帥)의 내외가 절조를 세움과 희암공 관봉공 백암공 이암공의 어짊, 문걸공과 문검공 두 분의 효행이 있어, 이는 진실로 우리나라의 이름난 겨레라 하겠다.
나라에 있어서는 태상(太常: 해 달 별 교룡을 그린 천자의 기)에 드러나고 집안에 있어서는 족보에 빛나므로, 이는 마땅히 혼연히 하나의 족보에 같이하여 영원에 드리우게 된다.

 영조대왕의 정묘년(서기1747년)에 족보를 닦아, 같은 시조에 관향을 달리하는 것을 하나로 통일하였다.

기미보 갑진보 신축보의 세 족보에는 홀로 하양의 현씨가 누락되었으니, 이는 도성(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영락(零落)하여 소리 소문이 서로 미치지 않아 능히 자료와 수단(收單)을 널리 채집하지 못한 것이니, 이와 같이 누락자가 있음은 편집하는 사람들의 책임이라 하겠다.
비록 그렇다 해도 좌승선 휘 서룡의 뒤는 좌찬성 휘 금의 셋째아들이다.

 5대를 전하여 하양으로 들어와 초췌하기 그지없지만, 그러나 찬성공에 있어 비록 조서(祖庶:미상)가 된다 해도 승선공에 있어서는 5종(五宗)의 하나이다.

 
대저 5종이 일족(일가)을 공경함은 같을진대, 어찌 5종의 하나인 (하양의 일족들이) 대동보에서 누락 될 수 있단 말인가?

 그 후손들이 오래되면 될수록 징신(徵信:징험과 믿음)하지 못할까 두려워 장차 하량의 족보를 닦고자 기선군으로 하여금 나에게 서문을 묻는데(용청하기에), 아! 이는 참으로 끝내 사양할 수 가 없었다.

 
춘추시대에 노나라와 위나라는 각기 자기의 영토를 지키되 (서로를)해치지 않았음은 희씨(姬氏: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건국한 무왕은 성이 희씨이니, 주나라를 구성하는 12개의 제후국 중 같은 성인 나라가 노와 위나라 등 7개국이었음)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또한 물이 같은 근원에서 발원하여 수많은 강으로 흐르지만 끝내는 또한 하나로 귀결되는 것이니, 이제 자네들의 일(족보 만드는 일)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나뉘어서 파보(派譜: 각기 자신이 속한 파별로 족보를 만듦)를 하면서도 이름난 선조의 후손들을 해치지 않고 훗날 모든 일족들이 화목함을 닦는다면 어찌 하나의 족보를 만들 날이 없겠는가?

 
오직 각기 뜻과 행실에 힘써 멀리 선조들의 덕성의 아름다움과 중엽의 쇠퇴함을 생각하여, 수신하되 효도와 공손함과 충성스러움과 믿음으로 하여 부모님을 섬기고 형제에 우애하며, 일족에 있어서는 뻐꾸기(鳲鳩)의 어짊을 우러러 체득하여 두터우면서 두루 화목하다면, 하양 현씨의 부흥은 장차 이 파보 만듦이 시초가 되리니 아! 어이 힘쓰지 않겠는가?
 
이 일을 주간한 사람은 두욱 기철 억수이며, 옛 자료를 살펴 수단을 모아 편집하고 완성한 이는 기선이다. 숭정 후 다섯 번째 임술년(서기1982년) 매단절에 인동 장석영이 쓰다
 
범례 1. 우리 현씨의 족보는 정묘년에 처음 만들었는데, 기미 갑진 신축년의 세 족보에는 하양에 살고 있는 현씨가 누락되었기 때문에, 이제 파보를 만들며 족보의 규칙은 한결 같이 대동보의 예를 따른다.
 
1. 시조공의 사적과 관향 연혁은 책머리에 기록하여 사실을 알도록 한다.
1. 상서공 형제분의 사적은 일체 기록하여 그것으로 후세의 고증을 기다린다.
1. 세파분계도(世派分係圖:각파의 계통이 나뉘어진 그림) 근원을 찾는 중요한 법이기 때문에, 비록 직계조상이 아니더라도 같이 기록하며, 우리 파는 그림 상에 누락되었기에 채집하고 편집하여 그것으로 빠지고 간략한 부분을 메운다.
 
행적(行蹟)은 반드시 역사적인 기록과 묘비와 지석과 행장 및 유명한 사람들의 기록한 바의 문자를 기준하며, 혹여 숨겨져 드러나지 않은 것이 있으면 각 전해지는 바의 기록으로 후대에 전하는 자료로 삼는다.
1. 책자는 횡으로 여섯 칸으로 하고 각 칸을 1대로 하여 휘(諱:죽은 이의 이름) 곁에 주석을 달며, 맨 끝 칸은 단지 휘(諱)자만 쓰되 다시 다음 장 맨 위 칸에서 곁에 주석을 단다.
1. 각파의 첫머리에는 먼저 어느 벼슬은 어느 분의 몇 세손이며, 어느 벼슬은 어느 분의 몇 번째 아들의 파인지를 기록한다.
1. 시조공 이하 친형제분 외에는 5세(五世)에 그 파의 맨 위로 돌아가 상세하게 위 세대의 휘함(諱啣:이름과 직함)을 기록함으로써,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맨 위장을 보지 않더라도 먼저 그가 어디로부터 나온 바를 알 수 있게 한다.

 1. 곁에 다는 주석은 먼저 자(字:성인이 된 이후부터 이름)와 칭호를 쓰고, 인하여 태어난 해를 쓰되 만일 관작(官爵:벼슬과 직위 직급)이 있으면 자호(字號:자와 아호) 아래에 쓰며, 그 왼쪽에는 태어난 해와 죽은 해와 기일과 묘지를 쓰며, 왼쪽 위에 배위(配位)의 태어난 해와 죽은 해와 기일과 묘지를 쓰고, 만일 무덤을 같이 하거나 나란히 하였으면 배위 아래에 나란히 기록한다.

1. 단지 태어난 해만 적지 달과 날은 기록하지 않으며, 죽은 해는 상세하게 달과 날을 기록함으로써 그 자손 되는 사람들의 조상을 추모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다하게 한다.

1. 태어나고 죽은 해를 기록한 왼편에 묘지가 소재한 고을과 동네이름과 좌향(坐向)을 적음으로써 묘소를 잃어버리지 않게 한다.

1. 관작(官爵)은 반드시 계급과 직책을 구비함은 후세에 상세함을 보이고자 함이다.

1. 모든 일가들이 각지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은 그 장의 머리에다 기록함으로써 거주하는 곳을 알게 한다.

1. 배위는 죽으면 배(配)라 칭하고 살았을 때는 실(室)이라 칭하여 그것으로 삶과 죽음을 구분한다. 1. 배위가 봉호(封號:내명부의 품계를 가짐)가 있으면 기록하고, 없으면 다만 어느 고을 어느 성(본관성씨)만 쓰고, 연이어서 아버지의 이름과 외조부를 적으며, 그 사이에 상세함과 간략함의 같고 다름은 각기 수단하는 곳이 멀어 캐물을 수가 없거나 혹은 세대가 멀어 능히 고람하거나 징험치 못한 소치이지, 그 사이가 엷고 두터움에 있음이 아니니 보는 사람들은 용서하기 바란다.

1. 전 후실(前後室:전처와 후처)이 있으면 모씨는 몇 남여(아들 딸)를 두었는지 반드시 기록함으로써, 그것으로 그가 나온 바를 밝힌다.

1. 자녀들의 항렬은 반드시 아들을 먼저하고 딸은 뒤에 적는다.

1. 출계(出系:양자나감)한 사람은 대동보의 예에 의거하여 ‘계(系)’자를 쓰지 않고 바로 자(子)자를 쓰며, 생부와 양부의 이름을 왼편에 기록함으로써 누구의 뒤로 나갔는지를 밝힌다.

1. 성씨를 본종(本宗)에 더하지 않음은 다른 성씨와 구분함이다. 1. 여자가 혼인하면 반드시 성씨와 관향을 쓰고, 만일 관작(官爵)과 덕행(德行)이 있으면 곁의 주석에다 한결같이 본종(本宗)과 같이 상세하게 기록하여 후손들에 보여준다.

1. 외손의 성씨를 적는 것은 내외의 나뉨을 밝히는 까닭이라 단지 한대(1대)만 기록하고, 외 외손을 기록치 않음은 간략(簡略)을 좆아 힘씀이다.

1. 삶과 죽음의 구분하여 가림(선택)은 이미 대동보의 범례에 다 있으며, 오래살고 일찍 죽음의 분별은 가히 없을 수가 없기 때문에 60세 이상은 종(終)이라 쓰고 30세 이상은 졸(卒)이라 쓰며 그 이하는 요(夭)라 한다.

1. 매 장의 머리에 천자문으로 아래위로 서로 비춤으로써, 고람(考覽)에 편리하게 하였다.

1. 무릇 이 기재하는 규칙이 애초부터 가깝고 성김(親疎)의 구별이 없음은 극히 정밀하여 내용이 실하면서 또한 자세하기를 원하였기 때문이지만, 그러나 본손의 단자(單字)가 상세함과 간략함이 같지 않으며 잘못된 부분 또한 많은 즉, 스스로 상세함과 간략하고 잘못 된 단서가 없지는 않아도 보는 사람들이 용서해 주기 바란다.

 
보청직원록(족보에 관여한 인물의 기록) 좌승선공 후손 도유사 전 위원 기선 영일 교정 간사 두욱 하양 명섭 참봉 문섭 장재 기철 억수 서사 봉운 수단 기림 기모 기상 상조 청도 상구 금산 송나라 대장군 고려 문하시랑평장사 연산군 시호 경헌 현공의 신도비문
 
 
고려 대장군 현공 휘 담윤은 연주현씨의 시조이시다.
 
어려서 총명하고 영리하고 지혜로웠으며, 몸집이 크고 지혜와 용맹스러움은 그 같은 또래에서 견줄 데가 없었다. 급기야 성장하여 두루 경전과 사서(經史)를 섭렵하였으며, 특히 좌씨전(춘추좌전)과 손자 오자의 책들을 즐겨 보다가 한숨을 쉬며 말하기를 “국가에 일이 많고 변방에는 나쁜 조짐이 보이는데 이 어찌 사내가 책을 읽을 때이겠는가?”하고서 소매를 떨쳐 일어나 활쏘기와 마술을 익히면서 묘년(妙年)에 이르렀다.
 
약관(弱冠)이 되지 않아 흉노족들이 국경을 침범하자 의병을 맨 먼저 이끌고 큰 공로를 세우니 의종이 특별히 포상과 칙령을 내리시고 인하여 연산부사를 제수하셨다. 이름난 벼슬아치의 집안을 골라 장가드시게 하였음은 당시 공은 아직 미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로부터 명성이 더욱 많이 나서 이웃나라에서도 두려워 복종하였다.
 
송나라에서 여진족의 난리로 인해 우리나라에 병력을 요청하자 공께서는 원병의 대장으로 가서 구해 줌으로써 승전을 아뢰자 (송의)천자께서 총애하고 (상품을)하사하시고 크게 쓰고자하는 뜻의 유시(임금의 뜻)를 백성들에게 포고하였으며, 여러 차례 벼슬의 품계를 높였다.
 
공께서는 당시 정치의 혼란함을 보시고 일을 사양하고 고향 집으로 돌아가 (연주)고을의 옥녀봉 아래에다 별장을 짓고 날마다 경서와 서책(書冊)으로 스스로 즐기면서 담담함이 마치 진취(進就:벼슬길로 나아감)에 뜻이 없이 장차 그대로 늙을 것 같더니, 명종 4년(1174년)에 이르러 서경(평양)유수 조위총이 서경의 병사들을 도농(盜弄)하여 절령(현 자비령: 황해도 황주 봉산군과 서흥면 경계에 있음. 개성~평양간의 정치적 요충지)이북 40여 성들이 임금을 버리고 적(조위총)을 맞이하여 윤리와 강상이 없어졌다.
 
공께서는 변란의 소식을 듣고 두 아들을 거느리고 주장(主將)을 만나서 말씀하기를 “간악한 신하가 기회를 타고 노략질을 하자 여러 고을들이 바람에 쓰러지듯 모두가 좆음으로써 순역(順逆:순종과 반역)의 구분조차 되지 않고 한 지방이 향응(響應)하는데도 오히려 적개(敵愾)하는 군사가 없으니, 어찌 가히 좌시하고 토벌치 않는단 말이오?”라 하고서 인하여 장리(將吏)로 부서하여 대의(大義)로 창의하여 대궐을 향하여 예를 표한 뒤 적을 토벌하고자 죽음으로 맹서하니, (조)위총이 크게 두려워하여 여러 차례 첩자를 보내 화복(禍福:이해관계)으로 꾀었지만, 공은 더욱 충성스런 마음을 격려하며 선채로 첩자의 목을 베었다.
 
이때 안북도호부의 운주 낭장 30여 성이 모두 위총을 심복하였기에 글을 던져 공갈하여 공으로 하여금 귀순케 하였지만, 공은 비분강개로 항거하고 용력(勇力)을 분발하여 성을 에워싸고 굳건하게 지켰다. 두 아들로 하여금 여러 번 적병들의 진격을 좌절시켜 네 번 싸워 네 번 이김으로써 적의 흉악한 창칼을 모두 물리쳤다.
 
당시 금나라에서 장군을 보내와 군사를 거느리고 연주의 경계에 주둔하고 말하기를 “우리조정에서 듣자니 너희 나라의 여러 고을들이 모두 임금의 명에 항거하지만, 오직 너희들은 의로움을 지켜 굽히지 않아 적들의 핍박을 받는다고 하기에 나에 명하기를 가서 도와주라 하더라”라 하였다니, 대개 공의 곧은 충정과 빛나는 절조가 이웃나라에 까지 전파되었기에 군사를 보내 도와주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에 임금의 군사가 와서 아주 교활한 적들을 공격하여 섬멸하여 흉악한 우두머리를 소탕하여 위총은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공이 서문(西門)을 보장(保障:적의 침략을 막다)하여 기이한 계책을 내어 승리를 쟁취한 공로라 하겠다.
 
명종께서 가상하게 여겨 공의 훈공으로 대장군으로 책봉하시고, 두 아들은 모두 품계가 올랐다. 공은 원훈(元勳)으로 여러 번 옮겨 문하시랑 평장사에 이르러 연산군으로 봉해지고, 돌아가심에 이르러 경헌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셨다.
 
공은 연산 관동 임좌의 언덕에 장례하였다. 아! 공은 태어나면서 특이한 자질을 가져 기개는 빼어났다. 문장은 단아하였고 또한 말 타기와 활쏘기를 잘하고 지략이 남들보다 뛰어났으며 일의 성패를 헤아리기를 마치 불을 비춘 듯 헤아려 하나의 어긋남도 없었다.
 
넉넉한 공적과 위대한 열정 충성과 절조는 밝게 방책(方策)에 있어 사람들의 귀와 눈에 비춰진다. 강상(綱常:삼강과 오륜)을 떨어뜨리지 않고서 국토를 온전히 수호하였음, 가히 우리나라 불세출의 호걸스런 남자라 하겠다.
 
그 외의 선조의 계통과 벼슬과 업적 태어남과 돌아가심은 세대가 멀어 증명 할 길이 없지만, 고려사와 남긴 족보에서 전해짐이 단지 이와 같다.
 
세분의 아드님이 있으니 덕수는 공적으로 성산부원군으로 봉해졌고 벼슬은 병부상서이다. 이후는 공적으로 광성군으로 봉해졌고 벼슬은 안렴사이다.
 
덕유는 회원군으로 벼슬은 대사공이다. 후손들이 지금까지 20여세(世)가 되어 무릇 나라 안에서 현씨를 성으로 쓰는 사람들은 모두가 공에게서 발원하였으며, 400여년에 벼슬을 한 사람들이 서로 이어 그 사이에 높은 벼슬을 한 사람과 이름난 선비들 또한 많았으니, 아! 아름답도다. 가히 뿌리가 깊으니 가지가 무성하고 덕이 두터우니 영광이 흐름이 징험함 것 일 진저.
 
처음 공께서 아이 일 적에 밤에 고을의 검각산을 지나게 되었는데, 계곡이 깊고 나무는 우거져 사람들이 모두 이 길 가기를 꺼렸다. 때는 마침 어두운 저녁나절이라 오솔길을 구분치 못하는데, 갑자기 줄지은 횃불 수백이 앞을 인도하면서 말하기를 “현장군이 오신다”라 하였다니, 대개 공이 세상을 떨친 공을 세운 이름이 어린나이에 나타나 이러한 산 귀신의 호행(護行:길 감을 보호함)이 있었던 것이리라.
 
공을 장례함에 이르러서는 당시 상여가 오리정(五里亭)에 이르렀을 때 고을의 백성들이 다투어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제사를 마치고 장차 가려하자 상여가 움직이지 않아 드디어 그곳에다 무덤을 만드니, 고을의 산들이 빙 두르고 체세(體勢)가 단정하고도 엄격해 관서(關西)의 명당으로 최고라 불리웠다.
 
공은 돌아가신 가운데서도 신령스런 기적을 보여 좋은 땅을 점치신 것이었는데, 후에 여러 번 전쟁을 겪고 자손들이 각지로 흩어져 묘지를 만든 땅을 오랫동안 그 전함을 잃어버렸다가 지난 순조 조 경오년에 후손들이 비로소 묘소를 찾고자 징험을 찾던 저녁에 공이 또한 간사(幹事:일을 주간한 사람)의 꿈에 나타나 수 백 년 사라진 조짐을 다시 세상에 보여주고, 또한 양씨 성을 쓰는 사람이 공의 옛 별장 터에 집을 짓자 밤에 한분의 귀인이 의관을 갖추고 엄하고 위엄 있게 꾸짖자, 양씨는 두려워 그날로 바로 집을 뽑아 옮겼다는 말을 하는데, 공께서 돌아가신지 근 1000년에도 정령(精靈)이 없어지지 않고 여러 번 기이한 일을 나타내 보임은, 더욱 가히 빼어난 영혼의 특이함을 보여줌인가?
 
사람이면서 사람으로 하여금 백세(百世)의 뒤에 사모함을 생각게 하고 공경한 마음을 일으킨 것이리라. 공의 여러 후손들이 이제 장차 묘도에 비석을 세우고자 진분 영익 심 응수 상순 경하로 하여금 나에게 비명(碑銘:비석에 쓸 문장)을 청하는데, 나는 공에게는 외손(彌甥)이 되지만, 나이도 많고 붓도 무디어져 비록 공의 훈덕(勳德)의 만분의 일도 천양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정의로 보아 감히 사양하지 못하겠기에 드디어 유사(遺事)를 근거하여 서술하고 명문(銘文)으로 잇는데 새기노니 높은 산이 신령함 내렸으니 이는 우리의 공이시라 충성은 이웃나라를 감동시키고 이름은 중국에 이르렀네 말씀은 엄하고 의로움엔 밝았으니 밝기가 마치 해와 달과 같으며 공은 크고 덕은 두터워 은혜는 백성들에게 미쳤지요 평생의 뜻과 절개 충성과 용기는 모두가 드높았으니 수많은 후손들 보면 경사(慶事)의 흐름 다 함이 없습니다 연산의 언덕에 비석이 있어 이에 아름다우니 이미 진실로 편안하여 아! 공께서 묻히신 곳입니다 나의 새김글은 사사로움이 아니며 공은 영원히 돌아가심이 아니라 천추(千秋)에 기적을 내리시어 그 무덤을 표 합니다 외손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사 오위도총부총관 윤치겸이 삼가 짓고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 경연 의금부 춘추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신위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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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문하시랑 평장사 현공 묘표 관서(關西)는 예로부터 을지문덕 양문춘 등과 같은 이름난 장수들이 많다고 일컬어진다. 약한 나라의 외로운 군사로 수나라와 당나라의 백만의 군사들에 대항하여 나라의 위엄과 무력을 선양함으로써 중국을 족히 놀라게 하였으며, 고려조에 이르러서는 현담윤과 그 아들인 덕수가 있어 능히 적을 물리치고 외적을 방어하여 왕명으로 절조를 다하여 사직을 편안하게 하였으니, 이는 이른바 산서(山西)에서 나온 장수가 나라의 보배가 아니겠는가?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함을 품부 받아 겨우 어린나이에도 빼어남이 어른과도 같았다. 외롭고 가난하여 배움을 잃어 여러 아이들의 책 읽는 소리를 듣고 날마다 수백마디의 말을 외우자, 이웃 사람들이 그 재주를 기이하게 여겨 재물을 빌려주어 취학하게 하니, 좌씨전과 춘추 손자와 오자의 글을 즐겨보다가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사내아이가 변방에 태어나 어찌 구차하게 글 읽음을 일삼으랴”라 하고 활쏘기와 말 타기를 익혀 무예가 절륜(絶倫)하였다.
 
