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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정사십년(酩酊四十年)

餘香堂 2015. 3. 14. 19:33

○●○ 명정사십년(酩酊四十年)(변영로)


역시 혜화동 우거에서 지낼 때였다. 어느 하룻날 바커스의 후예들인지 유령(踰嶺)의 직손들 인지는 몰라도 주도(酒道)의 명인들인 공초(空超, 吳相淳), 성재(誠齋,李關求), 횡보(橫步,廉尙燮), 3주선(酒仙)이 내방하였다. 설사 주인이 불주객이란대도 이런 경우를 당하여서는 별도리가 없었을 것은 거의 상식 문제인데, 주인이랍시는 나 역시 술 마시기로는 결코 그들에게 낙수되지 않는 처지로 그야말로 불가무일배주(不可無一杯酒)이었다.
 허나 딱한 노릇은 네 사람이 주머니를 다 털어도 불과 수삼 원, 그때 수삼 원이면, 보통 주객인 경우에는 3,4인이 해갈은 함 즉하였으나 오배(吾輩) 4인에 한하여서는 그런 금액쯤은 유불여무(有不如無)였다.
 나는 아무리 하여도 별로 시원한 책략이 없이, 궁하면 통한다는 원리와는 다르다 해도 1개의 악지혜(기실 악은 없지만)을 안출하였다. 동네에서 모인(某人) 집 사동 하나를 불러다가 몇 자 적어 화동 (花洞) 납작집에 동아일보사로 보냈다.
 당시 동아일보사의 편집 국장은 故 고하(古下,宋鎭禹)였는데 편지 사연은 물을 것도 없이 술값 때문이었다. ---좋은 기고를 하여 줄 터이니 50원만 보내 달라는, 거절을 당하든지 하면 어떠나 하였다.
 10분, 20분, 30분, 한 시간, 참으로 지리한 시간의 경과였다, 마침내 아이가 손에 답장을 들고 오는데 우리 4인의 시선은 약속이나 한 것같이 한군데로 집중되었다. 직각(直覺)도 직각이지만 봉투 모양만 보아도 빈 것은 아니었다. 급기 뜯어보니 소기(所期)대로, 아니 소청(所請)대로의 50원, 우화(寓話) 중의 업오리 금알 낳듯 하였다.
 이제부터 이 50원을 어떻게 유효적절하게 쓰느냐는 공론이었다. 그때만 해도 50원이면 대금이라 아무리 우리 넷이 술을 잘 먹는대도 선술집에 가서는 도저히 비진(費盡)시킬 수 없었던 반면에, 낮부터 요정에를 가서 서둘다가는 안심 안될 정도였다.
 끝끝내 지혜(선악간에)의 공급자는 나로서 나는 야유(野遊)를 제의한바, 일기도 좋고 하니 술 말이나 사고 고기근이나 사 가지고 나 있는 곳에서 지척인 사발정 약수터(성균관 뒤)로 가자 하니 일동 낙(諾)타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일행은 명륜동에 있는 통신 중학관(고 姜想熙 군이 경영하는)으로 가서 그곳 하인 어 서방(魚 書房)을 불러내어 이리저리 하라, 만사를 유루(遺漏)없이 분부하였다.
 우리는 참으로 하늘에나 오를 듯 유쾌하였다. 우아하게 경사진 잔디밭 위에 둘러앉았는데 어 서방은 술 심부름, 안주 장만에 혼자서 바빴다. 술은 소주였는데 우선 한 말을 올려다 놓고 안주는 별 것 없이 남비에 고기를 끊이었다.
 참으로 그날에 한하여서는 쾌음(快飮), 호음(豪飮), 하였다. 객담(客談), 고담(古談), 농담(弄談), 치담(痴談), 문학담(文學談)을 순서 없이 지껄이며 권커니 잔커니 마셨다. 이야기도 길고 술도 길었다. 이러한 복스런 시간, 길이 계속되기를 빌며 마셨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랄까, 고금무류의 대기록은 우리 4인으로 하여 만들게 할 천의(天意)랄까, 국면이 일변되는 사태가 의외에 발생하였다. 그때까지는 쪽빛같이 푸르고 맑던 하늘에 난데없이 검은 구름 한 장이 떠돌더니, 그 구름장 삽시간에 커지고 퍼져 온 하늘을 덮으며 비가 쏟아지기를 시작하였다. 그야말로 유연작운(油然作雲), 패연하우(敗然下雨) 바로 그대로이었다. 처음에는 우리는 비를 피하여 볼 생각도 하였지만 인가 하나 없는 한데이고 비는 호세 있게 나리어 속수무책으로 살이 부를 지경으로 흠뻑 맞았다. 우리는 비록 쪼루루 비두루마기를 하였을망정 그때의 그장경(壯景)---산중취우(山中驟雨)의 장경은 필설나기(筆舌難記)였다. 우리 4인은 불기이동(不期而同)으로 만세를 고창하였다. 그 끝에 공초 선지식(善知識) 참으로 공초식 발언을 하였다. 참으로 기상천외의 발언이었던바, 다름 아니라 우리는 모조리 옷을 찢어 버리자는 것이었다. 옷이란 워낙이 대자연과 인간 두 사이의 이간지물(離間之物)인 이상, 몸에 걸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럴 듯도  한 말이었다. 공초는 주저주저하는 나머지 3인에게 시범차로인지 먼저 옷을 찢어 버리었다. 남은 3인들도 천질이 그다지 비겁치는 아니하여 이에 호응하였다. 대취한 4나한(羅漢)들 광가난무(狂歌亂舞)하였다. 서양에 Bachanalianorgy란 말이 있으나 아무리 광조한 주연이라 해도 이에 비하여서는 불급(不及)이 원의(遠矣)일 것이다.
 우리는 어느덧 언덕 아래 소나무 그루에 소 몇 필이 매여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번에는 누구의 발언이거나 제의였더니 이제 와서 기억이 미상하나 우리는 소를 잡아타자는 데 일치하였다. 옛날에 영척(寧戚)이나 소를 탔다고 하지만 그까진 영척이란 놈이 다 무엇이냐. 그 까윗 것도 소를 탔는데 우린들 못 탈 배 어디 있느냐는 것이 곧 논리이자 동시에 성세(聲勢)이었다. 하여간 우리는 몸에 일사불착한 상태로 그 소들을 잡아타고 유유히 비탈길을 내리고 똘물(소나기로 해서 갑자기 생겼던)을 건너고 공자(孔子) 모신 성균관을 지나서 큰거리까지 진출하였다가 큰 봉변 끝에 장도(壯圖--시중까지 오려던)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옮긴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