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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현조의 환혼기-모란정-

餘香堂 2015. 6. 18. 11:01

희곡戱曲 <모란정牡丹亭>

 

   곤극崑劇 <모란정牡丹亭> (목단정), 완정이름 <모란정환혼기 牡丹亭還魂記>. 

   <자채기 紫釵記> <함단기邯鄲記> <남가기南柯記>와 함께 「옥명당 4몽 玉茗堂四夢」이라고 부른다. 

   젊은 남녀가 용감하게 자기의 사랑을 추구하고 봉건의 예교禮敎를 단호하게 반대하는 정신을 창송하며 정주程朱이학理學(정: 정이程頤과 정호程顥; 주: 주희朱熹)의 천리인욕의 허위와 잔혹을 폭로•비판한다. 봉건사회 몰락 시기의 사상과 문화 전제에게 큰 충격을 이뤘다.
<모란정>은 명나라 극작가 탕현조湯顯祖의 대표작이다.  

   명나라 화본話本 소설 <두려랑모색환혼杜麗娘慕色還魂>이 <모란정>에 기본 줄거리를 제공하였다. (화본: 송나라 원나라 시기에 민간 설화인이 설창하던 저본)

 

 

 

작품 소개 

 

   <모란정>은 명나라 시기 극작가 탕현조의 대표작의 하나다. 모두 55 단락이 있다. 두려랑杜麗娘과 류몽매柳夢梅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이 극은 <자채기> <남가기> <함단기>와 함께 「임천4몽臨川四夢」이라고 부른다. 극 원래 이름 <환혼기>. 1598년에 창작되었다. 

   <요학鬧學> <유원遊園> <경몽驚夢> <심몽尋夢> <사진寫真> <이혼離魂> <습화교화拾畫叫畫> <명판冥判> <유구幽媾> <명서冥誓> <환혼還魂> 등이 무대 위에 늘 공연된다. 

   <모란정>, 전명 <모란정환혼기>, 즉 <환혼기>, 또 <환혼몽> 혹은 <모란정몽>이라고 부른다. 전기 극본 2권, 55 단락. 명라나 소설 <두려랑모색환혼>에 따라 창작되었다. 명나라 남곡의 대표적인 작품. 저자 탕현조. (전기: 명청대에 성행한 장편 희곡) 

   <모란정>은 <서상기西廂記> <두아원竇娥冤> <장생전長生殿>과 중국 4대 고전 희곡이라고 부른다. (다른 견해: <서상기> <모란정> <장생전> <도화선桃花扇>) 

   탕현조는 명나라 만력 26년에 파면돼 벼슬길을 끊어 고향으로 돌아가서 죽을 때까지 필경하였다. <모란정> <남가기> <자채기> <함단기> 그 평생의 4 전기 잡극이 유명한다. 그 속, <모란정>이 가장 유명한다. 「一生四夢 (일생 4몽), 得意處惟在牡丹 (득의처 유재 모란)」이라고 탕현조 자신도 몹시 만족스러웠다. 명나라 사람 심덕부沈德符가 그렇게 평가하였다: 「湯義仍《牡丹亭夢》一出 家傳戶誦 幾令《西廂》減價.」 (탕의잉 <모란정몽>이 나온후, 집집마다 읽는다. <서상기>의 가격도 내릴 정도였다.) <주: 탕현조, 자 의잉>

 

 

이야기 줄거리 

 

   빈궁한 서생 류몽매가 꿈 속에 한 화원 매화나무 아래에 있는 한 아름다운 여자와 만나서 연이 있다고 들었다. 이 때부터 늘 그 미인을 그리워한다. 

   남안南安 태수太守 두보杜寶의 딸 여랑麗娘이 아름답게 생겨, 진최량陳最良에 따라 공부한다.  

   여랑이 <시경詩經•관저關雎>에 의해 봄에 슬퍼한다. 화원에서 돌아온 후, 잠들어 꿈 속에 버들나무 가지를 가져 구혼하러 온 한 서생을 만났다. 두 사람이 모란정 옆에 밀회하였다.
이 때부터, 여랑이 번민하며 살이 빠져서 병도 났다. 

   임종할 즈음, 화원의 매화나무 아래에 매장해준다고 어머니에 부탁하고, 자기 화상을 태호석 아래에 숨겨주라고 시녀 춘향에게 분부하였다. 

   여랑 부친이 회양 안부사에 승임한 후, 진최량에 부탁하여 딸을 매장하며 「매화암관」을 세웠다. 

   3년 후, 류몽매가 과거 시험으로 경성에 갔다. 매화암관에 잠시 묵을 때에, 태호석 아래의 두여랑 화상을 봤다. 그리고 두여랑이 자기 꿈 속에 만난 미인을 발견하였다.

   두여랑 영혼이 화원에 놀려 와 류몽매와 다시 밀회하였다. 

   류몽매가 여랑의 무덤을 열었다. 여랑이 부활한다. 두 사람이 결혼해서 임안臨安으로 떠났다. 

   여랑 선생님인 진최량이 발굴된 무덤을 봐서 무덤 도굴의 죄로 류몽매를 고발하였다. 류몽매가 임안에 시험을 본 후, 여랑의 부탁을 받아 부모님에게 자기가 부활한 희보를 보냈다가, 여랑 부친 두보에 의해 구속되었다. 