흉노족들이 국경을 침범함에 당하여 의병들을 맨 처음 거느리고 먼저 격렬하게 싸워 적들을 격파하자 의종께서 특별히 연산부사를 제수 하셨다. 이때 공의 나이가 19세였었는데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아 왕께서 이름난 가문에 장가들게 하였다. 이로부터 명성이 자심(滋甚)하여 아웃나라에서 두려워하였다.
 
여진족이 중국을 침범함에 이르러 송 왕조에서 우리나라에 병력을 요청하자 공이 대장(元戎)으로 원정하여 승전을 아뢰니, 송나라 황제가 두텁게 상주시고 포유(褒諭)로 호송하였으며, 본국으로 하여금 크게 쓰이도록 하게함으로써 여러 번 품계가 올랐다.
 
공은 당시의 정치가 어지러움을 보시고 옥녀봉 아래에 숨어살며 흡사 종신토록 그리 할 것 같더니, 급기야 적신(賊臣)인 조위총이 평양성을 점거하여 한 지방이 모두 반역을 좆자, 공은 덕수와 더불어 주장(主將)을 만나서 말씀하기를 “거란과의 전쟁에 여러 고을들이 바람에 쓰러지듯 귀순하고 복종하는데, 다만 우리들만이 성을 고수하여 적을 물리쳤거늘, 이제 위총이 감히 왕명에 항거함은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아니할 바이니, 충성스럽고 의로운 선비들은 모두 살지 않기로 맹세 합시다”하고 드디어 고을의 자제들을 거느리고 대궐을 향해 절을 하고서 같이 적을 토벌할 것을 맹서하였으며, 인하여 굳게 보루를 쌓고 경계를 엄중히 하였다.
 
위총이 재앙과 복(禍福 : 이해관계)으로 꾀기도 하고 위협하였지만 공은 선채로 첩자의 목을 벰으로써 군사들에게 경고하고, 몰래 성안에다 임금의 군사들이 서쪽을 정벌한다고 알려 그로써 어지러운 민심을 안심시켰다. 이때 모든 성의 장수들이 조위총의 글을 보내 협박하기를 투합하여 항복하기를 요구하자, 공은 문득 그 사자(심부름꾼)를 베어 성에다 매달아 굳게 항거하면서 두 아들로 하여금 여러 차례 적병을 물리치며 재물과 양식을 갖추고 다락과 방패를 수선케 하면서 뜻을 굳게 하여 공격과 방어를 한지 몇 년 동안 위총이 끝내 감히 굴복시키지 못함은, 모두 공의 부자 때문이었다.
 
바야흐로 보루를 마주하여 여진족의 장수 고라가 연주의 경계에 군사를 주둔하기에 공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고라가 말하기를 “너희 나라 여러 변방 고을들 모두가 임금의 명령에 항거하거늘 단지 너희 성만이 따르지 않아 적들에게 핍박을 받는다 들었기 때문에 와서 구원해 주려는 것이니 의심치 말라”고 하였다.
 
공은 즉시 여진족의 진채에 이르러 사실대로 말했더니 고라가 감격하여 울며 말하기를 “과연 들은 바가 사실이로다. 급함이 있거든 내 마땅히 힘을 줄 테니 그대는 더욱 충절에 힘써 임금의 일(王事)에 힘쓰라” 후에 공과 더불어 (적을)협공하여 섬멸함으로 원훈(元勳)에 책봉되어 대장군으로 임명되었으며 여러 번 옮겨 문하시랑 평장사에 이르렀다.
 
세분의 아들이 있어 덕수는 성산부원군이요 이후는 광성군이요 덕유는 회원군이다. 덕수는 네명의 아들이 있으니 원렬은 태복윤이며 원○은 영동정 원빈은 도령낭장 인렬은 문과에 급제하고, 이후의 아들 원도는 평장사요, 덕유의 아들 승은 이부전서이다.
 
경여는 전객령이니 원열의 아들이요, 보는 영동정이니 원○의 아들이다. 경조는 사평이며 원빈의 아들이며, 우규는 주부이니 인렬의 아들이요, 문홍은 직장이니 원도의 아들이요, 경은 지후 장은 추밀원사이니 승의 아들이며, 현손이하는 다 기록치 않는다.
 공은 빼어난 자질을 품부 받아 어렵고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의로움을 부지하여 움직이고 이치를 미루어 행하며 절도를 지녀 적절하게 처신하며 자질로 인하여 성공하여 부자와 형제가 모두 천자의 깃발에 기록
처음 공은 연산의 본집에서 돌아가시고 장례에 이르러 상여가 오리정(五里亭)에 이르자 상여가 땅에 붙어 움직이지 않아 그 자리에 묘소를 썼으니, 지금의 연산 관동의 묘소가 이것이다.
 
그 후 후손들이 남쪽으로 옮김으로 인하여 세월이 오래되자 허물어 졌고, 김씨 성을 쓰는 백성이 몰래 그곳에다 매장을 함으로써 공의 묘역이 전해지지 않았다. 순조 조 경오년에 비로소 묘소를 찾아 김씨의 무덤을 옮기고 공의 묘소를 수리하였으니 여기가 임좌의 언덕이며 그로써 1년에 한번의 묘사를 드리게 되었다.
 
되었으니, 거의 당나라의 성소(晟愬)와 송나라의 빈위(彬瑋)에 부끄럽지 않다.
 
또한 후손들이 번창하여 전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그 수효를 헤아리지 못하는데, 왕왕 세상에 이름남(즉 유명한 후손들이 태어남)은 가히 공의 덕이 두터워 영광이 흐르는 징험이라 하겠다.
 
옛 말에 이르기를 산이 높아야 구름과 비가 일어나며, 물이 깊어야 교룡(蛟龍)이 나온다 했으니, 어찌 믿지 않을 텐 가? 영원히 이정(彛鼎:공신들의 공적을 기록한 보배로운 솥)에 새기고 죽백(竹帛 : 대나무와 비단. 즉 종이가 없던 시절에 대나무로 마든 죽간과 흰색의 비단에 글을 썼음. 문서)에 드리움은 다 누리지 못하고 다 하지 아니한 복이며, 복록을 모두 온전히 하여 후손들에게 끝없이 내려줌이다.
 
공과 같은 분은 역대 예전의 보첩(족보)에서도 이와 같은 분은 드무니 아! 아름답도다. 공은 대대로 연주에 살았기 때문에 관향(貫鄕)을 연주로 하니 지금은 영변부라 말한다.
 
공의 후손인 진정 진묵 영익 심 응수 상순 경하가 야승(野乘 : 野史)과 읍지(邑誌)와 고려사에 실려 있는 기록들을 채집하여 나에게 묘지(墓誌 : 무덤 속에 넣은 기록)를 청하는데, 비록 선조의 착함이 비록 적다해도 또한 차마 사라지게 할 수 없어 영원에 불후(不朽)하고자 도모함은 자손들의 어짐이라.
 
하물며 고려국에 있어 큰 공훈이 있음에리오? 힘써 빨리 글을 써서 돌려보내어 음기(陰記)로 새기게 하였다. 숭정기원후 4갑진년(서기1904년)에 외손인 당성의 홍직필이 삼가 짓고 외예손인 수록대부남녕위 겸 오위도총부도총관인 윤의선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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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보 서문(서기1747년)
 
관봉 현상벽공의 아들 희원씨가 일가인 명직과 자경을 데리고 왔는데, 자경의 손에는 문목(問目)을 적은 작은 종이를 가지고 나에게 질문하기를 “새로 만든 족보에 시조를 바꾸어(고쳐) 썼노라”고 하였다. 듣자니 현씨는 본래 연주사람인데 후에 세 가지의 본관을 쓰니 성산과 창원과 순천이다. 성산과 창원은 형제이며 순천은 또한 창원에서 나와 그 자손들이 중조(중시조)의 봉호(封號)로 각기 시조를 세워 각기 스스로 족보를 만들었다.
 
그러나 고려사에 성산공이 그 아버지인 장군 모야와 더불어 창의하여 적을 토벌하였다고 기록되었으며, 성산의 옛 족보에도 이것이 또한 자세하게 기록 되어 있다. 두 분 조상(二祖:성산과 창원의 시조)의 위에 이미 한 대가 있어 이름과 자 관작이 문헌에 충분히 증명되어 장군공을 시조로 삼는다.
 
성산공 형제는 나란히 장군공의 목(穆:위패의 서열로 아들의 서열)에 놓여 있으며, 두 파(성산과 창원파)가 합하여 하나의 족보를 만들고 세 개의 관향(성산 창원 순천)은 모두 연주로 고침이 의리상으로도 마땅하고 예로서도 마땅하므로. 이것으로 자경에게 말해주고 돌려보냈다.
 
그 후 일가인 희태가 또한 여러 일족들의 뜻으로 와서 말하기를 “족보 만드는 일이 이미 완성되었고 장군공을 시조로 하여 족보를 합치고 관향을 바꿈을 한결 같이 자네 말대로 하였으므로, 자네는 또한 한마디 말로 서문을 지어주지 않겠는가?”라 하기에 나는 사양하였지만 결국 끝내 사양치 못하여 간략하게 전말을 이와 같이 기록하였다.
 
아! 사람이면 뉘 부모가 없으리오? 부모로 말미암아 위로 올라가면 비록 백세(百世 : 3000년 정도의 긴 시간. 즉 영원)의 멂이라도 모두 부모의 부모가 되어 실로 같이 하나의 기운(同氣 : 형제)이리니, 이것이 예경(禮經:예에 관한 유가의 경전)의 ‘조상을 높이고 근본을 중히 함’이요, 태사공(전한시대의 사마천. 사기를 지은 사람)이 ‘중려(重黎)로부터 서술’함과 구양공(송나라 초기의 구양수. 문장가이며 정치인)이 ‘대우(大禹:고대 하나라를 세운 인물. 9년의 대홍수를 다스렸다 함)로부터 소급’함이니, 만일 가히 증명할 수만 있다면 아득히 멀다고 하여 혹 버릴 수가 없으니, 두개 파가 같이 장군공을 시조로 한다면 또한 두 분의 조상을 미루어 부모의 마음으로 삼음이니, 참으로 천리(天理)의 자연이라 하겠다.
 
또한 장군공으로부터 자네의 자손에까지 미루고 비록 손자에 또 손자(에까지 미룬다)해도 또한 같은 한사람의 손자에서 나옴이니, 그 사랑하는 바가 멀고 가까움과 친하고 성김의 차이가 없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나의 서로 우애하고 친목 하는 생각의 까닭이 어찌 유연히 생겨나지 않겠는가? 비록 멀다 해도 가까움 같이하고 비록 성기지만 마땅히 찬하게 여긴다면, 어이 지난날 각자의 조상을 시조로 삼아 각자 족보를 만들어 서로가 상관치 않음과 같겠는가?
 
모든 족보의 제현(諸賢)들은 능히 오늘의 족보를 같이하고 시조를 같이하는 정의(情誼)를 잊지 않는다면, 가깝고 사랑하는 마음이 어찌 서로 두텁지 않겠는가? 근심하고 어려운 때에 어이 서로가 구휼하지 않음이 있으리오? 아! 각자가 힘쓸지어다. 나는 이번 일에 대하여 따로 느낌이 있으니 애석하구나. 관봉공께서 살아계셨더라면 그 견식의 높음과 의리의 밝음으로 문중(門中)일의 전말을 자세하게 밝힘을 다른 사람들의 의논을 기다리지 않고 결정 할 터인데, 가히 그의 한마디 말씀을 듣지 못함을 거듭 슬프게 여긴다.
 
숭정 갑신년 후 두 번째 정묘년(서기1747년) 맹추에 파평 윤봉구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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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보 발문(서기1747년)
 
족보라 함은 선조를 높이고 후손들을 이어서 소목(昭穆:조상들의 서열)을 차례하며 효도와 공경심을 두텁게 하여 사람들이 지켜야 할 도리와 세상의 교화에 관계되는 까닭이 크다 하겠다.
 
예로부터 명문벌족들이 족보를 가지지 않음이 없었는데 홀로 우리 연주 현씨들만 없었음은, 어찌 선대에 일찍이 여기에 생각이 없어서 그리 했겠는가? 실로 후손들이 쇠퇴하여 떨치지 못해서 그리 된 것이리라.
 
굴원(屈原:춘추시대 초나라의 문장가)의 이소경(離騷經)에 ‘고양씨의 후손’이라 적음과 태사공이 ‘용문의 세가(世家)’라 적어서 선대의 계통을 밝게 기록하고 세대의 덕(世德)을 포장(鋪張)함이야말로, 진실로 자손들이 조상을 높이고 근본을 소중히 하는 방법이지만, 우리들 후생(後生)과 같이 재주는 옛사람에 부끄럽고 지식은 아이들의 생각과 같다면, 장차 무엇으로 선대의 계통을 고찰하여 선조의 덕을 찬양하겠는가?
 
비록 그렇다 해도 마음을 씻고 삼가 생각하고 전해오는 의심스러움을 의심하며, 손을 씻고 공경히 펼쳐 앎을 지식으로 삼아 족보를 닦고 완성하여 영원한 후세에 드리움이니, 이것이야말로 실로 일족의 성대한 일이며 또한 후손들의 큰 다행이다.
 
그윽이 생각해보면 근본을 떠난 지가 이미 오래되고 조상과의 거리가 이미 멀어져 점차 그 근원이 어두워져 더욱더 그 전함을 잃어버린다면, 후대 사람들이 지금을 봄에 반드시 지금의 사람들이 옛날을 봄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현씨네들의 족보가 끝내는 반드시 우리나라에 전해지지 않을 것이므로, 어찌 거듭 애석함이 아니겠는가? 일가 가운데 명직 자경이 이를 두려워하여 족보 닦기를 꾀함이 몇 년이 되었다.
 
마침 활자를 만드는 곳이 있기에 일가인 희태가 이를 계기로 족보 인쇄를 건의하기에 재물을 내어 공역(工役)을 돕고 각도(各道)에 통문을 내었으니, 두남(斗南)의 고보(高步)는 모두 하나의 근원의 파가 되며, 한강 북쪽의 청벌(淸閥)은 같은 뿌리의 가지 아님이 없기에, 편지가 왔다가는 나머지와 족보의 단자가 보내지는 나머지에 세월은 쉽게 가지만, 공역(工役:족보관련 일)은 점차 차질이 생겨 4년이나 지난 병인년에야 영주 도계에다 보청(譜廳 : 족보 만드는 곳)을 설치하였으니, 나와 일가인 수관 재언이 날마다 일을 보았으며, 외손인 부평의 이한운 완산 이백형 또한 편집에 관여하였기 때문에 청하여 서로 상의하여 이듬해 가을인 8월에 완성되었으니, 아름답고도 성대한지고.
 
현씨의 족보는 이로부터 가히 세상에 전해지리라. 아! 우리 현씨가 세상에 드러난 지가 몇 백 년이다. 시조이신 장군공은 연주사람으로 고려조 중엽에 간악한 신하가 기회를 타고서 노략질 하자 여러 고을들이 바람에 쓸리듯 동조하였지만, 여러 자제들과 더불어 한 구석진 성을 보존하여 의병들을 훈계하고 격려하여 그 충성스러움은 오랑캐 두목을 감동시켰으며, 그 나머지의 일들은 비록 없지만 개략 고려사에 보이는 것은, 공의 은혜와 믿음이 평소 금나라(여진족) 사람에게 들려졌으니, 만일 구석진 나라의 일개 신하가 큰 포부가 없었다면 명성과 기림(聲譽)의 넘쳐남이 어찌 이와 같이 멀리 오랑캐의 나라에까지 미쳐진단 말인가?
 
상서공 형제분은 호걸스럽고 영웅스런 자질로 크게 교활한 자들의 난리를 평정함에 이르러서는, 같이 보천욕일(補天浴日: 여와가 하늘을 기운 일과 희화가 甘淵에서 해를 목욕 시킨 일. 즉 世運을 挽回한 큰 공로)의 공을 아뢰어 각기 횡금빙치의 즐거움(橫金騁淄之娛:미상)을 두어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이 나라의 역사에 밝게 실리고 그림으로 그려져 전해져 당세에 회자(膾炙)되었으니, 공훈과 사업의 큼과 치덕(齒德:나이와 덕이 나란히 높음)의 높음을 역사와 족보에서 볼 수 있어 거울처럼 밝게 가히 고찰할 수가 있다.
 
아! 조선조에 들어와 충성과 효도로 후세에 전해진 사람들이 절조와 의리가 많았으니, 판관공의 의로운 거사와 순국은 가히 선조의 뒤를 좆은 충성이요, 희암공의 벼슬을 사양하고 시골로 물러남은 이는 마치 절조를 더럽힘을 아신 듯 하였지만, 그러나 적개의 사적을 잃어버리고 나약한 사람을 일으켜 세운 풍성(風聲)이 사라졌으니 후손들의 통한(痛恨)됨이 어떻겠는가?
 
그 외의 선비와 높은 벼슬아치 효도하고 공경하며 학문하는 사람들을 낱낱이 헤아리기 어려우며 자잘한 것을 다 모을 수가 없지만, 근세의 관봉공은 강문(江門)의 수제자로 그 배움은 연원(淵源)이 있어 이름이 입학사(入學士)의 반열이요 몸은 한 시대 유종(儒宗:선비의 우두머리)이 되었다.
 
외손들에 있어서는 그사이에 임사(妊姒:미상 인명인 듯)와 같은 성녀(聖女)가 태어나고 주공과 소공(周召:옛 주나라 문왕의 아들인 주공과 소공)과 같은 석보(碩輔:현명하게 보좌하는 신하)가 많이 있었으니, 이것이 어찌 선대(先代) 육경(毓慶:오랜 세월 착함을 쌓아 자신이 다 누리지 못한 복록이 후손들에게 까지 쌓임)의 덕이 본지(本支: 본 줄기와 가지. 본손과 지손)에 면면이 백세(百世)에 미침이 아니겠는가?
 
아! 선조가 같으면 족보를 같이하고 족보를 같이하면 관향을 같이 함은 족보를 닦는 예규(例規)인데도, 우리 현씨가 처음 족보를 같이 하지 못했던 것은 각기 봉작을 받은 중조의 곁에다 최초의 시조를 기록하여 관향을 달리 했기 때문이었다.
 
시조의 휘 자 관향은 나라의 역사에 실려 있는데도 후손들이 (시조의 기록을)곁에 적고 관향을 달리함은 사리에 합당치가 않아 대방가(大方家:견문이 넓고 대도를 아는 사람)에게 질의(質疑)하여, 널리 일족들과 의논하여 시조를 좆아 관향을 바꾸고 분파를 통합하여 족보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실로 조상을 추모하여 근본을 잊지 않는 뜻이요, 또한 일족을 거두고 풍속을 두텁게 하는 방법인 것이다.
 
이로부터 우애하고 화목하는 정의(情誼)가 생겨나고 가깝고 사랑하는 정이 두터워 진다면, 비록 백세의 뒤에라도 거의 일족들이 소원(疎遠 : 소략하고 멀어짐)하다는 꾸짖음은 면할 것이다.
 
아! 이 일을 처음 경영한 사람은 자경이요 완성한 사람은 내백이니 그들의 마음 씀씀이의 깊고 멂과 열심히 노력하고 부지런함은 실로 일족의 영광으로서 충분히 후세에 보여 지는 것이 되리라.
 
