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장군 께서1909년 10월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지 꼭 100주년
31살의 젊은 나이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안중근 의사를 보듬은 곳은 고국 땅이 아니었다. 순국 100주년을 맞지만 그의 영혼은 여전히 이국 땅 중국의 뤼순 감옥 부근 구천을 떠돌고 있다. 하얼빈 역에서 의거를 일으키고 일제에 체포돼 창춘(長春)을 거쳐 랴오닝(遼寧)반도 남단의 철옹성인 뤼순(旅順)감옥에서 생을 마감한 그의 시신이 온전히 수습되지 못했던 탓이다.
장군의 위패도 유일하게 전라남도 장흥군 장동면 만년리 해동사(海東祠)에모셔져 있다.
전남 장흥군 장동면 만년리 만수사(萬壽祠)해동사(海東祠)는 1957년 순흥 안씨 일가는 고려시대 유학자이자 성리학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안향 선생을 비롯한 안씨 문중 선조 6인의 위패를 모신 만수사(萬壽祠)를 건립했다.
그러자 당시 장흥지역 유림인 안홍천 선생이 주도해 순흥 안씨 26대손인 안중근 장군 사당인 해동사를 지었다. 만수사와 해동사가 곁에 위치한 까닭인데 원래 안중근 장군과는 장흥군은 전혀 연관이 없었다.
만년리 주민이자 안씨 문중인 안종구(78)씨는 “안홍천 선생은 안중근 장군이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후손이 없어 제사를 지내지 못한다는 것을 안타까워했다”며 “이에 안중군 장군 동생 등과 상의해 해동사를 짓기로 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해동사 건립 중 안홍천 선생은 이승만 전 대통령을 면담, 안중근 장군을 상징하는 ‘해동명월(海東明月)’이라는 휘호를 받아 현판으로 내걸었다.
이후 이 전 대통령은 매년 음력 3월12일 지내는 안중근 장군의 제사 때마다 제수용품을 보내왔다.
http://cafe.daum.net/bytal1 정남진을 아시나요
전남 장흥군 장동면 만년리 해동사(海東祠). 용두산이 넉넉하게 품고 있는 해동사는 안중근 장군님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제를 지내는 국내 유일의 사당이다.
해동사 중앙 현판 글씨 ‘해동명월’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직접 쓴 안 의사를 상징하는 휘호다.
해동명월(海東明月)...
안중근 장군님의 위패
해동사가 지어진 지 50여년 독립군 참모중장을 역임 하시면서.. 민족의원흉 이토 히로부미를총살 하신분을 의사라는 표현은 타당치 않은것이다.
이제는 의사가 아닌 장군이란 호칭을 써서 장군 안중근으로 바꾸어 후세에 널리 알려야 된다고 본다.
▶ 안중근 장군 연보
▶ 1879년 9월 2일(음력 7월 16일)
▶ 1897년 1월 중순
▶ 1898년
▶ 1899∼1904년
▶ 1906년
▶ 1907년
▶ 1908년
▶ 1909년 10월 초
▶ 1909년 10월 26일(음력 9월 13일)
▶ 1909년 10월 30일경
▶ 1910년 3월 8일
▶ 1910년 3월 15일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 등 많은 유작을 남기기 시작함.
▶ 1910년 3월 26일
東洋平和論 (동양평화론)
서문
대저 합치면 성공하고 흩어지면 패망한다는 것은 만고에 분명히 정해져 있는 이치이다. 지금 세계는 동서(東西)로 나뉘어져 있고 인종도 각각 달라 서로 경쟁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실용기계연구에 농업이나 상업보다 더욱 열중하고 있다.
그러나, 새 발명인 전기포(電氣砲: 기관총), 비행선(飛行船), 침수정(浸水艇:잠수함)은 모두 사람을 상하게 하고 사물을 해치는 기계이다. 지낼 때 쓰는 짐승, 소, 돼지, 양 따위)처럼 버려, 피가 냇물을 이루고, 고기가 질펀히 널려짐이 날마다 그치질 않는다.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치면 뼈가 시리고 마음이 서늘해진다.
도무지 한치의 유럽 땅도 침입해 뺏지 않았다는, 오대주(5大洲)위의 사람이나 짐승, 초목까지 다 알고 있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런데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가까이 수백 년 이래로 도덕을 까맣게 잊고 날로 무력을 일삼으며 경쟁하는 마음을 양성해서 조금도 꺼리는 기색이 없다. 그 중 러시아가 더욱 심하다. 그 폭행과 잔인한 해악이 서구(西歐)나 동아(東亞)에 어느 곳이고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조그만 섬나라인 일본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강대국인 러시아를 만주대륙에서 한주먹에 때려눕히게 하였다. 누가 능히 이런 일을 헤아렸겠는가. 이것은 하늘에 순응하고 땅의 배려를 얻은 것이며 사람의 정에 응하는 이치이다.