   시험 결과가 발표할 때, 류몽매가 장원이 되었다. 하지만 두보는 딸의 혼인을 승인하지 않고 이혼을 구촉한다. 황제 앞에 가서 마침내 두 사람이 승인을 받았다.  

 

 

주요 인물

 

   <모란정>의 진보적인 사상은 구체적으로 생동감이 있는 인물들에 의해 표현된다. (그 시대에 진보적였다)

두여랑 杜麗娘 (두려랑/두려낭/두여낭)
- <모란정>의 여자 주인공. 용감하게 자기 사랑을 추구함

류몽매 柳夢梅
- <모란정>의 남자 주인공. 재수가 있지만, 공명과 관록을 추구함.

두보 杜寶
– 두여랑의 부친, 봉건 가장제도의 대표, 단호한 정통주의자.

진최량 陳最良
– 도학의 선생. 진부하고 위선적이고 이기적임.

 

 

작품의 영향 

 

   <모란정>은 탕현조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예술적으로 사상적으로 다 그 창작의 최고 수준에 달한다. 

   극작이 나왔을 때, 일거에 다른 고대 사랑이야기 <서상기>를 초과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모란정몽>이 나온 후, 집집마다 읽어서 <서상>의 가격을 내릴 정도였다.」이 극이 봉건제도가 삼엄한 고대 중국에 공연되자마자 관중들 (특별히 정이 억압된 여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런 기록도 있다: 이 때 어느 소녀가 이 극을 읽어서 감동되어 「분완이사忿惋而死」 우울하게 죽었다; 항주의 한 여배우가 「심몽 (꿈찾기)」을 공연할 때에 몹시 충동적이어 무대 위에 죽었다.

   두여랑과 류몽매의 사랑이야기는 젊은 남녀들이 자유로운 사랑에 대한 추구를 체현하며 개성 해방에 대한 요구를 표현하였다. 

   <모란정>의 개성해방의 사상적 경향의 영향은 심원한다. 청나라 시기의 <홍루몽>에서도 그런 영향을 볼 수 있다.  

 


저자 소개 

 

   탕현조湯顯祖(1550~1616). 명나라. 자 의잉義仍. 호 약사若士, 해약海若, 청원도인淸遠道人. 고향 강서江西 임천臨川. 선비 집안 출신. 

   근직하고 솔직한다. 평생 권세와 직위가 높은 사람에게 빌붙지 않고 늘 사람들에게 미움을 샀다. 

   젊었을 때에 진사進士의 시험을 보여, 내각 수보首輔 장거정張居正의 모집을 거절하므로 낙선되었다. 33살 때야 진사 급제하였다. 

   진사 급제한 후, 그때 국정을 장악하고 있는 장사유張四維와 신시행申時行의 환롱질과 뇌물을 거절하니 배척을 당하였다. 

   명나라 만력 연간에 급사중給事中을 담임하였다. 49살 때에 벼슬을 포기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좌익파의 양향을 받았다. 그때 통치자가 이단으로 보인 이지李贄 등 사람을 친구로 삼아 정주 이학을 반대하며 사람의 욕망을 긍정하였다. 이 자유를 추구하는 사상은 그게 크게 영향하였다.

 

  문학 사상에, 탕현조는 공안파公安派 반복고사조反復古思潮와 서로 호응하여 명확적으로 문학 창작이 먼저 「입의立意」해야 사상 내용을 제1위에 둔다고 지적하였다. 이런 사상은 그 작품 속에 구체적으로 체현되었다. 

   탕현조는 한시 등도 창작하지만 작품 속 성취가 가장 높은 것을 희곡이다. 그는 고대 중국 관한경關漢卿 후의 다른 위대한 극작가다. 

   현존하는 그의 극작은 주로 5개 넘어있다. 즉 「옥명당사몽玉茗堂四夢」 (일명 「임천사몽臨川四夢」)과 <자소기紫簫記>. 「옥명당사몽 」이 바로 <자채기紫釵記> <모란정牡丹亭> <함단기邯鄲記> <남가기南柯記>. 그 4 작품 속, 탕현조가 가장 만족스러운 것은 <모란정>이다. 

   「위관불제爲官不濟 위문불후爲文不朽」 (관리로서 좋지않지만 작가로서 불후한다.)고 사료가 그를 평가하였다. 

 

   시문집詩文集 <홍천일초紅泉逸草> <문극우초問棘郵草> (불완정), <옥명당문집玉茗堂文集>. 

   만년 시기의 탕현조는 불교 철학에 잠심하였다. 「편주랑사偏州浪士 성세유민盛世遺民」으로 자칭하며 「천하사天下事 (천하의 일), 이지이이耳之而已 (듣기만 하면 된다), 순지이이順之而已 (따르면 된다)」고 말하였다. 그 후 「견옹繭翁」이란 호를 자칭하였다. 

   탕현조도 세계적인 위인의 하나다. 일본 학자 아오키 마사루(靑木正兒)씨가 <지나근세희곡사> (중국근세희곡사)에 탕현조를 셰익스피어와 함께 동서방의 서로 아울려 비추는 두 명성이다고 평가하였다. -옮긴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