아! 이 두 분이 아니었다면 나는 뉘와 더불어 이일을 하였겠는가? 족보가 완성되던 날 기쁘고 다행스런 마음을 이기지 못해 참월(僭越)함을 잊고 간략하게 전말을 기록함으로써 훗날 이어 족보 닦을 사람을 기다린다.
 
숭정 갑신 후 두 번째 정묘년 중추에 후손인 상희가 삼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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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보 발문
 
그윽이 우리 현씨의 고려 중엽으로부터 이조에 이르기까지 300여년을 생각해보면 아직도 족보를 갖지 못하였는데, 이는 선대에 언제나 여기에 뜻을 두지 않음이 없었고 또한 일족 가운데(宗中)의 모모씨들이 이것(족보 만드는 일)을 생각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그러나 사고가 겹쳐 일어나고 또한 재물 갖추기가 어려움으로 인하여 뜻은 있었지만 이루지 못한 지가 오래 되었다.
 
지난 계해년(서기1743년)에 이웃 동네인 진사 이수만이 족보 간행을 도모하여 나에게 재물을 도와 같이 활자를 만들자 말하였다. 나는 일족들과 상의하여 종중 재산인 돈 수십금(金)을 출연하여 활자를 새기고 통문을 전국의 일가들에게 알려 단자(單子) 모음이 지금으로부터 5년이나 되었다.
 
경영한지 몇 년에 일은 크고 재물은 부족하기 때문에 재물 내놓음이 근500금(金)이 되었으며, 병인년(서기1746년) 겨울로부터 영주의 도종촌에서 족보를 출판하여 정묘년 가을에 족보를 완성하여 일을 마쳤으니, 이는 실로 일족의 바램이었지만 완성할 겨를이 없었던 일이었다.
 
아! 문헌이 증명되지 않고 견문이 미치지 않아 선조의 사적(事蹟)이 상세하지 않고 먼 일족의 경우에는 혹 누락되기도 하여 비록 일일이 상세하게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모든 봉오리와 모든 골짜기는 곤륜산을 향하여 조종(祖宗)이라 일컫고 가는 물줄기와 긴 강들이 동해로 돌아가 근원을 찾음 같이 한다면, 소목(昭穆)은 밝아지고 우애(友愛)는 두터워 지리니 바라건대 힘쓸지어다.
 
세월이 점차 오래되자 근원을 잊어버리고 세대가 더욱 멀어지니 전함을 잊는 것. 아! 아름답고도 성대한지고. 우리 현씨의 족보는 이제부터 가히 세상에 전해지리라.
 
이에 참월(僭越)함을 잊고 간략하게 전말을 기록한다. (위의 문장 중 ‘函成’ 두 글자는 ‘述先’이 아닌가 한다) 숭정 갑신 후 두 번째 정묘년 중추에 후손 희태가 삼가 발문함
 
정묘보의 범례 적요

 

1. 시조이신 장군공의 휘는 고려사에 밝게 실려 있는데, 상서공의 사적 가운데 이전에는 상서공을 시조로 하여 장군공은 곁에다 주석(註釋)을 달아 놓음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에, 여러 대가(大家)들에게 질의하여 지금은 이것을 고친다.

 

1. 태복공께서 태복윤으로 임명 된 것이 충렬왕11년 경인(서기1290년)이니, 상서공께서 조위총의 난을 토벌한 명종 4년 갑오년(서기1174년)과의 거리가 117년(실제는126년 차이)이 되고, 또한 상서공께서 기로회에 들어오시어 수 누리기를 80여년이나 하였으므로, 돌아가신 해인 고종조 을해년(서기1215년)에서 경인년(서기1290년)까지 76년(실제75년)이 되어, 그간의 세월이 대단히 많으므로 혹 부자가 서로 이음이 아니면 혹 1~2대가 누락 되었는지?
 
그러나 옛 기록에는 이미 아들의 자(字)를 전(塡)이라 기록되었으므로 이제 와서 갑작스레 고칠 수가 없어 간략하게 곁에 주석을 달아 그것으로 후대에 전하는 의심나는 것으로 한다.

 

1. 태복공 아래와 시사(寺事)공의 위에는 옛 기록에 좌참찬 휘 ‘금’의 1세(世)가 있는데, 바른 줄에 쓰지 않고 자세하며 넓게 양세(兩世)의 사이의 곁에다 기록해둔 것은 아마도 예전에도 의심스러웠지 싶다.
 
이제 해서(海西 : 황해도의 서쪽 지방) 봉산에 사는 첨사 신달의 집에 소장하고 있는 족보에는 태복공 아래에 전객령 휘 경여와 참찬공 휘 양세(兩世)가 보이는데, 갑작스레 이제 와서 써 넣으면 사리가 중대함으로 바른 칸에 공란(空欄)으로 두고 곁에다 주석을 실어 훗날 다시 넓게 고찰함을 대비한다.
 
정묘보의 문목(問目) 묻기를 명직의 집안 성씨와 관향을 성주 팔거현으로 되어 있는데, 대개 현씨는 본래 연주인이다. 고려조 병부상서 휘 덕수를 시조로 하고, 고려사에는 상서공의 사적을 ‘연주인이며 그 아버지인 휘 담윤과 더불어 운운’하므로, 상서공의 휘와 자는 이와 같이 국가기록(역사)에 상세하게 등재되어 있다.
 
그러나 예전부터 상서공을 시조로 하고 장군공은 곁의 주석에다 기록함은, 아마도 상서공이 성산군으로 이봉(移封)되어 자손들이 이봉(移封) 된 곳을 인하여 성씨의 관향을 삼았기 때문이리라.
 
이제 바야흐로 족보를 닦음에 각처의 단자(單子:족보에 등재 될 사람의 이름을 적은 기록)가 어떤 것은 장군공을 시조로 하고 어떤 것은 상서공을 시조로 하는데, 만일 장군공으로 시조를 삼으면 이는 성산의 현씨가 아닐 것이요, 장군공을 곁의 주석에다 써 놓으면 사리에 맞지 않는 듯 하므로, 어떻게 하면 도리에 합당할까요?
 
또한 상서공에게는 두 분의 아우가 있어 한 사람은 광성군이요 한사람은 창원군으로 그 자손들이 각기 봉호(封號)를 관향으로 쓰지만 모두 같은 한 사람의 후손이기 때문에, 창원의 현씨 또한 단자를 닦아 보내와서 같이 족보하기를 원한다.
 
상서공의 둘째 아들의 자손 또한 관향을 순천으로 쓰는데, 만일 상서공을 시조로 하면 창원의 현씨는 같이 족보하지 못하게 되므로, 당연히 장군공을 시조로 하여 관향을 연주로 한 연후에야 모두가 같이 족보를 할 수 있는데도, 어떤 이는 말하기를 ‘각파가 선대로부터의 관향을 써 왔으므로 갑자기 관향 고치기가 어려우니, 과거에 의거하여 상서공을 시조로 하고 곁에다 장군공을 (기록하고) 그 사유(曲折)를 상세하게 기록하도록 하며, 창원은 따로 별책을 붙임이 괜찮으리라’고 하며, 어떤 이는 말하기를 ‘족보에 이미 연주라고 써놓고 각 파별로 관향을 달리 함은 옳지 못하므로, 모든 현씨는 당연히 같이 연주로 고쳐야한다.
 
이는 사람의 집에 있어 막중한 일이므로 관향을 고치는 사유를 예조(禮曹)에 고함이 옳으리라’라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족보를 같이하는 여부는 논할 것도 없이 최초에 아는 이름으로 시조로 삼지 아니하고 아래로 1대(代)를 내려가서 시조로 삼는다면 자손의 마음으로 헤아려보면 대단히 편치가 않을 것이므로, 반드시 장군공을 시조로 하여 연주로 관향을 고침이 사리 상 대단히 옳으며, 이로부터 사가(私家)의 일을 반드시 예조에 알릴 필요는 없다’고도 하는데, 여러 가지 말들의 같지 않음이 이와 같아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오니 명백한 지도와 가르침을 바라노라.
 
씨족의 원류에 대한 만성보(萬姓譜)에는 장군공 이하의 대수(代數)로 연주 현씨로 쓰여 있고 명직의 11세조 이하로부터는 따로 성주 현씨로 쓰여 있으므로, 이 또한 가히 당초에는 연주로 관향을 한 하나의 증거가 아니겠는지?
 
밝게 살피고 비교하고 헤아려 알아보심이 어떠할 런지요? 답하기를 양세(兩世:장군공과 상서공 양대 부자)의 가히 증명됨은 이미 고려사에 있으니 최초 시조의 이름을 없앰은 불가하다. 내 생각에는 장군공을 시조로 하여 그 아래에다 주석(註釋)으로 연주인이라 하며, 덕수에 있어서는 주석으로 성산군으로 봉하여졌다 주석하고 자손들이 이로 인해 성주로 관향하며, 덕유는 창원군으로 봉해졌다 주석하고 자손들이 이로 인해 창원이라 관향하며 묶어 이름 하기를 ‘연주현씨 족보’라 함이 옳을듯하다.
 
관향을 바꾼다는 말에 있어서는 자손들이 각기 그 이봉(移封)을 따라 관향 함은 족보 가운데 그 사유가 실려 있으니, 이제 와서 반드시 고칠 필요 없이 예전을 좆음이 옳다하겠다.
 
주례(周禮) 씨족의 예에서도 그것을 논하였으니, 즉 태사씨가 관장(管掌)한 씨족의 나뉨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 있으므로, 이에 성씨는 성주와 창원 순천으로 하고, 겨레(族)는 각기 그 겨레를 좆아서 지파(支派)가 나뉘어 쓰여도 결국은 그 근본에서 만나질 터이므로 무엇을 의심한단 말인가?
(이상은 도암의 답변)
 
인가(人家)의 족보에 실려 있는 시조가 어찌 모두 가장 상고시대 최초의 인물이겠는가? 다만 자손들이 아는 까닭이 이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족보에 등재된 시조 외에 다시 어떤 이름이 있어 아는 바의 문헌에서 가히 증명된다면, 당초 시조로 시조를 아니 하고 갑자기 하대로 내려와 어떤 아들 어떤 손자를 시조로 족보에 등재 한다면 이는 족보를 편집하는 자의 잘못이다.
 
비단 의리상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로 자손들의 마음이 편치가 못하리라. 지금 현씨의 족보에는 장군공의 이름과 사적이 이미 고려사에 실려 있으며 장군공을 크게 족보 머리에 써 두고 시조로 삼고 상서공 형제분이 잇고 있으므로 사리의 밝음이 확실하여 의심남이 없다.
 
과연 장군공을 시조로 삼고 이로 인하여 연주 현씨를 족보의 이름으로 해야지, 각자 중조의 봉읍(封邑:식읍)으로 인해 그 성씨의 관향을 달리한다면 이미 명분과 실리(名實)가 서로 어긋날 것이며, 또한 하나로 통합하는 뜻에 흠결이 있다 하겠다.
 
나의 생각에는 시조에 통합하여 족보의 이름을 세 관향으로 한 것은 당연히 모두 연주로 고쳐야 함이 마땅하다 여긴다. 고금의 성보(萬姓譜)와 관향에 는 각기 (관향을)달리하는 예가 없으므로 의견을 합쳐보시오. (이상은 구암의 답변)
 
삼가 두 분 선생의 답하신 바가 장군공을 관향으로 하여 족보를 이름 함은 같고 관향을 바꾼다는 설에 대하여는 다름이 있기 때문에, 다시 남당 한선생에게 질의 하였더니 답하시기를 ‘자손들이 시조를 좆아 관향을 쓰고 족보를 같이함은 사리가 명백하다’고 말씀하심이 하나 같이 구암선생의 답서와 같으며, 또한 여러 곳의 의논이 또한 두 분 선생이 답하신 바와 같으므로, 모든 일가들을 합보(合譜)하고 모두 연주로 관향을 바꾼다.
 
부록(연주와 성주의 여지승람에서의 발췌문) 삼가 현씨를 살펴보면, 본래 연주인이다. 고려사에 우리 중조이신 상서공의 사적이 서술되어 있음이 연주인이라 칭하며, 여러 현씨들 또한 연주라고 많이 칭한다.
 
여지승람에는 상서공이 연주 인물편에 보이는데 성씨는 연산이라 하고 주석에 또한 현(玄)이라 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 현씨의 관향은 본래 연주이며 대대로 연주 땅에서 산 것이다.
 
후에 상서공께서 팔거군으로 봉해졌다가 후에 성산군으로 봉해졌기 때문에 자손들이 혹 성주로 씨를 삼고 팔거로 관향을 삼았기에, 성주와 팔거 두 고을의 연혁과 사적을 왼편에 붙여 그것으로 근본의 땅을 밝힌다.
 
연주 건치연혁(평안도편을 발췌함) 연주는 본래 고려의 밀운현이며 한편으로 안삭이라 한다.
 
광종21년 연주로 고쳐 지주(知州)로 삼았다. 공민왕16년에 연산부로 승격되다. 이조 세종조11년에 연산 무산을 합쳐 영변대도호부로 고쳐 읍(소재지)은 무산의 약산성에 두었으며 도절제사를 삼았다.
 
단종 시에 다시 절도사와 부사를 겸하였고, 세종 조에 옛 연주의 땅을 잘라 운산군에 소속하였다.
 
군의 이름은 밀운 안삭 연주 무주 고청성 약산이며 성씨는 연주 현씨 인물로는 고려조 현덕수 성주의 건치연혁(경상도편에서 발췌) 성주는 본래 신라의 본피현이며 경덕왕 때 신안현으로 고쳐 리산군에 소속시키고, 후에 벽진군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조에 경산부로 고치고 경종조에는 강등되어 광평군으로 하였다. 성종조에 대주현으로 고치고 ○종조에 성산부로 고쳤다. 충렬왕때는 흥안도호부로 승격되고 후에 성주로 고쳐 목(牧)을 삼았다.
 
충선왕때는 강등되어 성산부로 되었다가 조선조에 들어와도 그대로 하다가 태종조에는 임금의 태(御胎)를 부의 조곡산에다 안치하고 성주목으로 승격하였다.
 
속현(屬縣)인 팔거현은 고을의 동쪽 12리에 있어 본래는 신라의 팔거이며 한편으로 인리라고도 한다. 경덕왕 때 팔리로 이름하고 수창군에 소속시켰다.
 
고려조에 다시 팔거라 호칭하고 후에 거(居)자가 바뀌어 거(莒)자로 되었다. 현종시에 본 고을(성주)에 소속시키고 따로 칠곡이라 불렀다. 군의 이름은 본피 신안 벽진 경산 광평 대주 성산 흥안 성주이며 성씨 팔거 현씨이다 회원의 건치연혁(경상도편에서 발췌) 여지승람을 살펴보면 회원은 본래 신라의 골포현이다. 경덕왕 때 합포로 바꾸어 의안군에 소속시켰다. 고려 현종 때에 의안과 합포를 모두 전주에 소속시키고, 후에 회원으로 고쳤다. 충렬왕은 원세조가 동정(東征)한 홍억기의 공로로 상을 줌으로써 의안을 의창이라 고치고 아울러 회원도 승격되어 현령을 두었다.
 
조선 태종 조에 두 현을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창원은 부(府)로 승격하였다가 후에 도호부가 되었다. 군의 이름은 골포 합포 회원 의창 창원이며 성씨는 의창 현 창원 현씨이다 세덕(世德)록 장군공 사적(추록) 공은 본래 연주사람이며 젊어서 외롭고 가난하였다. 8~9세에 신체가 대단히 컸고 지용(智勇)이 절륜하였다. 연주의 검각산은 골짝이 깊고 나무가 빽빽하여 사람들이 감히 밤에는 지나지 못하였지만, 공은 어렸을 때 일로 인해 외출함에 길이 이 산을 지나게 되었다. 밤은 깊어 어두운데 귀신과 도깨비가 횃불을 줄지어 앞에서 인도하며 말하기를 ‘현장군이 오신다’고 하였다니 가히 특이한 조짐이 징험됨을 먼저 보인 것이라 하겠다.
나이 19세에도 장가를 들지 못했는데 당시 흉노족들이 국경을 침범하자 공이 창의하여 의병을 일으켜 적들을 물리치자 의종이 가상하게 여겨 특별히 연산부사를 제수하고 또한 이름난 벼슬아치의 집안을 골라 장가를 들게 하였다.(이것은 심묘기(尋墓記)에 보인다) 북송이 여진족의 난리로 인하여 고려에 병력을 요청하여 공이 원병대장이 되어 공을 세우자 송나라의 천저가 크게 상을 내리시고사신을 보내 공(公)을 돌려보내면서 이로써 현 모를 크게 쓰는 뜻으로 본국에서 포유(褒諭)하였다.(이는 고려사 명신록에 보인다) 고려 명종 조에 조위총의 난에는 공이 두 아들과 더불어 힘껏 싸워 적을 물리쳤다.
이듬해 금나라가 고라를 보내 병사들을 이끌고 연주의 경계에 머무르니 성안이 모두 두려워하자 고라가 말하기를 ‘우리의 임금이 듣자니 너희 나라 변경 고을들이 임금의 명에 항거하는데 너희 성만 홀로 좆지 않음으로써 오래도록 적들이 핍박한다는 말을 듣고, 나에게 명하여 병력을 이끌고 너희들을 도와주라 하였으니 너희들은 의심치 말라’고 했다.
공은 평소 은혜와 믿음으로 금나라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공이)그들의 진에 이르러 사실을 알려주자 고라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우리 임금의 들으심이 과연 사실이었구나. 급한 일이 있으면 내 마땅히 도우리라’고 하고 드디어 돌아갔다.(이것은 고려사에 보임)
 
후에 끝내 조위총의 난을 평정하여 원훈(元勳)이 되어 벼슬은 평장사에 이르고 연산군으로 봉해졌으며, 급기야 돌아가시어 후에 장례를 하고자 상여가 오리정(五里亭)에 이르자 고을의 백성들이 모두 모여 제사를 올리기에 상여가 머물러 제사를 받았다. 제사를 마치고 (떠나가려는데)상여가 땅에 붙어 움직이지 않아 이에 이 땅에서 장례하고자 하는 뜻으로 고한 연후에야 상여가 움직이기에 드디어 지금의 장소에 장례하였다. 양씨 성을 쓰는 사람이 공의 별장 터에 집을 짓자 밤에 대장이 나타나 위의(威儀)를 갖추고 이름을 부르며 꾸짖으니 (양씨가)크게 놀라고 두려워 바로 이사를 갔다.
 
개천과 박천의 일가들이 공의 묘소를 찾는데 이때도 공이 몇 사람의 꿈에 나타나 말씀하기를 ‘깊이 파면 옛 무덤인데 세 마리의 큰 벌들이 날아 나오면서 내 무덤을 징험하리라’했다 하며 기타 영험하고 기이한 일들을 다 기록하지 못한다.(이것은 심묘기에 보임) 부록-묘소를 찾은 사적 기록 우리의 시조이신 시랑공은 고려의 이름난 신하이다.
공은 간세(間世:연대가 서로 떨어짐이 오래 됨)의 영웅이시며 넉넉한 공로와 위대한 절조는 고려사와 관서여지승람과 본부읍지에 밝게 등재되어 혁혁하게 사람들의 귀와 눈을 비춘다. 자손들이 지금까지 번성함은 선대의 음덕이 비호하지 않음이 없지만, 묘소가 세대가 오래되어 잃어버렸음은 대개서쪽의 변방이라 땅이 유연(幽燕)에 가까워 자주 전쟁을 겪었기 때문 일 테니, 자손들이 대대로 통한함이 어찌 다함이 있으리?
비록 옛 노인들이 전하는 바와 야사(野史)에 기록한 바에는 모두 공의 묘소가 연주의 관동에 있는 줄은 알지만, 그러나 가히 근거할 만한 실질을 얻지 못하여 의심으로 의심을 전해옴이 이미 100여년이 되었다. 지난 순조 조 신유년(서기1801년)에 4종조부이신 진헌공과 재창씨가 끝내 공의 묘소를 잃어버릴까 두려워 개천과 박천의 일가들을 이끌고 모두 관동에 모여 전해지는 말로 전하는 곳에서 무덤을 찾고자, 가히 징험할 만한 자취를 찾아 그리 깊게 파지 않아 널려진 해골들이 먼저 드러나기에 모두들 바라보고는 깜짝 놀라 서로 돌아보았다.
가깝게 사는 사람인 김봉삼이라는 사람이 달려와 말하기를 ‘여기는 나의 7대 방조모의 무덤인데 이것이 무슨 일이오?’ 하자 모두들 말이 없었다. 드디어 실제적인 자취를 찾지 못하고 그만 두었으니 개탄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후 멀고 가까운 일족들이 각자 염탐하였지만 참다운 실마리를 찾지 못하였다. 병인년 여름에 이르러 선친께서 약산의 승사(절집)에 피신 하셨는데 나이 많은 스님인 ‘능’이라는 수좌가 있었는데 바로 박천의 일가인 중부의 형이었다.
날마다 모시고 대화함에 정성스럽지 않음이 없었음은 그의 성씨가 현이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말하기를 ‘아이 적에 연주의 보현사에서 머리 깎고 스님이 되었는데 선사께서 일찍이 말씀하기를 ’너의 관향은 연주 현씨라, 예전 현장군의 후예이다. 그 후손 되는 자들이 그 선조의 자취를 몰라서 되겠느냐? 내 마땅히 노선사로부터 서로 전해주는 말로 너에게 밝게 알려 주리라. 대개 현씨는 태평성대에 크게 드러나 부유함과 고귀함이 관서의 최고였다.
 
