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주반생기 중에서...
'백주회'
'청자색 꽃병'도 어느덧 깨어지고, 《금성》도 폐간되고, 나는 그만 훌훌히 도일하였다. 그즈음 도향 나빈(稻香 羅彬)과 사귀어 몇 번 그와 조촐한 술자리를 같이 하였고, 횡보 염상섭(橫步 廉想涉)씨와는 근 일년 동안 같은 방에 묵으면서 밤낮으로 술을 즐겼다. 뒤에 노산 이은상(鷺山 李殷相)과도 같은 방에서 몇 달을 곁들어 함께 지냈으나, 그는 술을 그리 즐기지 않으므로 다만 '글'의 벗이었을 뿐, 술은 노상섭과 함께 하였다.
도향은 거의 나와 연배로서 일찍 《백조》의 동인, 배재를 갓 졸업한 약관 19세의 문학청년으로 벌써 장편 <환희(幻戯)>를 《동아》지에 연재하여 문명을 일세에 떨쳤던 수재, 그는 광면(廣面)ㆍ단구(短軀)의 일견 추남이었으나, 문재에 못지 않은 색재(色才)도 있었음인지, 《백조》의 동인들과의 날마다 호유(豪遊)중에서, 진부(眞否)는 미상이나마, 춘심(春心)인가 단심(丹心)인가의 미희와도 풍류 염문(艶聞)을 드날렸던 뒤이나, 아깝게도 才士의 지병인 폐를 앓아 <벙어리 삼룡>ㆍ<그믐달>등을 쓸 무렵에는 이미 무거운 각혈을 볼 때였다. 내가 어느 해 도일하는 길에 남대문 옆 비탈길 밑 그의 집을 찾아 그와 함께 하룻밤을 통음한 기억이 있거니와, 그가 정작 동경에 왔을 때는 이미 술을 거지반 끊지 않을 수 없는 중태여서 다시금 그와 쾌음치 못한 것이 한이다. 그는 그때 일식 망토를 입고 다녔는데, 그를 사숙(私淑)하는 문학청년 이태준이 그를 늘 정중히 모시고 다녔었다. 여고사(女高師 : 여자고등사범학교)에 다니는 모 양과의 짝사랑에 실연하여 그는 다시 술을 먹고 울고 하였다. 그녀와 나란히 걸으며 애끓는 '사랑'을 고백했는데, 무심중 침을 뱉었더니 붉은 선지피가 땅 위에 떨어지매 그녀가 질색을 하더라 하며, 정종[日酒]을 거의 반 되나 마셨다. 돈없고, 병들고, 연인도 없고 - 가진 것이란 문재밖에 없는 이 박행한 소설가 도향은 실연한 그 뒤 귀국하여 몇 달을 더 버티지 못하고 아깝게 세상을 떠났다.
상섭은 진작부터 《폐허》ㆍ《개벽》이래 단편 <표본실의 청개구리>ㆍ<제야>, 장편 <만세 전> 등으로 소설에 성명(盛名)을 날리던 문단의 선배, 동경에 오자 어찌 어찌된 기연으로 나와 의기가 상투하여 한 방에 숙식케 되었다. 주요한 '기연'은 둘이 다 돈에 '궁'하였음이었던가. 그때 두 사람은 모두 정기의 학자 송금이 없었고 수삼십 원의 원고료로 살아가는 터이었으매, 두 사람이 값싼 하숙 삼첩(三疊)방에 들어서 먹고 자기를 같이하였음은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둘 중의 하나의 고료가 오면, 그 태반은 하룻밤 술값에 탕진되기가 일쑤였다. 둘이 다 당시에 대주객(大酒客), 유령(劉伶)ㆍ이백(李白) 내지 헨리 5세ㆍ드레이크 등과 병가재구(並駕齊驅)하는 경음당원(鯨飮黨員)으로 자처했기 때문이다.
상섭은 참으로 좋은 술동무였고, 당시 근 일년 동안의 동거 생활은 나의 반생 중에도 한 즐거운 추억이다. 그때 우리들의 주량은 백중을 다툴이만큼 거량이어서 날마다 필수량이 거창했으나, 둘의 포켓은 자못 소슬하였다. 그런데 혹시 돈이 생기면 술턱을 내는 품이 두 사람이 아주 각기 달랐다. 나는 학비로 고료가 오면 그 중에서 먼저 방세를 치르고 그 나머지 액수를 그에게 고백하고 둘이 나가 마시는데, 상섭은 그렇지 않아 고료만 오면 시치미를 떼고 왔다는 말도, 액수도, 일절 말하지 않는다. 내가 벌써 그 눈치를 알고, 내 돈 약간을 보이면서 값싼 술집으로 가자 한다. 그가 못 이기는 체하면사 나를 따라 나선다. 주밀한 그가 고료로 온 전액을 그의 조끼 안주머니 깊숙이에 감추었음은 무론이다. 그래 나의 값싼 술턱으로 둘이 다 우선 거나하게 취한다. 나는 그만 돈이 벌써 떨어졌음을 그에게 고하고, 일어서 돌아가자고 그의 소매를 잡아 당긴다.