큰 승리를 거둘 수 없었을 것이나 어찌 그것을 예상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한·청 두 나라 국민은 이와 같이 행동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일본군대를 환영하고 그들을 위해 물건을 운반하고, 도로를 닦고, 정탐하는 등의 일의 수고로움을 잊고 힘을 기울였다. 이것은 무슨 이유인가.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대한 독립을 공고히 한다'라고 했다. 이와 같은 대의(大義)가 청천백일(靑天白日)의 빛보다 더 밝았기 때문에 한·청 인사는 지혜로운 이나 어리석은 이를 막론하고 일치동심해서 복종했음이 그 하나이다.
또한 일본과 러시아의 다툼이 황백인종(黃白人種)의 경쟁이라 할 수 있으므로 지난날의 원수졌던 심정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리고 도리어 큰 하나의 인종사랑 무리[애종당(愛種黨)]를 이루었으니 이도 또한 인정의 순리라 가히 합리적인 이유의 다른 하나이다.
가히 천고의 희한한 일이며 만방이 기념할 자취이다. 당시 한국과 청국 두 나라의 동서양 천지가 개벽한 뒤로 가장 뛰어난 대사업이며 시원스런 일로 스스로 헤아렸기 때문이었다. 조약을 맺고, 만주의 장춘(長春)이남인 한국을 조차(租借: 땅세를 주고 땅을 빌림)를 빙자하여 점거하였다.
세계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 의심이 홀연히 일어나서 일본의 위대한 명성과 정대한 공훈이 하루아침에 바뀌어 만행을 일삼는 러시아보다 더 못된 나라로 보이게 되었다.
슬프다. 용과 호랑이의 위세로서 어찌 뱀이나 고양이 같은 행동을 한단 말인가. 그와 같이 좋은 기회를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단 말인가. 안타깝고 통탄할 일이로다.
동양 평화와 한국 독립에 대한 문제는 이미 세계 모든 나라의 사람들 이목에 드러나 금석(金石)처럼 믿게 되었고 한·청 두 나라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음에랴!
이와 같은 사상은 비록 천신의 능력으로도 소멸시키기 어려울 것이거늘 하물며 한두 사람의 지모(智謀)로 어찌 말살할 수 있겠는가.
극력 방어함이 최상책이라는 것은 비록 어린 아이일지라도 익히 아는 일이다.
그런데도 무슨 이유로 일본은 이러한 순리의 형세를 돌아보지 않고 같은 인종인 이웃나라를 치고 우의(友誼)를 끊어 스스로 방휼의 형세[방휼지세(蚌鷸之勢): 조개와 도요새가 서로 물고 물리며 다투는 형세.
이때 어부가 나타나면 힘 안들이고 둘 다 잡아가게 된다고 해서 어부지리(漁夫之利)라는 말이 생겼다--필자]를 만들어 어부를 기다리는 듯 하는가. 한·청 양국인의 소망은 크게 깨져 버리고 말았다. 한·청 두나라 사람의 폐부(肺腑: 체내의 모든 기관, 부아, 깊은 마음 속--필자)에서 용솟음쳐서 상하 일체가 되어 스스로 백인의 앞잡이가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형세이다.
그렇게 되면 동양의 수억 황인종 가운데 수많은 뜻있는 인사와 정의로운 사나이가 어찌 수수방관(袖手傍觀:팔짱을 끼고 앉아 남의 일 바라보듯 함--필자)하고 앉아서 동양 전체가 까맣게 타죽는 참상을 기다리기만 할 것이며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옳겠는가.
그래서 동양 평화를 위한 의전(義戰)을 하르빈에서 개전하고, 담판(談判)하는 자리를 여순(旅順口)로 정했으며, 이어 동양평화 문제에 관한 의견을 제출하는 바이다. 여러분의 눈으로 깊이 살펴보아 주기 바란다.
1910년 경술 2월 여순옥중에서 쓰다.
이제 우리는 장군이 서거 하신지 100년이 되는 지금부터라도 역사를 바로잡고, 해동사가 안씨 문중만의 것이 아닌 후손들 모두의 것이기에 이를 성역화해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지자체 등 관계당국이 관광사업에만 골몰할 것이 아니라 안중근 장군 추모사업에 적극 나서야 될것이다.
http://cafe.daum.net/bytal1 정남진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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