그 가문의 앞뒤 은혜와 덕은 이 절에까지 미침이 많았기 때문에 절의 편액을 ‘보현(保玄:현씨를 보호하다)’이라 함은 대개 현씨를 축원하는 뜻이다. 그 후 현씨 자손들이 벼슬로 인해 남쪽으로 옮겨가는 바람에 대대로 전해오는 사적과 전토(田土)와 기록들을 하나의 궤짝에 넣어 이 절에 부탁하고, 또한 선대의 무덤들을 수호하고 철마다 제사하는 뜻으로 하나의 책자로 만들어 절의 스님에게 맡겼기에 공경히 받아 보배처럼 보관하여 서로 지켜 전해 외우다가, 성화연간(서기1466~1487년간)에 불행하게 본사와 보관하고 있던 서적들이 모두 불에 타버렸다. 다시 절을 짓고 후에 편액을 바꾸어 ‘보현(普賢)’이라함은 세대가 더욱 멀어져 은택(恩澤)이 이미 없어졌기 때문이니, 가히 이겨 탄식하겠는가?
 
서적들을 이미 전하지 못하여 오직 전해 외어지는 말들도 지금은 없어졌지만 너는 알아야 한다. 장군공은 어려서 외롭고 가난하였으며 8~9세에 체격은 크고 지혜와 용맹스러움이 따를 자 없었다. 금각은 즉 연주의 진산(鎭山:그 지역의 중심이 되는 큰 산)인데 골이 깊고 나무가 우거져 사람들은 감히 밤에 다니지 못했다. 공이 어렸을 때 일로 인해 외출함에 이 산을 지나게 되어 밤은 깊고 길은 어두운데 귀신과 도깨비들이 횃불을 줄지어 들고 앞에서 인도하며 말하기를 ‘현 장군이 오셨다’고 하였다니 가히 특이한 조짐을 징험을 먼저 보임이라.
 
공의 나이 19세에도 오히려 장가를 들지 않았을 때 흉노족들이 국경을 침범하여 공이 맨 먼저 창의하여 오랑캐들이 드디어 패주시키자, 고려의 의종이 가상하게 여겨 특별히 연주부사로 제수하고 또한 이름난 벼슬아치의 집안을 골라 장가들게 하였다. 후에 중국이 병력을 요청하자 대장군으로 임명되었으며, 또한 조위총의 난에는 원훈공신으로 여러 번 벼슬이 바뀌어 문하시랑 평장사에 이르고 연산군으로 봉해졌으니, 연산의 땅은 모두 그분의 식읍(食邑)이다.
공의 본 집은 연산부내에 있었지만 만년(晩年)에 옥녀봉 아래에다 별장을 지어 그것으로 교외에서 거처하는 장소로 삼았다. 공이 연산부내 본집에서 돌아가시고 장례함에 상여가 오리정(五里亭)에 이르자 연산부의 백성들이 모두 모여 제사를 준비하고 있기에 관(柩)을 지금의 묘소에 머물렀다.
제사가 끝나고 상여가 가고자 하였지만 상여가 땅에 붙어 움직이지 않아 이에 이곳에다 장례를 치르려는 뜻으로 아뢴 후에야 상여를 가히 움직일 수 있었다. 드디어 상여가 멈춘 곳에다 장례하였다니 그분의 영령(英靈)함은 이와 같았다.
 
마땅히 처음에는 묘도를 호위하는 물건들을 찬연히 갖추었으나, 전쟁을 겪고 세월이 오래되어 황폐 된지가 이미 오래되어 분묘가 편평해져 문득 평지가 되어버리자, 지경 내의 사람들이 그 묘지였던 자리를 점거하는 자가 있어 공의 후손들이 그 묘소를 흙으로 북돋아 그 땅(무덤)을 회복할 것을 두려워하여 비갈(碑碣)과 기록문들을 모두 들판에 있는 우물 속에 던져 메우고, 또한 공의 무덤 위에다 장례를 한 자가 있었으니, 공이 나라와 백성들에게 크나큰 공덕이 있었지만, 만세(萬世)의 무덤이 한결 같이 사라져 진실로 개탄함을 금치 못 한다‘고 말하였다.
 
선친께서는 그 말을 듣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는데 마침 일족인 도빈이 봉삼(봉삼은 공의 무덤 위에 무덤을 쓴 자의 방 후손)이 지금 성안에 거주한다는 말을 듣고 그로 하여금 초치(招致:불러 청함)하여 자세하게 사실을 물어보고 또한 묘소를 옮겨 장례함에 많은 도움을 준다고 회유하니, 과연 범죄사실을 자백하며 말하기를 ’우리 집안에 대대로 전해오는 말은 그것을 투매(偸埋 : 남몰래 매장함)라고 여깁니다. 현장군의 묘소와 비석에다 나의 방조모를 그 무덤 위에다 장례함으로써 자손들이 그로 인하여 멸절되었노라긴다‘라는 말을 한다. 또 비석 묻은 곳을 물었더니 그곳은 모른다고 말하였다.
 
봉삼의 말과 능택의 말이 서로 꼭 맞아 ’추나라의 만모방의 증명‘과 다르지 않기에 십분 믿게 되었다. 돌아와서 지헌공을 뵙고서 들은 바를 써 두었던 것으로 말씀드리기를 ’능택과 봉삼의 말이 추나라의 만모방이 묘소를 증명함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제 만일 김씨의 해골을 옮기고 넓게 파서 징험을 얻는다면 비석 돌을 준비하고 봉분을 높이는 의식을 마땅히 주자(회옹)가 제치공(制置公)의 묘소(에 하였던 의식)와 같이 해야 할 것입니다. 모두가 이일을 처리함은 모두 자손들의 책임입니다. 얼마 안 있다가 선친께서 중풍으로 누우셔서 끝내 이듬해 중하(仲夏)에 돌아가시고, 지헌공 또한 노환으로 돌아가신 지가 오래 되었으니 아! 애통한지고. 경오년 봄이 되어 족조이신 재덕씨께서 일가들에게 통지하여 관동에 모여 봉삼이를 초치(招致)하여 그로 하여금 묘소를 이장하게 하였다.
 
그날 저녁 산 아래에서 자는데 몇 사람의 일가들이 다 같이 밤에 꿈을 꾸었는데 한분의 (체격이)큰 사람이 거동과 모습(儀容)이 대단히 엄숙하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나의 무덤을 찾고자 한다면 다시 깊이 파면 하나의 옛 구덩이(무덤)가 나올 것이다. 구덩이 안에 세 마리의 큰 벌이 나올 테니 이것이 바로 나의 무덤 이니라’고 말하였다. 깨어나서 서로가 꿈 얘기를 하는데 모두가 같이 놀라고 기이하게 여겼다. 아침을 기다려 일하는 곳으로 갔더니 산 아래에서 온 사람들 또한 많았다.
 
드디어 다시 어제 팠던 곳을 파기를 거의 일장(一丈:열자. 약3미터 정도)에 이르자 과연 옛 무덤(구덩이)이 있고 구덩이 안에는 두개골 뼈와 이빨 두개가 있는데 뇌는 커서 네 뼘이나 되고 이빨은 길이가 두 치(약6센티)가 되므로, 일족들이 보고서 슬픈 느낌이 일어남을 깨닫지 못했다. 머리를 모으고 눈을 비비는 사이에 과연 세 마리의 큰 벌이 구덩이 밑에서부터 나와 날아서 일가의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다시 무덤의 봉분을 만들 때 세 마리의 벌은 다시 무덤 속으로 들어가니, 아! 이상하기도 해라. 수 백 년의 사라졌던 조짐이 이제 선조의 영혼이 꿈에 의탁함으로 인하여 하루아침에 다시 나타났으니, 이것이 어이 사람의 힘으로 능히 이를 수 있으랴?
 
또한 옛 노인들이 전해 오는 말을 들으니 ‘한사람의 양씨 성을 쓰는 사람이 집을 옥녀봉 아래 (현장군의)별장 옛터에 지었는데 하루 저녁에 등촉을 밝게 켜두고 앉았으니 갑자기 전도(傳導)하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이름이 들리기에 놀라서 벌떡 일어나 나가 보았더니 한 명의 큰 사람이 말을 타고 융복(戎服:예전 무인들이 입는 옷. 갑옷)을 입었는데 뒤 따르는 사람이 대단히 많았다.
 
양씨를 불러 소리쳐 꾸짖어 말하기를 ’너는 어찌 감히 나의 옛 별장 터를 점거하였더냐? 속히 당장 짐을 거두어 피하거라‘고 말하자 양씨는 즉시 집을 뽑아 옮겨 갔다하며, 또한 묘소를 손보던 날 5~6명의 늙은이들이 와서 말하기를 ’꿈이 한명의 큰 사람이 위엄과 거동(威儀)이 대단히 엄하게 묘소에서 병위(兵威)를 크게 떨치더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고금(古今)에 전해 말하기를 ’언제나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오는 밤이면 문득 부곡(部曲:옛날 군대 단위)의 행진하며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리면서 골짝에서 줄(열)을 늘어서 있기도 하였는데, 봉분을 다시 한 이후부터는 다시 이와 같은 일이 없다‘고 말을 하니, 아! 우리들 선조의 정령(精靈)이 옛 고향 산천 서식(棲息)하시던 곳에서 향충이 흩어지고 뱀과 같이 서려 있음이 흡사 물이 땅에 있음과 같아서, 어둡고 어두운 가운데서도 후손들을 깨우쳐 주시어 수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묘소를 찾게 해 주시어, 후에 문종(文種)의 탄식함을 면하게 해 주시고 해마다 드리는 의식을 펼칠 수 있게 해 주시니 어떤 것이 있어 이 일처럼 다행하단 말인가?
 
처음 의견을 내놓아 재물을 모으고 김씨의 무덤을 옮기게 하여 다시 선조의 무덤을 만듦은 재덕씨의 힘이요, 안산(案山)의 김씨와 이씨의 두 무덤을 파서 묘표(墓表)를 세우고 위토답을 산 사람은 족숙이신 심씨와 종장이신 종갑씨 삼종숙이신 석리씨 일가인 종억씨의 노력인데 심(鐔)씨의 힘이 가장 많다고 말들 한다. 이러한 전말을 기록함은 묘소를 찾은 분명한 징험을 밝히고 또한 모든 일족들의 정성과 힘을 다한 것을 알게 하고자 함이다. 숭정 네 번째 임인년 7월 16일 20대손 응수가 절하며 삼가 기록하다 상서공의 사적(고려사의 열전과 세가에 있다) 현덕수는 연주인이며 철면(鐵面)에 단단한 뼈대이며 담력과 지략이 있고 의기(意氣)로서 스스로 높게 여겼다.
 
언어가 과다하여 사람들은 혹 나무라기(흉보기)도 한다. 어려서 총명하여 영주의 분도장군인 김치규가 보고 기이하게 여기고 데리고 송도(개성)에 이르러 독서하여 대략적인 뜻을 통하고 글을 잘 지어 여러 차례 과거시험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명종 조 4년에 조위총이 서경(평양)에서 병력을 일으켜 절령(자비령)이북이 호응하였다. 덕수는 아버지인 도령 담윤과 더불어 주장에게 말하기를 ‘지난날 거란이 우리들을 침략하였을 때 여러 성들이 모두 항복하였지만 우리 고을만이 홀로 고수하였는데, 이제 위총의 군사들이 왕명에 항거함은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못하거늘 진실로 충의(忠義)를 생각하는 사람은 차마 (조위총을)따르겠는가?’라 하고 드디어 주장과 더불어 대궐을 향하여 절을 하고 성문을 닫아걸고 단단하게 지켰다.
 
위총이 첩자를 연주로 보내 말하기를 ‘이제 북쪽 국경지역의 40여 성들이 이미 모아졌는데 너희 성만 이르지 않았으니 장차 거병(擧兵)하여 죄를 물을 터이니 삼가하여 한 두 사람의 말을 듣지 말고 속히 서도(평양)로 오라’고 하자 성안에서는 덕수를 권행병마대사로 추대하고 주장이 언통 등 20여명을 보내 첩자를 잡아 죽여 버렸다. 위총이 다시 전하기를 장차 병사를 일으켜 전멸시키겠다고 하자 고을 사람들이 자못 흉흉하여 위총에게 호응코자 하니, 덕수가 거짓으로 맹(孟)을 주장의 아전(主將吏)으로 삼아 거짓으로 밀령(密令)을 써서 성밖 백성들을 성안으로 들어가 ‘서울의 병사 10령(領:고대의 군대 단위)이 이미 철령을 넘어 동쪽 경계로부터 장차 서경(평양)을 공격하려한다’고 말하게 하니 무릇 주진(州鎭:지방 행정 단위)들이 위총이 그릇되었다고 여겨 가히 가볍게 병력을 움직이지 못하고 각기 굳게 지킴으로써 기다리니, 성안의 사람들이 그것을 믿고 두 마음을 먹지 않았다.
 
덕수는 그 고을의 부사인 최박문 판관 안지언 김유 등과 더불어 병력을 나누어 주둔시키고 여러 문들을 지키는데, 병마사인 차중규가 급하게 연주로부터 운반역에 이르자 운주 사람들이 그를 죽여 버렸다. 분대감찰어사인 임탁재 녹사 이당취 등이 도장(병마사의 인끈)을 품에 지닌 채 연주에 이르러 말하기를 ‘병마사가 이미 죽었으니 우리들은 돌아 갈 데가 없소. 청컨대 우리들을 살려 주오’라 하였다.
 
고을 사람들은 덕수의 아우를 선지별감 용호장군 이후를 권행병마사사로, 덕수를 권감창사사로 하여 드디어 부서를 바꾸고 병사들을 엄격히 하여 지키니, 안북도호부령인 강우문이 34성의 도령들과 더불어 연주로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서울에서 장차 큰 병력을 일으켜 북쪽 변방의 여러 성들을 토벌한다지만 (우리들은)죄가 없기에 조상서가 우리들을 구하고자 사마(士馬:군사와 말들)를 보내 주는데, 그대의 성은 홀로 (항복하러)오지 않음은 무엇인가?
 
만일 다른 도모함이 있어 좆지 않는 이가 있다면 마땅히 그 겨레붙이들을 몰살할 것이므로, 마땅히 서경(평양)으로 와서 후회가 없도록 하라’고 하였고, 운주의 낭장인 군우가 또 변맹을 보내 꾀어 말하기를 ‘서경의 차사(差使)가 40여성과 모든 절의 승병 만 여 명을 거느리고 그대의 성을 공격할 것이니 속히 항복하라’고 하자 탁재가 맹(변맹)의 목을 베어 성밖에다 걸어두었다. 얼마 후 서경의 병사들이 와서 공격하니 탁재가 격파해버렸다. 저녁이 되어 서경의 병사들이 다시 성에 주둔하여 소리쳐 말하기를 ’이후 형제와 당취 등의 목을 베어 항복하는 자는 장차 두터운 상을 줄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도륙하리라‘고 말하였다. 덕수는 남문으로부터 출격하자 서경의 병사들이 서울(개성)로 달아나 서울의 서쪽에 이르러서 이의방에게 패배하여 다시 연주로 와서 몇 겹으로 (연주성을)포위하였다.
 
덕수는 공요지와 당취 등을 보내 급히 공격하여 대파(大破)하고 사로잡거나 죽인 자들이 대단히 많았다. 서경의 병사들이 다시 와서 공격하자 덕수가 다시 격파하여 노획한 병장기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듬해 금나라에서 고라를 보내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연주의 접경에 주둔하니 성안에서 모두들 두려워하였다. 고라가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너희 나라의 숱한 변방 고을이 임금의 명에 항거한다는데 홀로 너희들 성만 따르지 않아서 오래도록 적들이 핍박한다는 말을 듣고 나에게 병사들을 이끌고 구원하라 명하셨으니, 너희들은 의심치 말라‘고 했다.
담윤은 평소 은혜와 믿음으로 금나라 사람들에게 알려졌었다. (담윤이)그들의 군영에 이르러 사실을 말하자 고라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우리 임금께서 들으심이 과연 옳았다. 급함이 있으면 내 마땅히 도울 것이니, 너희들은 충의에 힘써 왕실에 한 마음으로 하라‘고 하고는 드디어 돌아갔다.
 
여러 성의 병사들이 다시 연주를 공격하자 덕수가 다시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왕은 담윤을 장군으로 임명하고 덕수는 내시지후로 삼았으나, 덕수는 글을 올려 지후의 임명장을 거두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으며, 얼마 후 출사(出仕)하여 안남도호부사가 되어 정치를 맑고 밝게 함으로써 아전들과 백성들이 공경하고 두려워하였으며, 더욱이 예절에 합당하지 않는 제사(淫祀)를 싫어하여 금지하는 명령을 대단히 엄하게 하여, 무당이나 박수(남자무당)들의 지경 내로 들어옴을 금지 하였다.
 
아전 한 사람이 여자 무당과 그 남편을 잡아 오기에 덕수가 신문(訊問)하며 말하기를 ’이 무당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이다‘라고 하니 동료들이 웃으며 ’여자가 아닌데 남편이 있겠는가?‘라 하니 덕수가 그녀의 옷을 벗기게 하였더니 과연 남자였다. 이보다 먼저 무당이 사족(士族)들의 집을 드나들며 몰래 부녀자들을 음란하게 하였지만, 그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부끄러워 사람들에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방탕하고 음탕하며 더러움에 이르게 되었으며, 이에 이르러 한 지방이 그의 신명(神明)에 감복 하였다.
 
조정에 들어와서는 도관낭중이 되었는데, 당시 산원동정인 노극청의 집이 가난하여 장차 집을 팔려고 하였으나 팔리지 않았다. (노극청이)일로 인하여 밖으로 나간 사이 그의 아내가 덕수의 백금(白金) 12근을 받고 집을 팔았다.
극청이 집에 돌아와 덕수에게 말하기를 ’내가 처음 9근으로 이집을 샀는데 산지 몇 년동안 집을 꾸미거나 하지 않았는데 12근을 받음이 어이 옳겠는가? 청컨대 돌려 주리라‘고 하니 덕수가 말하기를 ’너만 능히 의로움을 지키고 나는 아니란 말인가?‘하고 드디어 받지 않으니 극청이 말하기를 ’나는 평생토록 의로움이 아니면 행하지 않았으니 어찌 싸게 사서 비싸게 팔아, 재물을 더럽히겠는가? 자네가 만약 돈을 받지 않는다면 집을 다시 돌려 받으리라‘고 하니 덕수는 부득이 받으며 말하기를 ’내 어찌 극청보다 못하겠는가?‘하고 드디어 절집에 (돌려 받은 3전의 돈을)시주하였다.
 