- 자 예서부터가 나의 작전의 승리이다.
"자, 상섭 형. 가!"
"못 가! 다른 데 가서 더 먹어!"
"돈이 없는데...."
"아따, 없긴? 히히히. 예 있어. 이것 봐. 일금 대매 30원야(也)라."
이리하여 깊숙이에 비장되었던 대매 30원은 대번에 일약 최전선으로 출동된다. 30원이면 그때 한 달 숙식비가 넉넉한 돈이다. 그래 두 사람은 이번에는 고급한 바로, 카페로 발전하여 권커니 작커니 일ㆍ양주를 거듭하여 드디어 그 대매 전액을 한 푼도 남기지 않고 다 마시고 만다! 나는 먼저 여간한 턱을 내고 뒤에 인색함에 반하여 상섭은 처음에는 전주(全州) 꼽재기 이상 굳다가도 몇 잔 술에 거나하기만 하면 뒷일은 삼수갑산 아랑곳없이 있는 돈을 모조리 다 털어 끝장을 내고야 마는 성미다. 내가 그 성격을 익히 알고 꾸미는 작전에 그가 늘 속아서, 고료는 나보다 갑절을 벌건만 포켓은 언제나 텅 비었다! 언젠가는 나의 그 '작전'이 지대한 효과를 발휘하여 둘이 '홍고[本鄕]바'인가에 가서 '백주회(百酒會)'를 열었다. 하룻밤에 마사무네[正宗]ㆍ다카라[寶] 왜소주, 각종 맥주, 황주(黃酒)ㆍ배갈ㆍ오가피주ㆍ벨모트ㆍ리큐르, 차츰 진ㆍ위스키ㆍ브랜디ㆍ워커 등등에 미쳐 백 가지 술을 모조리 한 잔씩 먹는 모임이다. 만취하여 돌아오는 길에는 또 예의 상섭의 지벽(持癖)인 '숨바꼭질'이 시작된다. 그가 비틀걸음으로, 그러나 용하게 빠른 걸음으로, 앞서 뛰어가 어느 길가 쓰레기통 뒤에 몸을 숨긴다. 내가 달려가 찾다가 알고도 짐짓 모르는 체하고 지나가면, 통 뒤에서 그가 나와,
"깨꼬! 요기 있는 걸 몰라? 히히히"
이런 일을 되풀이하면써 둘은 마침내 다정한 동지로서 스크램을 겯고 반산(蹣跚), 취보(醉步), 안 맞는 발걸음을 굳이 맞추어 하숙 문을 두드린다. 아아, 어여쁜 그 치기(稚氣), 우리들 주당의 난만했던 우정이여.....
돈이 모자라 바에 못 가는 때에는 문 닫고 삼첩방에서 마른 오징어 한 개를 안주삼아 '마사무네'나 '다까라' 소주, 내지 값싼 '에비스' 맥주를 마신다. 이층이므로 변소에 내려가기가 싫어 소변을 맥주병에 교대로 누어놓고 피차 게을러 쏟지 않고 마개도 하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니, 창가에 술병 아닌 오줌병이 한 다스 이상 즐비(櫛比)ㆍ임립(林立)하고, 방 안에는 술 냄새, 오줌 냄새가 뒤섞인 야릇한 냄새가 진동하게 된다. 어느 날 마침 춘성 노자영(春城 盧子泳)이 우리들에게 경의를 표하려 위방했다가 이 실경(實景)을 보고 질색하여 돌아가 어느 신문에다가 "상섭과 무애는 동경와서 공부는 않고 술만 먹는다"고 개탄하면서 이 맥주 - 오줌 병의 '추'(?)한 광경을 자세히 문단에 보고하여 말썽을 일으킨 일이 있다. 나는 심상히 여겼으나, 상섭은 이 방면에는 나와 다르게 비상히 '체면'을 존중하는 성격인지라 자못 분개하여 하던 것을 기억한다.
고료와 학비를 모조리 술타령에 날려버리고 아주 돈이 떨어지면 앉아서 굶기가 일쑤였다. 뒤에 문학 청년 모 군이 우리 살림에 참가하여 삼첩방에 세 사람이 뒹굴었는데, 모 군은 나가서 돈을 꾸어오는 '구실'을 하였다. 다행히 그가 어디 가서 50전이나 1원쯤 구해 가지고 오면, 우리들은 왜소주 한 병을 오징어 안주로 나누어 마시고, 그도 안되는 날은 셋이 '천(川)'자로 가지런히 드러누워서 부동의 자세로 온종일 앙와(仰臥)하였다. 꼼짝 않고 누워 있음이 공복을 덜 촉진하는 때문이다. 무애자(无涯子) 일동을 대표하여 벽 위에 표어(標語) 석 자를 써붙였으니, 가로되 -
"동측손(動則損)" -옮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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