이 일을 들은 사람들은 탄식하여 말하기를 ’지금 세상에 이와 같은 사람을 볼수 있을까?‘(이 한 조목은 명종실록에 있다) 후에 이부낭중으로 제수되자 간관(諫官)이 변방의 사람에게 (이 직위를 제수함이)마땅치 않다고 상주하여 다시 병부낭중으로 제수되었으며, 다시 사마소향이 되었다. 덕수의 아내가 어머니를 모셨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말을 하니 덕수는)아내가 어머니를 모신 사실을 들추어 밝힘으로 (아내를)위로하였다.
 
신종조에 전중감이 되었다가 여러차례 옮겨 병부상서로 치사(致仕:늙어서 벼슬을 내 놓고 고향으로 물러남)하였다. 성산부원군으로 봉군(封君)되고 고종2년 을해(서기1215년)에 5월 임오일에 돌아가셨다.
송나라 순희 원년 고려 명종조 4년 갑오에 장군공과 더불어 창의하여 연주성으로 들어와 조위총을 토벌한 큰 공이 있으며 내시지후로 임명되다. 밖으로 나가 안남도호부사 경상도 안렴사가 되고, 조정에 들어와 병부낭중이 되고 다시 사마소경이 되었다.
신종조에 전중감으로 임명되어 여러 번 옮겨 병부상서에 이르렀으며, 처음으로 팔거군으로 봉군되고 후에 성산부원군으로 이봉(移封)되다.
 
치사(致仕)하여 평장사 최당 등 아홉 분과 더불어 기로회원이 되어 그림(초상)과 돌에 새겨졌으니, 공은 일곱 번째이며 세상 사람들은 땅위의 신선(地上仙)이라 말했다. 두루 다섯 왕을 섬기고 나이는 80여세에 이르렀다. 가정8년 고려 고종 을해년 5월 임오일에 죽었다.(이상은 고려사와 열전에 섞여서 보인다) 나머지는 남악사우의 축문과 기로회의 좌목(座目) 소서(小序)에 보인다.
 
 
아홉 현인들의 기로회(耆老會) 좌목(座目)-희종6년 경오 가을에 아홉사람이 이 모임을 만들다 수 태위 문하시랑 동중서 문하평장사 치사 최당(호 쌍명재 시호는 정안) 태수부 최 선(최당의 아우) 태복경 치사 장자목 동궁시독학사 고영중 판비서성 치사 백광신 수 사공 치사 이준창 병부상서 치사 현덕수 수 사공 치사 이세장 국자감대사성 치사 조 통 좌목 소서(小序) 아! 사람의 생애에 천지간에 오래 삶이 가장 귀한 것. 덕이 같은 원로(黃耈)들이 합잠(盍簪(선비들의 회합)하여 청유(淸遊)함은 예로부터 몇 사람이나 되었던가? 당나라의 백낙천 송나라의 문로공은 모두 성대한 늙은이로 같이 낙양의 모임이 있어 당세에 아름다움을 차지함으로써 그림으로 그려져 전해지므로 기영(耆英))의 모임은 예전에도 또한 드물었었다.
 
우리나라 고려 중엽에 태위 최당이 늙어서 야(野)로 물러나 그 집 이름을 ‘쌍명당’이라하고 같은 시대 치사(致仕)한 사람들 여덟 분과 같이 예전 두 분(백낙천과 문로공)의 일을 본받아 ‘해동(海東:우리나라) 기영(耆英)의 모임’을 만들어 소요자적하며 술과 시 읊음으로 스스로 즐기면서 그림으로 남기고 돌에 새겨 세상에 전파하였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땅위의 신선(地上仙)’이라 말했다고 하니, 즉 늦은 나이의 맑은 운치와 난정(蘭亭:중국에 있는 정자 이름. 왕희지의 글이 있음)에서 저녁나절의 아름다운 때도, 상상컨대 반드시 당시에는 두지 못하였을 것이니, 한 때 사대부들의 경앙(敬仰)하는 마음은 곽이(郭李)가 같은 배 타기를 바람 같을 뿐만은 아니라 하겠다.
아! 우리의 선조이신 상서공은 아홉 분의 현인(賢人) 가운데 일곱 번째를 차지하시니, 태어나고 돌아가신 연대는 자세하지 않아도 수 누림(享壽)은 이를 좆아 가히 추측할 수 있지만, 애석하도다.
 
연대가 이미 멀고 문헌이 증명되지 못하며, 같이 노신 그림과 회칙의 조목을 이미 목격하지 못하고 또한 귀로 듣지도 못하였으니, 후손들의 감개(感慨)가 어찌 얕다 하리오? 이제 족보를 완성함에 즈음하여 선대의 사적을 부록(附錄)하고 기로회의 조목을 이와 같이 적음에, 추원(追遠)의 감회를 이기지 못해 그 참월(僭越)함을 잊고 간략하게나마 어지러운 글로써 사모하는 마음을 붙인다 말하노라.
 
숭정 기원후 두 번째 정묘년 중추 상순(上澣)에 병부상서공의 16세손인 상희가 손을 씻고 삼가 씁니다 평안도 영변 남악사우 숭정92년(서기1719년) 숙종 조 기해년 간 청북(淸北)의 선비(儒生)인 백채오 등 수 십 명이 사우(祠宇:특정인을 추모하고 제사를 드리는 집 등) 세우는 일로 청북지방에 통문을 내자, 사림(士林)들이 같은 목소리로 호응하였다.
경종 조 계묘(서기1723년) 봄 본 고을(영변)의 유생인 길인화 오인서 류성추 명만경 등이 건의하여 고을의 남악(南岳) 아래에다 사당을 지어 갑진년 가을에 공사를 마쳤다. 봉안축문 하늘의 은총이 있어야 영웅호걸이 태어나므로, 간기(間氣:영웅호걸이 태어나는 천지의 특수한 기운)가 모이고 산과 물이 정기(定期)를 길렀습니다. 혹은 절의(節義)를 이루고 혹은 공훈과 명예를 드러내지만, 오직 공은 한 몸으로 두 가지를 아울렀지요. 500여 세월에 그 어짐 뉘 크랴만, 아이 때부터 뜻은 크고 기운은 맑았습니다.
 
문장과 말은 기운차고 견식(見識)은 고명(高明)하였으며, 어른들이 탄복하고 일찍부터 높은 명성을 드날렸습니다. 조위총이 평양의 병사들을 훔쳐 농락하니, 절령(자비령) 이북의 40여 성이었지요. 임금 보기를 버림 같이 하고 오직 적만을 맞이하여, 윤리와 강상은 썩고 대의(大義)가 어두웠습니다. 하북의 모든 성들 가운데 한분의 참다운 신하 있어, 때 맞춰 위의(威儀)를 펼쳐 분기를 일으키니 기개가 가득합니다. 싫어함은 헛된 죽음이라 범의 입에서도 오히려 어지러움을 생각하고, 손으로 가리켜 역순(逆順:역적과 충신)을 말하고 의로움은 여럿의 정의(情義)를 일으켰지요. 밝으신 그 말씀은 천둥소리 같고 태양 같으며, 주장(主將)을 깨우쳐 충적(忠貞)을 힘쓰게 하였습니다. 대궐 바라보며 두 번 절하고 성문을 잠그니, 흉악한 적들은 방자한 이리인데 성낸 창끝으로 적들을 공격하였습니다.
 
병세(兵勢)는 크고 성하니 구름을 껴안고 조수(潮水)가 머무른듯하며, 산과 같이 누르자 약한 줄은 지탱하기가 어렵습니다. 공은 곧 온화하신 용모로 두려워하지도 놀라지도 아니하고, 기이함을 내세워 승리함은 지혜 주머니를 찬 듯합니다. 글을 주어 군중을 안심시키고 첩자를 죽이고 예기를 꺾었으며, 정예한 자를 가려 뽑아 밤을 이용하여 섬멸하였지요.
끝내 승리를 아뢰니 서쪽변방의 적들을 평정하였고, 이때 금나라에서공의 정성을 가상하게 여겼지요. 풍문을 듣고 군사를 일으켜 천리 길을 원정하니, 적의 우두머리도 떳떳함이 같아 의로운 모습으로 눈물을 뿌렸지요. 충성은 오랑캐들을 감동시켜 명성이 전국으로 내달렸고, 여러 번 왕의 총애를 입어 전도가 양양 하였습니다.
 
양반의 반열에 올라 손에는 저울(銓衡)을 쥐었으며, 나이가 70에 들어 벼슬을 사양하였습니다. 전원(田園)에서 넉넉하게 노닒은 개미가 덧없는 세상의 영화를 보는듯하며, 덕이 같은 원로들이 성대한 기영회를 만들었습니다. 땅위에 신선 있어 남극성이 밝게 비추며, 나머지의 영광 없어지지 않아 우뚝 솟음을 보고 듣습니다. 스물 고을의 선비들이 그 백성들과 더불어, 영원히 우러러서 멀리서 향기로움을 당깁니다. 모두들 말하기를 연주고을은 뽕나무의 푸름으로, 이에 묘우를 만들어 영령을 편안케 합니다.
 
명성과 절조를 상상하면 겹겹한 산처럼 드높으며, 사업을 미루러 생각하면 운수(雲水)의 넓고 깊음입니다. 이제 깨끗한 곡식을 내 놓아 공경히 살찐 희생을 드리오니, 바라오니 흠격(歆格)하시어 저희들을 도우소서. 춘추향(봄 가을로 지내는 제사)의 축문 공훈과 절조는 환하고 명성과 이름은 넘쳐나서, 백성들은 지금까지 별과 해처럼 우러러 봅니다. 이에 중정(中丁)을 맞이하여 공경히 제수를 올립니다. 의로움을 다하여 적을 물리쳐 모든 성의 백성을 살리시고, 한 지역이 덕을 품어 영원히 제사를 드립니다.
 
참의 조정만이 짓다 제문 저 높은 천등산에 원선(蜿蟺)이 충만하니, 산악의 정령(精靈)이 착함을 모아 이 같은 영웅을 탄생시켰습니다. 그 땅에서 나고 자랐으니 연주의 고을이요, 난리를 당하여 충정을 드러내어 공 세움을 미리 알았습니다. 지난날 고려 중엽에 요망한 신하가 방자하게 노략질하여, 서경(평양)을 끼고 반란하여 우리의 한 지역을 어지럽게 하였지요. 여러 고을들이 바람에 쓸리듯 호응하여 소리가 그림자를 좆듯 하니, 탄환(실탄 또는 무기)은 아주 작았으나 공은 홀로 충성심을 분발하였지요.
 
우리 고을의 사람들을 모아 대의(大義)로 창의하여, 대궐을 향해 예를 드리고 성을 온전하게 지킴으로 죽음을 맹세하였습니다. 적들은 이에 편지를 날려 우리들을 선동하고 공갈 하였지만, 공은 더욱 노기를 띠고서 첩자의 목을 베어 성에 내걸었습니다. 줄을 당겨 담위 로 올라가 네 번 싸워 네 번 이기니, 적들을 물리쳐서 세 번의 임명으로 직첩을 임명 받았습니다. 중국조정에서 급하다는 소문을 듣고 군사를 보내와 조문하였으며, 임금과 나라에서 훈공에 포상하여 단서(丹書:임금이 붉은 글씨로 공신에게 준 문서. 자손 대대로 면책의 특권이 주어짐)와 철권(鐵券:공신에게 주던 符信)을 주었습니다.
 
지난날의 낭패를 생각하면 미우기어(微禹其魚:미상)였으니, 넉넉한 공적과 위대한 절조는 고금(古今)에 뉘 같을까요? 하북의 24개성은 진향(眞鄕:미상. 인명인 듯)이 적을 토벌하고 살수(청천강) 서쪽의 수 십 개의 성은 을지문덕 장군이 물리쳤지요. 같은 바의 성공으로 남기신 빛이 세상을 비추므로, 예에는 제사가 있고 전(典:제도. 법령)에는 사보(祀報:제사의 갚음)가 있습니다.
 
공의(公議)로서 두루 물어보니 사림들이 모두 동의하여, 은은한 남악(南岳)에다 영궁(靈宮:사우 또는 묘우. 여기서는 남악사를 말함)을 만들었습니다. 저 정결한 곡식을 골라서 공을 묘당에서 받드오니, 제기(籩豆)는 정결하고 서직(黍稷:기장. 제사에 쓰임)은 향기롭습니다. 엄숙한 낭무(廊廡:제사를 드리는 집)에는 검리(劍履)가 그 가운데 있고, 산과 물은 기운을 만들어 영령(英靈)한 혼백이 흐릅니다.
아득한 길(玄逵)은 비록 멀어도 어둡지 않고 오히려 있아오니 우리 백성들은 생각하여 이에 제수를 드리는데, 대대로 끊임없이 이렇게나마 초라한 제사를 드립니다. 통훈대부 병조정랑 이시항이 짓다 지난 고려시대에 조위총이 난을 일으켜, 여러 성들이 향응(響應:소리가 그림자를 좆듯 함)함은 절령(자비령)이북입니다.
 
이때 상서공께서는 의로움으로 항거하여 격분하자, 고을의 장병들이 감격하여 이르러 비로소 성을 보호하여 성을 에워쌌습니다. 담 위에 올라가 여러 무리들에게 서약하고 대궐 향해 절하여 정성을 보였으며, 왕개미의 도움을 끊어 버리자 날로 개와 양(犬羊)들이 늘어났습니다. 궤변으로 두려움을 주자 기이한 계책으로 적의 예기를 꺾었으며, 한 고을이 힘을 입어 짐승 됨을 면하였습니다.
 
이때 임금께서 가상히 여겨 상을 주고 계속하여 총애를 받았으니, 드디어 대장군이 되고 드높이 이름난 신하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귀와 눈에 비춰져 천추(千秋)에 훤하고, 풍열(風烈:풍교와 절조)을 크게 우러러 높이 보답됨이 오히려 늦었지요. 많은 선비들이 먼저 의논하니 멀고 가까움이 한 말이라, 아름다운 새로 지은 묘우(廟宇)는 남산의 산록입니다. 나는 여기 고을살이 와서 다행히도 남기신 향기 입었으니, 묘우(棟宇)를 우러러보니 공의 모습이 방불(彷佛)합니다.
 
아! 내일 저녁까지 점대(점책)를 당겼다는 말은 듣지도 못했으며, 길이 사모하고 우러러본다는 얘기마저 않는군요. 감히 조촐한 제수를 드려 한 잔술을 올리오나 바라건대 밝으신 영령께옵선 이 작은 정성을 보옵소서. 부사 박필철이 짓다 시 정자를 새로 짓던 날은 산초나무 노(椒槳)는 올리지 못한 때라 상서공은 무사(武士)가 되어 돌아왔고 처사(處士)는 활과 키(弓箕)를 근본하였네 두 늙은이 같은 땅에 태어나서 천추(千秋)에 나란한 묘우(廟宇)를 만들었다 그대에 청하노니 나를 맞을 적엔 산과 물은 청기(淸奇)를 말해 주게나 (처사는 곧 윤송파를 말하는데 나란히 배향되었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송파의 이름은 충이며 무과에 급제하고 후에 禮學人이 되었다) 조정만 상서공이 난리를 평정한 뒤는 처사공은 군막(軍幕)을 떠났을 때라 힘들여 배움은 나물음식 드림을 기쁘게 여겼으며 맑은 이름은 기성(箕:별이름)으로 화함을 생각 하네 두 분은 나란히 임금의 총애 받고 한 몸으로 새로운 묘우에서 제사 받는구나 이렇듯 고운 장수(藏修:공부함)한 땅에 물과 돌의 기이함을 겸 하였네 승지 조명익 산과 물이 신포서(申甫)를 낳았으며 두 분의 현인은 각기 한 때라 무력과 계책은 신묘하여 적을 물리쳤으며 법도와 배움은 조상의 유업을 이어 천양 했네 사직과 더불어 돌아옴은 같은 길이요 순수(巡狩)는 마땅히 멀어 묘우와 합 한다 이 문장(시)은 이루기가 쉬워도 화려한 건물은 다시 새롭고 기이하네 이시항 순박한 바람은 날로 퇴폐하기 이미 백 여 년 크나큰 상우(尙友:자기보다 높이 벗을 사귐)는 옛 사람의 마음이라 대나무 부적 소리(蘇里)에는 내일 저녁을 한탄하고 술 따르는 성도(成都)에는 다만 하찮은 헤아림뿐 멀리서 오는 빼어난 선비는 하루살이의 가르침이 먼데 외로운 성은 적을 맞는 범의 비결은 깊구나 만일 두 분이 없었다면 나는 뉘와 더불어 할까 스스로 허여한 가슴 속은 옛과 오늘이 같은 것을 박필철 광성군 사적 공은 낭장군공의 둘째 아들이다. 휘는 이후인데 고려 명종 조4년에 선지별감 용호장군으로 임명되었다.
 
형인 상서공과 더불어 조위총의 난을 토벌함에 큰 공이 있음으로써, 경상도 안렴사가 되어 광성군으로 봉해졌다. 사적은 고려사의 상서공 열전 속에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다. 삼가 공의 관작(官爵)을 살펴보면 안렴사로 벼슬이 그쳤을 뿐만 같지 않지만, 그러나 달리 고찰 할 수 없어 경상도백의 선생 안(案)에 공의 휘가 지금까지 밝게 기재되어 있으므로, 단지 안렴사로만 기록한다. 천안의 옛 기록에 말하기를 ‘상서공은 두 분의 아우가 계시는데, 한분은 광성군이며 한분은 창녕군’이라 말하는데, 창원은 이미 회원군이므로 공은 광성군이며, 광성파는 곧 자손들이 영체하여 일일이 상세하게 기재하지 못한다.
 
회원군 사적 공은 낭장군공의 셋째 아드님이다. 휘 덕유 고려 명종 조16년 병오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뜻이 크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권신(權臣)인 최충헌을 나무랐는데 이로써 오랫동안 산지(散地:직책이 없는 한가한 벼슬)로 있다가, 후에 이부시랑 예부시랑 서경유수를 거쳐 지위가 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 대사공에 이르렀고 회원군으로 봉군되었으며 시호는 정헌이다.
기미보의 기록을 살펴보면 공의 사적은 단지 고려조 사공으로 회원군으로 봉해졌다 하였으므로, 회원은 지금 경상도 창원의 옛 이름이다. 자손들이 관향을 적을때 혹 창원으로 혹은 의창으로 적는데, 지금은 연주로 합보 하였으므로, 이것은 충분히 사적이 되지 못한다. 공의 후손인 수단유사 경하가 공의 사적과 아래 몇 대의 사적을 몇몇 곳에서 수집하여 (서로 대조한 결과)서로 꼭 맞아 어김이 없어 이것이 확실한 것으로 여겨져 이와 같이 기재하며, 공의 아래 몇 대의 직함과 사적은 각기 곁에다 주석으로 기록한다.
 
기미보 서문 겨레가 족보를 둠은 오래 되었다. 우리나라의 거족(巨族)들은 하나의 성이었지만 가지가 나뉘고 파가 갈라져 각기 스스로 관향을 두고서 족보 만듦은, 진실로 주례(周禮) 씨족의 예에 어긋남은 아니다. 만일 하나의 족보 가운데 따로 붙임(別付)은 내 일찍이 빠뜨린 곳이 있음에도 근거 할 데가 없음을 병폐로 여긴다. 이제 연주 현씨의 겨레들은 새로 족보를 만들고 그것으로 조상을 높이며 그 근본을 중하게 하는 뜻일지니 어찌 좋지 않겠는가?
지난날 족보를 만드는 논의 시작에 즈음하여 그 세 본관의 계통 나뉨에서 같은 일족들의 의견이 둘로 나뉨에 이르자 이도암 윤구암 두 분 현인에게 질의하여 그 잘못됨을 바로잡아 영종(조)조 정묘년에 족보를 편집하고 완성하였지만, 그러나 능히 다 두 현인의 논의에 의거하지 못하여 심히 아는 자들(識者)들의 의심하고 한탄하는 바가 되었다. 근래 (족보를)다시 닦자는 의논에 대하여 일족들의 의견이 같아 상서공의 20대손인 진사 진곤이 주장하여 일을 마치고, 이제 진상씨가 멀리서 오셔서 나에게 서문을 요청하였다.
 
그윽이 (족보 제작에)정한 예규를 생각해보면, 이미 도암공의 설을 좆았고 서문 역시 구암공의 글이 있으므로, 미천하고 누추한 내가 어이 쓸데없는 말을 하겠는가? 아! 사람이 계보(系譜)를 밝힘은 언제나 일족을 거둠으로써 풍속을 두텁게 하며 충의(忠義)를 세움으로써 조정을 이익 되게 하는 까닭일지니, 이 족보의 완성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한다면 뉘 계보(系譜)에 밝지 않겠는가? 세 관향이 각자 그 겨레를 좆아 책을 나누고 파가 나뉘어도 끝내는 근원이 본래 성씨에서 만나지리니, 그 씨족의 구별됨은 또한 분명할 것이다. 여기에 족보한 사람들은 나는 그 효도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유연히 생김이 반드시 소씨(소동파의 아버지인 소순. 이분이 족보 서문을 만들었음)의 설(說)과 같음을 아노라.
 
선대의 몇 세대 사이에 비록 작질(爵秩:벼슬의 차례. 즉 직급)과 훈업(勳業:공적과 업적)의 빛남은 없다 해도, 실제로 문장가와 절의(節義)가 높고 위대한 이가 없지는 않았으니, 즉 희암공의 청명(淸名)과 곧은 도(直道). 관봉공의 깊은 학문과 아름다운 행실은 마땅히 일족과 후손들이 외워 사모하고 두텁게 지켜야 하리라. 지금 이 족보를 보는 사람들은 어찌 근대의 부진(不進:현달하거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함)함을 이유로 위축됨이 옳겠는가?
이제부터 무릇 장군공의 후손되는 자들은 비록 흩어져 삶이 멀다 해도 그 친애하는 바가 두터움은 각 족보에서 보여지며 시대 또한 스스로 때가 있으므로, 해마다 하는 화수의 모임이면 어찌 서로 척려(惕勵:근심하고 힘씀)하여 더욱 돈목(敦睦:두텁고 회목함)을 닦지 않겠는가? 나의 이 말이야말로 여러분들이 나에게 서문을 요청하는 뜻이 아니겠는가?
 
숭정 기원후 세 번째 기미년 7월 상순에 덕은 송환기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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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진보 서문
 
주역 동인(同人:주역의 괘이름. 화합하고 협력하면 곤란을 극복한다는 뜻)의 상전(象傳:괘의 각 효마다 그 모양을 보고 뜻을 풀이한 글)에 말하기를 ‘군자는 겨레를 분류함으로 사물(또는 다른 사람)을 분별 한다’고 하였으며, 동인괘의 겨레를 분류함으로 사물(또는 타인)을 분류함은 비괘(괘 이름:위에는 하늘이요 아래는 땅으로 하늘과 땅이 서로 막혀 통하지 않는다는 뜻)의 끝이며 대유(괘이름. 위에는 물이요 아래엔 하늘로 성대하고 많음을 의미)의 시작으로 ‘작으면서 사물을 구분하며, 7일 만에 다시 온다’는 것이다. 대저 그 성명을 경위(經緯)하고 그 소목(昭穆)을 규율함은 한 종족의 근원을 이끌고 9족(九族)의 총괄하여 다스림을 이끎으로, 이것이 인륜의 근본이며 족보를 만드는 까닭이다. 주례(周禮) 소사씨(小史氏:주대 성씨의 계통을 관장하는 벼슬아치)의 직분은 상하의 세계(世系:세대의 계통)를 관장하여 종법(宗法)으로 천하를 계속(繫屬:묶어서 소속시킴)하기 때문이니, 창거(蒼姖)의 높음은 사람들이 이 뜻을 알아서 능히 그 선조의 아름다움을 잇고 그 가업(家業)을 보존하고 지켜 굳세게 예교(禮敎)의 가운데서 감히 방자하지 않음이니, 이것이야말로 세상의 법도를 유지하는 기본이다. 진한(秦漢:중국 고대의 진나라와 한나라)이후로 성씨를 구별하고 계통을 정하는 곳이 없어 종법(宗法)이 드디어 없어지고, 한갓 헛된 문장을 숭상하여 오직 귀현(貴顯:신분이 고귀하고 벼슬이 현달함)함과 벌열(閥閱:집안이 넓고 유명한 가문)만을 숭상하였기 때문에, 문장을 숭상하는 폐단은 벼슬을 숭상함에 이르고, 벼슬을 숭상하는 폐단은 성씨를 숭상함에 이르렀으며, 성씨를 숭상하는 폐단은 사기(거짓)를 숭상함에 이르러 대대로 그 폐단을 이어받아 그것이 폐단 됨을 알지 못한다.
정자(程子:중국 송나라 초기의 성리학자인 이천 정이)가 비로소 족보의 계통을 밝힘이 종족(일족)을 거두는 요체라 말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 근본을 잊지 않게 하여 다시 서로 몸을 바꾸어 골육의 정을 언제나 서로 흐르게 함이야 말로 천하의 인심을 통섭(統攝)하는 까닭이다.
연주 현씨는 우리나라의 이름난 겨레로 고려로부터 조선에 들어와 대대로 명망이 있으니, 예컨대 장군공의 진실로 의병들을 격려하고 충성으로 교활한 오랑캐를 감동시킴과, 상서공 형제분의 교활한 적들을 토벌하고 평정하여 공적이 깃발(泰常)에 드러남과, 판관공의 의거순국(義擧殉國), 희암공의 벼슬을 사양하고 은둔함, 관봉 불능와 두 분의 연원(淵源)과 정학(正學)으로 삼벽(三碧)의 절개를 이어 받아 여덟 선비의 반열에 듦과, 백암 이암공의 서북지방에서 분기(奮起)하여 능히 스스로 수립함은 예와 오늘의 외어 사모하고 아버지의 유업 이음을 후손들이 지칭하는 바가 됨은, 이는 이른바 ‘선비는 예전 덕(선조의 덕)의 이름과 성씨를 먹고, 농부는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유산인 전답을 물려받는다’가 아니랴?
족보는 비로소 정묘년에 시작되어 재차 기미년에 닦고 세 번째 갑진년에 닦아, 판서공의 후손인 진정 상순이 나에게 서문을 청하기에 나는 누차 병환과 글재주 없음을 이유로 사양하였지만, 그 간절함이 더욱 집요하기에, 돌아보면 능히 글을 잘 하지는 못해도 간략하게 주례(周禮)의 성법(成法 )과 하남(河南:이천 정이)의 정훈(正訓)을 열거하여 외우고, 근원에서 만나고 뿌리로 돌아간다는 논설과 조상을 높이고 일족을 공경한다는 도에 대해서는 이미 도암 병계 성담 세분 현인들의 글에 갖추어 있으므로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겠다. 인하여 현씨 후손들에게 말해주기를 ‘족보를 보고 선조의 착함(좋음)을 본받으며 그 시와 예(詩禮)의 진전(眞傳:전하는 참된 뜻)을 좆는다면 군자가 되며 가히 아름다우리. 대저 군자이면서 녹과 지위(祿位)가 없고 겨레가 비록 쇠잔해도 오히려 성대함은 있다.
녹과 지위가 드러나고 영화로운데도 군자라 일컬어지지 않을 수 있고, 겨레가 비록 성하다 해도 오히려 쇠잔해지니 성쇠(盛衰)는 선악(仙樂)에 말미암는다. 세속적으로 오의(烏衣)와 청상(靑箱)을 빌어 세상의 벌열들에게 자랑하지 말고 오직 서로가 닦고 서로가 힘쓰게나. 착한 일 하기를 즐기고 공부하기 좋아하여 충성과 믿음으로 근본을 삼고 효도와 공경을 근본으로 하여 어짊을 행해야 하리라.
어짊과 사양함이 한 나라에서 흥한다면 현씨의 일족들이 환하게 후세에 빛남이 어찌 여기에서 시초됨을 알겠는가? 주역의 ’복이 온다‘는 이치가 여기에서 가히 현씨에게 징험함이라. 공경히 생각할 지어다. 숭정 기원후 네 번째 갑진년에 외손인 당성 홍직필이 서문함 갑진보 지(識) 우리 현씨의 족본는 정묘년에 처음 만들고 기미년에 두 번째 닦았지만, 기미보에는 오류가 많아 아는 자들의 한스럽게 여김이 오래 되었다. 지난 경자년 봄 개성의 일가인 경하씨가 멀리서 나를 찾아와 수인사를 마친 후에 말하기를 ‘30년을 1세(世)로 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족보를 닦는 기간을 30년을 한계로 하는데, 기미년에 족보를 닦아 이미 30년이 지났으니 일가께서는 다시 족보 닦음에 생각이 없으신지요?’ 하여 내가 말하기를 ‘뜻을 둔지 이미 10년이 가깝지만 임계(壬癸)후로부터 연달아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삶을 도모할 겨를도 없어 뜻을 이루지 못 하였습니다’라 하니 (경하씨가)말 하기를 ‘흉년이 거듭되면 또한 반드시 여러 해 풍년이 드는데, 작년부터 조금씩 나아져 풍년을 조짐 하므로 이때야 말로 가히 할만하지요’ (내가 다시)말하기를 ‘때는 가히 할만해도 수단을 할 사람이 없으니 어이 하리오?’
(경하씨가)말하기를 ‘내 능히 혼자서 수단을 하리다’ (그래서 내가 다시)말하기를 ‘전국이 지극히 넓어 행비(行費)도 적잖을 터인데 처음부터 다소간의(행비를) 변출 할 방법이 없으니 어이 하리오?’하니 (경하씨가)말하기를 ‘만약 족보 닦음을 결정만 한다면 나는 거지 행세도 싫어하지 않을 것 이오’ 하여 (내가)말하기를 ‘진실로 그렇다면 일은 이미 다 결정 되었습니다’라 하고서 드디어 족보를 닦는다는 통문을 만들어 경하씨에게 보냈다.
앞 뒤 4년에 과연 능히 전국의 족보의 단자를 거두어 왔으니, 그 정성과 그 노력을 글로서는 다 말하지 못한다. 임인년 봄 형님께서 돈 수 십 꿰미를 내 놓으셔서 먼저 문방구를 구입하고 나로 하여금 족보 단자가 먼저 들어온 것에 대해서 교수(校讎:교정)를 보게 하셨다. 그해 가을에 또 근 100금(金)의 돈을 내놓아 활자와 잡다한 물건들을 구입하였고, 계묘년 여름에 100 여 금의 돈을 빌려주시기에 종이를 사고 정촌(亭村:마을 이름)에다 보청(譜廳 : 족보를 발간하는 주된 장소)을 만들어 가을부터 출간하여 그 이듬해인 갑진년 9월에 작업을 완료하였지만, 형님께서는 이미 5월에 돌아가셨으니 애통하도다. 이보다 먼저 나는 일가들과 경하씨와 더불어 서로 의논하여 거리(지방)의 멀고 가까움을 헤아리지 말고 일가 가운데 교정을 맡을 만한 사람 몇 사람을 지정하고 나는 강령(綱領)을 총재(摠裁)하고자 하였지만, 이미 거리가 먼 사람은 먼 것으로 사양하고 가까운 사람들은 혹 유고(有故)가 있거나 혹은 병들어 죽었거나하여 한 사람도 교정할만한 사람이 없어 나는 이에 부득이하게 몸소 교정을 보게 되었지만, 평소 견식도 없어 지방(鄕曲)에서 고려사에는 없는 야사(野史)와 만성의 원류(萬姓譜) 등 책을 널리 구하였지만, 무엇으로 선조의 사적을 고찰하여 감추어진 덕을 드러낸단 말인가? 그러나 여러 일가들의 기록 한 바의 고적(古蹟)을 채집하고 각처의 족보 단자의 다르고 같은 바를 참고하여 간략하게 선조들의 사적의 누락됨을 보완하였으니, 원컨대 밝지 못한 책임을 물을진대 이는 내가 눈으로 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 오히려 상세하지 못한 혐의가 있을 것이다. 보규(譜規:족보를 만드는데 필요한 규칙)는 한결 같이 옛 족보를 따랐으며, 간혹 망녕 되게 더하거나 뺀 것이 있으니 범례가 상세하므로 보기에 다 갖추었다. 전객령 좌찬성공 양대 휘 자를 빈칸으로 둔 것은 홍산림에게 질의하여 휘를 바른 칸에 써 두었고, 판서공께서 조선조에 들어와 벼슬하심은 일가인 성천씨가 베껴온 이씨와 조씨 두 집안의 행장(先狀)을 참고하고 근거하고 이에 변의(辨疑:의심스러움을 밝히다는 뜻)를 범례의 끝에 붙였으며, 각파의 12세 세파도(世派圖)를 만들어 그 왼쪽에 붙였고, 관북파 중계(中系:중간 계파)의 지난날 두개파로 나뉜 것은 소목(昭穆:조상들의 위차)이 섞이고 어지러워 가히 이상하므로, 지금은 합해서 하나의 파로 하였다.
또 지난번 족보의 증록(증보판)의 중계(中系)는 지난번 족보에는 이름이 없던 것을 한대(一代)가 더해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옛 족보에 의거하여 삭제하였다. 각 수단(收單)에 기록 된 태어난 해와 죽은 해는 그 위에 명나라의 연호와 우리나라 열성조의 묘호(廟號)를 써서 언제 몇 살로 돌아 가셨다는 알게 하여 비록 먼 세대라 하더라도 그 생졸(生卒)을 고찰하여 그 년도를 추기(追記)하도록 하였다.
무릇 모든 일족들은 비록 대단히 소원(疎遠)한 사람일지라도 한결같이 나와 같이 생각하여 조금이라도 상세하고 간략한 차이가 없이 마음을 다하여 지극히 공정하게 하였으되, 다만 나이가 이미 쇠약하고 늙어 정신이 없어 상상컨대 혹 빠뜨리거나 잘 못된 곳이 있을 것이니, 예를 들면 문자가 혹 거꾸로 되기도 하며 혹은 빠뜨리거나 서로 비슷한 것이 잘못 쓰여 지거나하는 경우는 모두다 나의 어둡고 나이든 소치인 것만은 아니며, 정서(正書)와 출판하는 사람들의 잘못함에서 기인한 것이 많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너그럽게 용서하심이 가할 것이다.
대저 족보라 함은 조상을 높이고 근본을 소중히 함으로써 일족을 돈독하게 하고 풍속을 두텁게 하는 까닭이므로, 또한 보고 느껴서 흥기(興起)함이 많이 있을 것이다. 예컨대 상서공 부자분의 창의하여 적을 섬멸함과 돈을 던져 부처에세 시주함이라든지, 판서공 부자분의 고향으로 물러나 후진 양성과 벼슬에 나아가 공명함을 즐겨하지 않으심이라든지, 판관공의 순국 정충(殉國貞忠)과 시신을 묻음으로 적을 감동시킴이라든지, 희암공의 문장과 높은 절개라든지, 관봉공의 연원정학(淵源正學)이라든지, 죽림정과 삼벽당의 대대로 전해지는 시례(詩禮)와 명저(名著)라든지, 호남 백암공과 이암공의 깊은 학문과 아름다운 행실로 먼 지방을 진작(振作)함 같음은, 곧 본손 되는 사람과 일족이 되는 사람들이 존경하고 사모하여 본보기로 삼는다면, 높이 되면 가히 군자가 될 것이요 낮게 되어도 아름다운 이름을 잃어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현씨의 가문이 어이 창대하지 않겠는가? 또한 우리 일족들이 전국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이 만약 이 족보가 아니라면 가히 어느 곳에 사는지도 모르겠지만, 이제 족보 만드는 일로 인해 거리는 대단히 멀어도 편지가 서로 통하며, 얼굴은 서로 잘 몰라도 마음은 멀리서 합해지니, 족보의 단자를 한번 보면 살고 있는 고을과 호구(戶口)의 많고 적음을 모두 알 수 있다.
각 처의 유사들이 서로 왕래하는 사이에 기쁘게 서로 만나서 일가의 정의(情誼)를 서로 말하면서, 고을의 풍속을 묻고 슬프게 이별하면서 먼 길 갊을 위로하면서 훗날을 기약한다면, 이에 은근한 정성과 돈목(敦睦)한 마음이 유연하게 스스로 생겨날 터이니, 족보가 어이 성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힘쓰고 힘쓸지어다.
지금의 소년들이 다음의 후손들에 있어 선조와 선배들의 아름다운 덕과 착한 행동을 마땅히 사모하여 우리의 문중을 창대할 것을 생각한다면, 또한 훗날 노력과 비용 씀을 꺼리지 않고 계승하여 족보를 만드리라. 대개 우리들의 족보가 오늘 세 번째 닦음에는 실로 이는 경하씨가 맨 먼저 의논 한 것이라. 만일 경하씨가 아니었다면 전국의 일족의 단자와 돈(경비)을 가히 거두지 못했으리라.
그 외의 구획(區劃)과 방책(方策)으로 도운 자들은 자못 많다. 강령을 총괄하여 관리하고 추기(樞機)를 관장하며 문자를 증산(增刪:더하고 뺌)하여 족보를 완성한 경우는 내가 맡았지만, 먼 지방에 살면서도 정성을 다해 족보 만듦에 도운 이는 개천의 응수씨며 마음속이 기쁜 자는 박천의 종억씨이다.
지금 임금님 재위 10년 갑진년 9월 상순에 시랑공의 21대손인 진정이 공경히 와동 정사에서 기록하다 부록-변의(의심나는 부분을 밝히다) 전객령공 이하 3대의 관한변의 삼가 용궁과 천안의 옛 기록을 살펴보면 장군공의 4세손인 휘 경여의 관함(官銜)에 이르기를 전객령. 한편으로 우참찬이라 말한다.
5세손 휘 금 관함은 좌참찬이라 하고 한편으로 좌찬성이라 한다. 6세손 휘 치룡 관함은 도첨의시사라 하고 한편으로 영의정이라 말한다. 세분 모두 고려조의 인물인데 참찬과 찬성은 고려조의 관작명칭이 아니기 때문에 옛 기록의 논의(論疑:의심스런 부분을 논의함)하였고, 영의정 또한 고려조의 관명이 아니니, 애초부터 논의가 없었다. 그러나 다른 옛 사적을 보면 첨의공의 아들인 휘 옥량은 조선조에 들어와 행 판전의시사이며 그의 고귀함으로 인해 (위로)세 어른이 조선의 관작으로 추증되었다. 이는 밝디 밝은 증안(證案)이 있으니 퇴계의 그 5대조 송안군의 행장에 밝히기를 ‘고려시대의 급제로 조선에 들어와 판의시사를 벼슬하였거, 그의 고귀해짐으로써 그 선대 3대가 추증되었다’라 하였으니, 우리의 선조이신 전의공과 이 송안군은 같은 조정의 같은 관작이며, 추증된 벼슬 역시 같다. 무릇 추증의 예로는 그 아비로부터 증조에 이르기까지 세대에 한 계급씩 감해진다. 세분어른의 벼슬의 계급이 1세에 1계급이 감해짐은 추증의 예와 서로 부합되며, 또한 그 관함이 모두 조선시대의 관함이라 가히 조선시대에 추증됨을 알 수 있다.
판전의공의 이조에 벼슬한 변의 천안 용궁의 예전 족보(家乘) 기록에 장군공의 7대손 휘 옥량의 관함에 통헌대부 판전의시사라 되어 있는데, 조선 초에 이 관직을 설치하여 오래잖아 폐지하였다.
그러므로 선배들은 차마 고려조의 관직으로 하지 못하고 옛 족보의 곁의 주석에 말하기를 ‘고려의 관제로는 재상의 예이며 판사를 겸 한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전의공의 외삼촌인 조판서의 사적에 말하기를 ‘고려 공민왕23년 갑인년에 전시(殿試)에 합격하여 공양왕조에 사관이 되었으며 조선 태조 조에 벼슬이 예의판서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공은 조공의 사위가 되므로 나이는 필시 조공보다 적을 것이며 벼슬도 반드시 조선에서 하였을 것이다. 또한 퇴계 이 선생께서 그의 5대조이신 송안군의 행장에 말하기를 ‘고려시대에 급제하여 조선조에 들어와 벼슬이 통헌대부 판전의시사에 이르렀고, 그의 고귀해짐으로 인하여 그의 선대 3대가 추증되다’라고 하니, 판전의는 이에 조선초기의 관직이며 공과 송안군과는 서로 번갈아 관직을 받았다. 송안군은 그의 고귀함으로 인해 3대가 추증되었으니, 공의 3대의 관함도 모두 조선시대의 관명이며 또한 이러한 공의 고귀함으로 인하여 조선으로부터 추증된 것이다. 또한 조선 초기는 나라의 전례(典禮)와 조저(朝著)의 의절(儀節)이 지극히 중차대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미예의판서를 설치하고 또 특별히 판전의시사를 설치하였고, 판전의와 예판은 같은 품계이며 극히 사람들이 뽑히기를 바란 높은 벼슬이었다. 그 후에 (그 관직을)파하고 전의의 관작을 제수함은 그 관청을 만든 곳으로 인하여 전의방이라 불렀다고 하니, 이 또한 충분히 조선의 판전의라는 관명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좌찬성공 휘의 변의 삼가 옛 기록을 살펴보면 천안 옛 기록의 봉산의 집안 족보 길주파의 단자에는 모두 공의 휘를 ‘금’자로 되어 있지만, 홀로 개천에 살고 있는 후손 집에서는 공의 손자인 휘 ‘환’이 있다. 성화19년 호적에는 공의 휘를 ‘비’자로 되어 있어 이는 가히 믿을 만한 문적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그 호적 가운데 공의 아들인 휘 ‘계룡’은 ‘계(繼)’자는 빠지고 다만 ‘용’자만 씌어져 있다. 공의 손자인 휘 ‘호용’은 ‘호’자를 ‘활’자로 쓰여 잘못됨이 이와 같아 가히 믿지 못한다 말들 한다. 이로부터 후손들은 모두 공의 휘가 ‘금’자가 옳고 ‘비’자가 그른 줄 아는데, 이제 전국의 족보 단자를 살펴보니 모두 옛 족보를 좆아 공의 휘를 ‘금’자로 써 놓았는데, 그러나 개천과 박천의 파보에는 오히려 지난날의 호적을 답습하여 공의 휘를 ‘비’자로 해 놓았으니 대단히 옳지 못하다. 어이하여 여러 곳의 서로 부합되는 문적을 믿지 않고 편벽되게 지난날 오류가 많은 호적을 믿는단 말인가? 또한 공의 항렬을 따른 이름인 ‘박’자는 가히 ‘뫼산 변’을 좆아 이름 지음을 증명하기 때문에 지금은 보첩의 바른 항렬로 공의 휘를 써서 이 변의를 지어 범례의 아래에다 붙이노니, 지금 이후로부터 개천과 박천의 일족들은 단연코 공의 휘가 ‘금’자임을 믿어야 할 것이다. 신축보 서문 내가 ○루직당후략(○屢直堂后略:미상)과 서관(西關:관서지방) 조사(朝士:조정의 선비 또는 선비)들의 사변기(事變記)의 주석(註釋)을 풀면서 연주 현씨의 선덕(先德)에 대하여 대단히 상세하게 들어 왔으니, 굴지(屈指)의 세월 근 50년에 이윽고 땅을 피하여 남쪽으로 내려와 견문이 쉽지 않고 왕래함이 서로 어긋나 막연함이 마치 궁벽함이 태양을 가린 듯 하였다. 한 사람의 선비(儒生)가 있어 옛 모습에 옛 옷을 입고 한가하게 문으로 들어오기에 재빨리 맞이하여 앉히고서 물어보니 현은 그의 성이요 익동은 그의 이름이요 덕화는 그의 자이며 사는 곳은 천안이란다. 천안과 정산과의 거리가 90리로 가깝다. 그가 온 까닭을 물었더니 ‘우리 집안이 바야흐로 족보를 만드는데 청컨대 서문을 지어 달라’는 것이었다. 아! 조상을 높이고 일족을 공경함은 일족을 거두어 화목을 꾀함이지만 가문의 족보의 뜻을 살펴보면 그러나 세대가 후대로 내려갈수록 거짓이 날로 자라고 그 사실에 부합되지 않으며 껍데기만 꾸며 그것으로 참과 거짓 사악함과 바름을 하나의 색으로 만듦에 이르러, 집안에는 믿을 만한 족보가 없고 나라에는 믿을 만한 역사가 없으니, 이 일은 세도(世道)의 흥망(汗隆)과 풍속의 성쇠(盛衰)에 대단히 중요하게 관계된다. 어두우면 귀신의 죽임이 있고 밝다면 사람의 꾸지람이 있어도 혹시라도 깨닫지 못함을 나는 일찍이 병통으로 여긴다.
이제 연주 현씨는 그렇지 않다. 의심되면 의심됨으로 전하고 믿을만하면 믿음으로 전하여 차라리 역사에 모르는 부분은 빼놓을지언정 감히 그 선대의 사적을 속이지는 않는다. 대방(大方)에 질의하고 두루 종의(宗議)를 채집하여 시조를 따라 관향을 바꾸고 분파를 통합하여 하나의 족보를 만드니, 이는 실로 선조를 사모하고 근본을 잊지 않는 뜻이며, 또한 일족을 거두고 풍속을 두텁게 하는 도이다.
지금부터는 우애와 화목 하는 정의(情誼)가 생겨나며 가깝고 사랑하는 정이 두터워 지리라. 비록 백세(百世)후라 하더라도 거의 승술(承述 : 조상들의 뜻을 이어 맏듦)에 가려짐이 없음을 면하리니 어디에 쓸데없는 말을 하겠는가? 다만 한마디의 할 말이 있으니 선조의 덕을 떨어뜨리지 말고 자손들이 이 마음을 두어야 하리라.
그러나 한갓 족보로 전 할 줄만 알지 마음으로 전 할줄 모르는 사람은 곳곳마다 다 이런 사람이다.
 
현씨의 선대에 장군공 같은 분은 상서공 형제와 더불어 공이 종묘(宗廟)에 있어 은혜를 백성들에게 준 것은 말할 것도 없으며, 조선 이래 판관공의 의거순직(義擧殉職)함과 희암공의 벼슬을 그만두고 은둔함과 관봉과 불능와의 연원정학(淵源正學)과 백암 이암공의 분기수립(奮起樹立)은 비록 그 감춤과 드러냄의 방법은 달라도 이른바 현씨 됨에 일치함은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그 마음으로 모든 현씨들이 집에 있는 사람은 집에 있는 데로 세상에 쓰이는 자는 세상에 쓰이는 까닭을 생각한다면, 이것이 바로 선조의 덕을 떨어뜨리지 않는 제일의 뜻일 것이다. 현씨들은 힘쓸지어다. 드디어 이것을 써서 돌려보냈다. 신축년 월성 최익현이 서문하다 신축보의 소지(小識) 물은 온갖 물줄기로 나뉘어도 그 흐름을 거슬러 가면 하나의 근원이요, 나무가 수많은 가지와 잎의 다름이 있어도 그 근본을 구하면 같인 뿌리이듯 우리 현씨 또한 시랑공에 있어서는 물이 근원에서와 나무가 뿌리에서와 같은 것이다.
 
고려 중엽으로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1000여 년 동안 자손들이 번창하여 가지가 나뉘고 파가 구분되어 전국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이 그 수효를 헤아리지 못하는데, 이것이 어찌 물의 근원이 깊으니 흐름이 길고 나무의 뿌리가 견고하니 가지와 잎의 무성해짐이 아니랴? 그러나 근원에서 만나고 뿌리로 돌아가는 길은 족보를 닦음에 있어 족보라는 책됨은 선조를 높이고 일족을 거두며 소목(昭穆)을 차례 함이니, 효도와 공경이 관건(關鍵)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정묘년에 처음 족보를 만들고 기미년에 두 번째 만들고 갑진년에 세 번째로 만들었으며, 갑진년이 지금부터 50년이 되었는데도 오히려 족보를 만들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因循) 또 몇 년을 보내버렸으니, 장차 무엇으로 선대의 소목(昭穆)을 고찰하고 선조의 행적을 찬양한단 말인가? 아! 나의 선친께서는 이를 이유로 지난 임오년에 족보 만듦을 창의(倡義)하시어 전국에 통문을 보내어 각 파별로 족보의 단자를 수합하여 비로소 인쇄를 하려는데, 마침 나라에 일이 많아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세상을 떠났으니, 아! 애통한지고. 내 비록 어질지 못해도 아비가 하신 일을 아들이 이어가는 뜻으로 다시 족보 닦는 일을 의논하였지만 단자를 거둘 사람이 없어 대단히 한이 되었는데, 족숙이신 영조씨가 말씀하시기를 ‘만약 족보 닦음을 결의만 한다면 내 능히 혼자서 단자를 거두리라’고 하시자 내 말하기를 ‘전국이 지극히 넓은데 어찌 가히 이렇게 어렵고 큰일을 혼자서 맡는단 말입니까?’라 하고서 이에 족보 닦는 일에 대하여 통문을 만들어 보내고 짧은 지팡이와 행장을 꾸려 전국을 산 넘고 물을 건너 처음에서 끝까지 3년 동안 전국의 단자를 거두어 돌아 왔으니, 효도를 생각함과 그 정성된 힘의 다함을 글로서는 말을 다하지 못하겠다.
지금 임금님의 재위 38년인 신축년 봄 정월에 비로소 연주(寧州)에다 보소(譜所)를 차렸는데 동네가 공교롭게도 큰 흉년을 만나 쓰인 비용이 몇 곱이 되어 실로 완성하기 어려웠지만, 같은 해 초가을에 책의 편집을 완성하였다. 교정의 책임은 곧 영주 영곤 재성이 마음과 정신의 자세하고 치밀함으로 한결 같이 전번 족보의 예규를 따랐지만, 얇은 지식과 어두운 눈이기에 빠뜨리고 간략한 곳들이 또한 많을 테지만, 정서(正書)와 인쇄의 잘못 된 바에 연유한 것이다.
 
대개 이 족보는 조상을 높이고 근본을 소중히 여기며 일족을 거두고 풍속을 두텁게 함을 뜻으로 삼았으니, 또한 보고 느낌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으리라. 예를 들면 장군공의 정성으로 의병들을 격려하고 충성으로 교활한 오랑캐를 감동시킴과 상서공 형제분의 교활한 적들을 평정하여 공이 깃발(太常)에 드러남 이라든지, 판관공의 의거순국(義擧殉國)이라든지, 희암공의 벼슬을 사양하고 은둔함이라든지, 관봉공의 연원정학(淵源正學)이라든지, 죽림정 삼벽당의 시와 예를 대대로 전함이라든지, 백암과 이암공의 깊은 학문과 아름다운 행실 등이 책머리에 밝게 등재되어 있으니 (이 족보를)존각(尊閣 : 높다란 누각)위에 보배처럼 갈무리하여 삼가 존경하고 사모하는 모양으로 감상하며 그것으로 선조들의 발자취를 접한다면, 대대로 아름답게 빛나 장차 우리나라의 훌륭한 겨레가 될 터이니, 이 족보를 계술(繼述:대를 이어서 지음)하여 그 물의 하나의 근원과 나무의 같은 뿌리의 뜻을 잃지 않을 것이니, 무릇 후손되는 사람들은 힘쓸 지어다. 족보가 완성되던 날 그윽이 선친의 (족보 닦음에)뜻은 두었지만 이루지 못함에 대하여 느낌이 있기에, 이에 황폐하고 거친 말을 엮어 책의 끝에다 붙이노라. 신축년 9월 하순에 판관공의 후손인 익동이 삼가 기록하다 延州玄氏諱禹錫墓碣銘(原文) 公姓玄諱禹錫延州人配密陽朴氏合窆 공성현휘우석연주인배밀양박씨합폄 始祖諱覃胤高麗明宗朝門下侍郞平章事十八世孫也 시조휘담윤고려명종조문하시랑평장사십팔세손야 十七世孫諱哲遠以上職牒實蹟屢經兵燹一無可證顧諸雲仍歎焉莫甚 십칠세손휘철원이상직첩실적누경병선일무가징고제운잉탄언막심 墓在河陽邑北城隍山酉坐之原 묘재하양읍북성황산유좌지원 生三男長諱德老次德補次德裕 생삼남장휘덕로차덕보차덕유 德裕生二男長諱漢○生二男璡夏璋夏 덕유생이남장휘한○생이남진하장하 次諱漢壽生五男圭夏琪夏瑜夏도( )夏璟夏 차휘한수생오남규하기하유하도 하경하 事巨力綿有志靡遑 사거역면유지미황 日冑孫○林欲竪墓隧之碣以圖不朽之銘齎誠所在余不獲辭 일주손○림욕수묘수지갈이도불후지명제성소재여불획사 敢闕世系之疏略玆記派系之昭明云爾 감궐세계지소략자기파계지소명운이 隆熙三年一月十五日慶州崔在奎謹記 八世孫琦燮謹書 융희삼년일월십오일경주최재규근기 팔세손기섭근서 八世孫仲燮震燮○燮 팔세손중섭진섭○섭 九世孫○○ 구세손○○ 門長七世孫斗坤斗七 문장칠세손두곤두칠 掌財參奉斗應 장재참봉두응 監○斗○ 감○두○ 연주현씨 휘 우석의 묘갈명(번역문) 공의 성은 현씨 휘(죽은 사람의 이름)는 우석으로 (본관이)연주이며 배우자는 밀양박씨로 같은 무덤에 합장하였다. 시조 휘 담윤 고려 명종조 문하시랑평장사 공의 18세 손이시며, (시조공의)17세손이신 휘 철원 이상은 직첩(직급과 직위)과 실제적인 업적이 여러 차례 전쟁을 겪음으로써 가히 증명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 다만 모든 후손들의 탄식함이 막심하다. (휘 우석의)묘소는 하양읍 북쪽 성황산 유좌의 언덕에 있다. 세분의 아드님을 두었으니 맏이는 덕로 둘째는 덕보 셋째는 덕유이며 덕유는 두 분의 아드님을 두었으니 맏이는 한○으로 두 분의 아드님을 두어 진하와 장하이다.
둘째는 휘가 한수로 다섯 분의 아드님을 두었으니 규하 기하 유하 도하 경하이다. 일은 크고 힘은 약하며 (비석을 놓고자 하는)뜻은 있어도 겨를이 없었는데, 어느 날 주손 되는 ○림씨가 무덤길에 비석을 놓아 그것으로 영원한 새김글로 삼고자(나에게 비석 글을 청하는)정성이 지극하여 나는 차마 글재주 없음을 이유로 끝내 사양하지 못했다.
이에 감히 세계(世系:세대간의 계통)의 소략(疏略)한 부분은 빼 버리고 이에 그 밝은(분명하게 드러난 것)것만 기록한 말할 뿐이다. 융희3년(서기1909년)1월 15일에 경주 최재규가 삼가 기록하고 8세손인 기섭이 삼가 글씨를 쓰다 8세손 중섭 진섭 ○섭 9세손 ○○ 문장(문중최고어른) 7세손 두곤 두칠 장재(재무담당) 참봉 두응 감○ 는 두○ 2009년 6월 3일 나주인(羅州人) 정재진(丁再鎭)이 풀어 씀 가 첩(家 牒) 가첩이란 직계(直系) 본 손으로 구성된 겨레 계통을 적은 것이다. 옛날 대단위 족보는 구입비용이 만만치가 않아,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손수 족보에서 직계만을 추려 책으로 만드는데 그것을 가첩이라 이른다.
도광(道光)21년 7월 27일에 재차 정리(重修)함 연주 현씨 가보(家譜) 시조 현담윤 공은 본래 연주사람이다. 연주는 곧 평안도 영변의 옛 이름이다. 고려 명종조에 도령장군으로 임명되었으며, 다른 판본(一本)에서는 문하시중평장사라 한다. 평양에 있는 현두채의 집안에 기록 된 바는 ‘진(晋)나라 대중(大中)4년에 시중윤인 현안(玄安)의 후예라 하므로, 그것을 기록하여 전의(傳疑 : 의심스러운 부분을 후대에 전함)를 준비한다. 2세 덕 수 송나라 순희 원년 고려 명종조4년 갑오 장군공(현담윤)과 더불어 창의하여, 조위총의 난을 토벌함에 큰 공적이 있어 병부상서로 임명되고 성산부원군으로 봉해졌다. 아들인 원열의 묘소가 옛 연산의 신풍리에 있었으나 좌향(坐向)과 언덕을 잃어버렸다. 이 후 고려조에 이르러 경상도 안렴사로 임명되다.
 
삼가 공을 살펴보면 관작(官爵)이 여기에만 머물지 않았을 듯하지만, 안렴사는 곧 경상 감사의 안(案)에 실려 있지 다른 곳에서는 가히 고증할 길이 없다. 천안의 옛 기록(족보)에 이르기를 ‘상서공에게는 두 분의 아우가 있는데, 한분은 광성군이요 한분은 창원군이라 말하지만, 휘와 지손들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창원은 이미 회원(檜原)이므로 공은 아마도 광성군이 아닐까 한다. 자손은 원도- 문홍- ○은 뒤가 없다. 덕 유 고려조에 회원군으로 봉해졌으니 즉 지금 창원의 옛 이름으로 자손들이 창원으로 관향을 써오고 있다. 지금은 연주로 고쳐 합보(合譜)하였다. 아들은 승- 경- 간- 태로- 원의- 효생-석규-준-사숙-근-수간-태시-득사-윤-수령-응례-이원-창윤-재명-수장-영대이다. 3세 원 열 고려 충렬왕16년 경인에 태복윤으로 임명됨. 고려사에 보인다. 4세 삼가 이 한대의 휘와 자를 살펴보면, 천안의 옛 기록(족보)에는 전해지지 않지만 봉산에 살고 있는 첨사인 신달의 집안의 등본 가운데 중현대부 전객령 경여가 태보공의 아래에 있고, 종행(從行)에도 또한 경조의 이름과 자가 있으므로, 아마도 이것이 옳을 듯하며, 곁의 주석(방주)에도 의심난 부분이 있으므로 두루 관련 자료들을 채집하여야 할 것이다.
5세 삼가 천안의 옛 기록을 살펴보면 참찬 휘 금이 있어 바로 태복공의 아래에 접하였는데, 바른 줄(正行)에 쓰지 않고 곁에 가는 글씨로 되어 있으니, 이는 또한 아마도 믿을 만 하여 그런 것인지? 또한 봉산의 등본과 길주의 단자는 모두 이 휘자가 있어도 고려시대의 관제(官制)가 아니다.
그러나 종행(從行:내리닫이 줄)의 ‘박(博)’자는 가히 하나의 증거가 되므로 곁의 주석(傍註)의 전의(傳疑)로 재차 고증 할 것을 대비한다. 6세 치 룡 도첨의시사 또는 정승 또는 태복윤이다. 봉산의 족보에 이르기를 ‘3사(三司)좌윤이며 자손은 옥량 -종기로 예천 신당동에 있다’묘소는 용궁 내동면 우봉산 뒤 절안현 치소동 건좌이다. 자손은 용무 용휴-명조-우-선근-율-윤태-희청-의길-영원-봉문-옥천-이규-명은-익봉이다. 계 룡 영동정이다. 자손은 호명-환-인형-수-희황. 인택-몽필-계종-윤무-중규-기언-서태-석조 서 룡 진사. 한편 영동정이라 한다. 봉산의 등본에는 좌승선이라 한다.
아들은 호연 7세 호 연 생원 8세 수 문과급제 문하평리로 추봉(追封)됨 9세 언 배위 한씨로 아버지는 언국이다. 10세 홍 점 문하시중 한편 정용중절이라 한다. 11세 자 도 자손은 효성-치억 효길-문걸 자 미 자손은 효인. 묘소는 평양의 형제산 좌안동 이좌에 있다.
생원이며 자손은 치성-귀(구)-우관-술선-덕준-처중-두채-약계(설). 약겸. 약묵. 약목이다. 평양파임 12세 효 성 아들은 치억 효 길 아들은 문걸. 문검 13세 문 걸 묘소는 약산 북동 못 안(堤內) 동편 묘좌의 언덕임. 임진왜란에 잃어버림. 기일(제삿날)5월 초3일. 아들은 린. 척. 범 배위의 묘소는 위와 같음. 기일은 10월초4일 문 검 묘소는 명곡 못 안 죽전등(竹田嶝) 해좌임. 자손은 의-함길-자헌-계신-취명-승우-득태-순흥 승복-시태-응철 중림내리파 14세 린 묘소는 위와 같으며, 기일은 6월 초6일. 아들은 인보. 인우 배위는 이씨이며 묘소는 위와 같고 기일은 5월초3일 척 자손은 중란-취문-치원-덕망-태일-오항-상채 달원-봉세 우익 범 자손은 수란-계구 계공즉(啓功卽)-미상 15세 인 보 묘소는 명곡산 오른편 태룡경좌에 있고, 기일은 5월10일이다.
아들은 탁이다 배위는 경주오씨이며 아버지의 이름은 세인. 묘소는 같은 산이며, 기일은 5월초3일이다. 인 우 자손은 취영-이원(규석으로 이름을 고치고 과거에 급제는 하였지만 벼슬하지 않음)-시철-봉성-응세 16세 탁 바위 위는 현씨의 산소이며 바위 아래는 허씨의 산소이다 묘소는 명곡산 오른편 태룡경좌이고, 기일은 12월12일이다. 노직(老職 : 壽職 오래 살아서 받은 명예직)으로 가선대부이며 교지가 있다.
 배위는 경주 박씨이며 아버지는 인범이고 묘소는 위와 같고 기일은 3얼 25일이다. 17세 철 원 묘소는 읍내의 동편의 여단내맥상대의 태룡유좌이다. 읍기(邑基)를 옮겨 세우는 바람에 후에 이장하였다 말함. 기일은 1월 초4일 배위는 진주 강씨로 아버지는 태고이다. 묘소는 위와 같으며 기일은 4월27일이다.
18세 창 훈 우 신 묘소는 대곡리 굴곡산의 곤좌이다. 자손은 후적-석부-정용 석귀 우 석 묘소는 읍내의 동편 큰길 옆 태룡유좌이며 (후일)옮겨서 합장하고 상석이 있으며 기일은 5월23일이다. 배위는 밀양박씨로 아버지는 상련이며 묘소는 (부군과)합장하였다. 기일은 2월22일이다. 아들은 덕로. 태경. 태장이다 19세 덕 로 묘소는 읍내 동편의 큰길 곁 태룡좌이며 상석은 묘소의 오른쪽 유좌이다. 태 경 덕보로 이름을 고쳤고, 묘소는 위와 같다. 태 장 덕유로 이름을 고치고 묘소는 객사(客舍)의 뒤편 한곡의 자좌이며 기일은 1월초5일이다. 배위는 김해김씨로 아버지는 같은 고을의 원성이다. 묘소는 중림다문 제(못) 안 왼편 감룡자좌이다. 기일은 10월 초1일이다. 아들은 한구와 한수이다. 20세 한 구 묘소는 미륵암 서편 경태룡해입수(入首)자좌이며 기묘년에 태어났고 기일은 3월12일이다. 아들은 진하와 장하이다. 배위는 김해김씨로 아버지는 용흥이다. 묘소는 같은 암자 서편 계곡 위 간입수(入首)간좌이며, 기일은 1월초9일이다. 세 번째 따님은 대구의 정맹록에게 출가하였다.
한 수 묘소는 다문 제(못)안 감룡자좌이며, 경인년6월초4일에 태어나고 기일은 5월22일이다. 아들은 규하. 기하. 유하. 원하. 경하이다. 배위는 영양이씨로 묘소는 사리동 율전산 아래 봉오리의 유좌이며 배위 달성서씨 아버지는 대구의 순좌이며, 묘소는 성황단 태룡유좌이고 상석은 묘소의 오른편이다.
기일은 12월13일이다. 21세 규 하 묘소는 명곡 제(못)안의 선산아래 태룡유좌이며 무오년에 태어나 기일은 7월25일이다. 배위는 청주한씨 아버지는 신녕의 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 아들은 도근이다. 배위 청도김씨는 아버지가 준삼이며 묘소는 위와 같다. 기일은 11월18일이다. 또한 흥업은 출계(양자로 나감)하였음. 기 하 묘소는 성황단 아래 합장하였고 상석이 있다. 임술생이며 기일은 이다. 아들은도승과 도건이며, 도승의 아들은 치렴 달렴 희렴 만종이고며 손자는 백선과 백래이다.
 
배위는 영양이씨로 세해이며 묘소는 합장이다. 기일은 이다. 아들인 도근은 출계(양자로 나감)하였다. 유 하 묘소는 성황단 안골짜기 신룡신좌이며 기축년12월20일 태어나 기일은 5월16일이다. 넷째 따님은 신녕의 하신원에게 출가하였다. 아들은 도익-국렴 광렴, 도범-달렴, 도윤-응렴이다. 배위는 김해김씨로 아버지는 신령의 세주씨이다. 묘소는 군산(君山)의 태봉(태실봉) 뒷 등 태룡건좌이고, 기일은 12월초8일이다. 원 하 묘소는 명공 제(못)안 북편 감룡자좌이며, 기일은 이다. 계유생으로 셋째 딸이 의흥의 박 에게 출가하였다. 자손은 도묵-종렴. 창렴, 도혁-학렴. 재은, 도행이다. 배위는 김해김씨로 아버지는 청도의 광지이고 묘소는 위와 같다. 경 하 묘소는 북면의 조장 못 북편 감룡자좌이며 을해생이다.
 
자손은 도항-우렴. 지렴이다. 배위는 ○원제씨로 아버지는 같은 고을의 우교이다. 묘소는 봉수의 서편 축룡축좌이다. 22세 도 근 묘소는 군산 태실봉 뒤 태룡신좌이며, 기일은 무자년 3월14일이다. 을유년11월13일 생이다. 아들은 봉렴과 기렴이다. 배위는 진주하씨로 아버지는 신녕의 용대이다.
따님은 청도의 이관정에게 출가하였다. 23세 봉 렴 을묘생 9월 19일생이며, 기일은 5월 15일이다. 배위는 월성 손씨로 아버지는 영천의 명권이다. 기일은 6월 30일이다. 기제일기(忌祭日記) 기일(忌日) 고조부 휘 규하 7월 25일 고조모 청도 김씨 11월18일 증조부 휘 도근 3월14일 증조모 진주 하씨 10월26일 조부 휘 봉렴 5월15일 조모 월성 손씨 6월30일 아버지 휘 두장 5월12일 어머니 진주 하씨 11월13일 세보홀기(世寶忽記) 할아버지 휘 철원 1월초4일 할머니 강씨 4월27일 아버지 휘 우석 5월23일 어머니 이씨 2월22일 숙부 휘 우신 12월13일 아버지 휘 덕유 1월 초5일 아버지 생신 1월20일 어머니 김씨 10월 초1일 어머니 생신 10월 초7일 경인년 6월초4일 생신 병신 6월19일 생신 장자 석룡 무오년 10월21생신 차자 용찬 임술년 8월30일 차자 보룡 을축년 12월20일 연주 후인 현씨(延州後人玄氏) 선대의 기일(제삿날) 10조 휘 효길 묘소 약산 북동 못 안 동편 비위 9대조 휘 문걸 5월초3일 묘소는 위와 같음 비위 10월 초4일 8대조 휘 린 6월초6일 묘소 죽전 명곡 죽전 비위 이씨 5월초3일 7대조 휘 인보 5월10일 묘소 신음내 명곡 제 안 비위 오씨 5월초3일 6대조 휘 탁 12월12일 묘소 위와 같음 비위 박씨 3월24일 현조(5대조) 휘 철원 1월초4일 묘소 성황 상대 비위 강씨 4월27일 고조부 휘 우석 5월23일 묘소는 위와 같고 아래에 합장함.
상석 비위 이씨 2월22일 증조부 휘 덕유 1월초5일 비위 김씨 10월초1일 조부 휘 한수 5월22일 생일6월초4일 비위 서씨 12월13일 생일6월19일 생부(生父) 휘 유하 5월16일 생일12월20일 생모 김씨 12월초8일 생일8월초3일 아버지 휘 석룡 7월25일 어머니 김씨 11월18일 생일11월13일 축문 식(祝文式) 참파토 시 선영에 고유하는 축문 금위기세 손모관모모 봉모씨 이 모월일 영건유택어선조지전후좌우모좌향개영역 복유존영 부진불경 근이주과용신건고근고 (이제 몇세손 모모 관향모 모씨의 무덤을 모월모일 선영의 전후 좌우 좌향에다 만들고자 묘역을 여오니 엎드려 바라오니 존영께서는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삼가 술과 과일을 차려놓고 삼가 알려드립니다) 참파 제사 축문 유세차모년월모삭일모관모 감소고우 토지지신 금위모관성명 모봉모씨 영건택조 신기보우 비무후간 근이청작포혜 지천우신 상 향 (세월의 차례는 모년 모월 모일에 모모는 감히 토지의 신에게 밝게 고하나이다.
 
오늘 모야의 무덤을 만들었으니 신께서는 보호하고 도우심으로써 훗날 어려움이 없게 하여 주옵소서. 삼가 맑은 술과 포와 식혜로 공손하게 신에게 드리오니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파빈축(빈소를 철거하면서 드리는 축) 금이길신 천구감고 (오늘은 좋은 날이라 관 옮김을 감히 고하나이다) 석제축(저녁제사 축) 영천지례 영신불유 금봉구거 식준조도 (영원히 옮기는 예를 베풀었으니 영령께서는 머물지 마십시오. 이제 상여를 받듦으로써 조상의 길을 따릅니다) 조제축(아침에 드리는 제사 축) 금천구 취거감고 (이제 관을 옮기고자 상여 떠남을 감히 고하나이다) 발인축문(상여가 떠나 갈 때 드리는 축문) 영이기가 왕즉유택 재진견례 영결종천 (상여가 이미 차려져 가시는 곳은 무덤입니다.
비로소 보내 드리는 예를 차려 영원한 이별을 고하나이다) 산신축(산신축문) 유세차모년모월삭일 모 감소고우 토지지신 금위모관성명 모봉모씨 폄자유택 신기보우 비무후간 근이청작포혜 지천우신 상 향 (세월의 차례는 모년 모월 모일에 모야는 감히 토지의 신에게 밝게 고하나이다. 모야의 무덤을 만드오니 신께서는 보호하고 도우심으로 훗날 어려움이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삼가 맑은 술과 포와 식혜로 공손하게 신에게 드리오니 바라건대 흠향 하소서) 평토제축(평토 제사 축문) 유세차모년모월삭모일 고자(애자) 감소고우 현모관부군 현비모봉모씨형귀둔석 신반실당 복유존영 사구종신 시빙시의 (세월의 차례는 모년 모월 모일에 고자(애자) 모야는 감히 현모간부군(현비모봉모씨)에게 감히 고하나이다. 육신은 이미 땅에 묻히고 귀신은 집으로 돌아 왔으니 엎드려 바라노니 존영께서는 옛을 버리고 새것을 좆아 이에 의귀하시기 바랍니다) 반혼제축(혼백을 집으로 모셔와 드리는 제사 축문) 유세차모년모월삭모일 고애자모 감소고우 현고모관부군 일월불거 엄급초우(재 삼우 졸곡 소대상) 숙흥야처 애모불녕 근이청작서수 애천급사 상향 (세월의 차례는 모년 모월 살 모일에 고애자 모야는 현고 모관 부군에게 감히 고하나이다.
해와 달이 머물지 않아 문득 초우(재 삼우, 졸곡, 소대상)에 이르렀군요.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슬프고 사모하는 마음이 가시지 않아 삼가 맑은 술과 숱한 음식으로 슬피 제사를 드리오니 바라건대 흠향 하소서) 개장(장례를 다시 치룸) 참파축문 유세차모년모월삭모일 모 감소고우 토지지신 금위모관모성명 택조불리 장개장우차 신기보우 비무후간 근이청작포혜 지천우신 상 향 (세월의 차례는 모월 모일 모야는 감히 토지의 신에게 밝게 고하나이다. 오늘 모야의 무덤이 이롭지 않아 장차 이곳으로 고쳐 장례하오니, 신께서는 보우하시어 훗날 어려움이 없도록 하여 주십시오.
 
삼가 맑은 술과 포와 식혜로 공손히 신에게 올리오니 바라건대 흠향 하소서) 사구산토지축(구산신 제사 축문) 유세차모년모월삭모일 감소고우 토지지신 자유모친모관성명 모봉모씨 복택자지 공유타환 장계폄천우타소 근이청작포혜 지천우신 신기우지 상 향 (세월의 차례는 모년 모월 삭 모일에 모야는 감히 토지의 신에게 고하나이다. 여기에 모야의 무덤을 이곳에다 터를 잡았지만 다른 근심이 있을까 두려워 장차 다른 곳에 옮길까 합니다.
삼가 맑은 술과 포와 식혜로 공손하게 신에게 드리오니 신께서는 도와주소서. 바라건대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파묘축(무덤을 파헤치는 축문) 유세차모년월모삭일 효자(손. 증. 현손)모 감소고우 현모친부군 모봉모씨 장우자지 세월자구 체백불녕 금장개장 복유존영 부진불경 (세월의 차례는 모년 모월 삭 모일에 효자(손자.증손. 현손) 모야는 감히 현모친부군 모보모씨께 고하나이다.
이곳에 장례한지 세월이 오래되어 몸과 혼백에 편안치가 않습니다. 이제 장차 다시 장례하고자 하오니 존령께옵선 놀라지 마십시오) 파묘후 천구 축문(무덤을 파헤친 뒤 관을 옮기는 축문) 금일천구 취여감고(오늘 관을 옮김에 상여가 나아감을 감히 아룁니다) 재여후축(상여 떠난 뒤의 축문) 영이재가 왕즉유택 (상여가 비로소 떠났으니 가신 곳은 새 무덤이라) 장일사지축(장례치루는 날 지신에게 제사지내는 축문) 여초장각사동야 (장례일 각 제사와 더불어 동일함) 반혼축(혼백이 집으로 돌아 온 축문) 유세차모년월삭일 효자(손.증.현손)모 감소고우 현모관부군 모봉모씨 신개유택 예필종우 숙야불녕 제호망극 근이청작서수 지천우사 상 향 (세월의 차례는 모년 모월 삭 모일 효자(손. 증. 현손) 모야는 감히 현 모관 부군 모봉모씨에게 밝게 고하나이다. 무덤을 새로 만드는 예(禮)를 마치고 우(虞)를 마쳤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편하지 못해 아무리 울어도 끝이 없습니다. 삼가 맑은 술과 많은 음식으로 공경히 제사를 드리오니 바라건대 흠향 하소서) 개사초축고묘(사토를 다시하고 무덤에 알리는 축문) 유세차모년월삭일 모 감소고우 현모관부군 모봉모씨 복이봉축불○ 세구퇴비 금이길신 장가수즙 근이주과 용신건고근고 (세월의 차례는 모년 모월 삭 모일 모야는 감히 현모관부군 모봉모씨에게 밝게 고하나이다.
 
엎드려 무덤을 손보지 않아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졌습니다. 오늘 좋은 날이라 장차 보수하고자 하오니 삼가 술과 과일로 예 드림을 삼가 고하나이다) 산신축 유세차모년월삭일 모 감소고우 토지지신 금위모관성명 총택붕퇴 장가수치 신기보우 비무후간 근이주과 지천우신 상 하향 (세월의 차례는 모년 모월 삭 모일 모야는 감히 토지신에게 고하나이다. 오늘 모관 모야의 무덤이 무너져 장차 고치고자 하오니, 신께서는 보우하시어 훗날 어려움이 없게 하여 주십시오. 삼가 술과 과일로 공경히 신에게 드리오니 바라건대 흠향하소서) 필봉후위안축(무덤을 새로 만든 후 위안하는 축문) 유세차모년월삭일 모 감소고우 현모관부군 모봉모씨 금이길신 개봉유택 북유존영 영세시녕 (세월의 차례는 모년 모월 삭 모일에 모야는 감히 현모관부군 모봉모씨에게 밝게 고하나이다. 오늘은 좋은 날이라 다시 무덤을 만들었으니 존영께옵선 이에 편안하소서) 기일제축(기제사 시 축문) 유세차모년월삭일 모 감소고우 현고모관부군 현비모봉모씨 세서천역 휘일부림 추원감시 호천망극 근이청작서수 공신전헌 상 향 (세월의 차례는 모년 모월 삭 모일 모야는 감히 현고모관부군 현비모봉모씨에게 밝게 고하나이다.
 
세월이 바뀌어 돌아가신 날에 다시 임하오니 조상을 추모함에 이에 느껴짐을 하늘처럼 높아 다 함이 없습니다.
삼가 맑은 술과 숱한 음식으로 공손하게 제상을 차렸으니 바라건대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지방서(지방 서식) 현고모관부군신위 현비모봉모씨신위 복제본종복(초상시 복제) 아버지 참최 3년 어머니 자최 3년 아버지께서 살아계시면 15개월에 협제(祫祭:제사 이름)를 지낸다.
조부모 자최 부장기(지팡이를 짚지 않고 1년) 삼촌 숙부모 자최 부장기(지팡이 짚지 않고 1년) 증조부모 자최 5개월 고조부모 자최 3개월 4촌 조부모 5개월 6촌 조부모 3개월 8촌 조부모 3개월 5촌 숙부모 9개월 형제 부장기(지팡이 없이 1년) 아내 5개월 자매 부장기(지팡이 없이 1년) 시집갔으면 9개월 아내 자최 장기(지팡이 있고 1년) 아버지가 살아 계시면 지팡이 없음 4촌 형제 9개월 아내 5개월 6촌 형제 5개월 아내 3개월 8촌 형제 3개월 아내는 복이 없음 맏아들 참최 3년 며느리 부장기(지팡이 없이 1년) 둘째아들 장기(지팡이 있고 1년) 며느리 9개월 3촌 조카 부장기(지팡이 없이 1년) 며느리(질부) 9개월 7촌 조카 5개월 며느리(질부) 3개월 맏손자 부장기 손부 5개월 둘째손자 9개월 손부 5개월 4촌 손자 5개월 손부 3개월 6촌 손자 3개월 손부 복이 없음 증손자(嫡孫) 부장기(지팡이 없이 1년) 너머지 증손자 3개월 현손(고손자) 3개월 이부 8모지복(두 아버지 여덟 어머니의 복제) 같이 사는 계부(繼父) 부장기(지팡이 없이 1년) 의부(義父)와 친어머니 형제 각5개월 적모(嫡母) 친모(親母) 계모 양모 자최3년 개가모(改嫁母) 출모(黜母) 자최 장기(지팡이 있고 1년) 서모(庶母) 3개월 혹 양육(養育)하였으면 5개월 유모 3개월 외족지복(외족(外族)의 복제) 이조부모 5개월 3촌 숙부모 5개월 3촌 조카 5개월 질부 3개월 4촌 형제 자매 3개월 사위 3개월 외손자 3개월 손부 3개월 처부모 3개월 시가복(시집 복제) 아버지 참최 3년 어머니 자최 3년 남편 참최 3년 맏아들 자최 3년 며느리 장기(지팡이 있고 1년) 둘째아들 부장기(지팡이 없이 1년) 며느리 9개월 조부모 9개월 증고조부모 3개월 3촌 숙부모 9개월 남편의 형제자매 5개월 손자 9개월 손부 3개월 증현 손자 3개월 자녀의 조카 부장기(지팡이 없이 1년) 질부 9개월 첩위부복(첩이 남편을 위한 복제) 남편 참최 3년 남편의 부모 자최 3년 남편의 본처 자최3년 남편의 맏아들 자최3년 둘째아들 자최 부장기(지팡이 없이 1년) 그 부모가 되면 장기(지팡이 있고 1년) 그 아들이 되면 자최 부장기(지팡이 없이 1년)
 

[출처] 연주현씨족보|작성자 hgh911

출처 : 연주현씨 대종회(延州玄氏 大宗會)
글쓴이 : 26세 현경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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