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묵조사(震默祖師)
진묵대사는 1563년에 김제시 만경면 불거촌(現 화포리)에서 調意氏(조의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불거촌이란 불개(火浦)에서 유래된 말로써 부처님이 살고 있는 곳이란 뜻이다. 이름은... |
◐불교설화(佛敎說話)◑진묵조사(震默大師)-노모의 영전에, 불후의 제문을 지어 바쳤다.
충남 보령시, 백운사 |
◐진묵조사(震默祖師)◐ 진묵조사(震默大師)가 상운암에 주석하실 때이다. 사찰경제가 어려워 진묵조사를 제외한 모든 승려들이 결제를 앞두고 식량확보를 위해서 탁발에 나섰다. 승려들이 멀리 탁발을 나가 한 달 남짓하여 돌아왔는데, 진묵조사를 찾으니 탁발 떠날 때 보았든 좌선자세로 두눈을 감고 선정에 들어 있었다. 진묵조사의 얼굴에는 거미줄이 처지고, 무릎사이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다. 승려들이 놀라 거미줄을 걷어내고 먼지를 쓸어내고서 큰 절을 하여 “아무개 돌아왔습니다.”하고, 인사를 드리니 진묵조사는 그제서야 선정에서 눈을 뜨고 이렇게 말하였다.
어머니를 떠나지 않고, 어머니를 당시 왜막실에 (현재, 완주군 용진면 아중리)에 모시고 효도를 다하였다. 노모가 모기떼의 극성에 고통을 받자 진묵조사는 왜막실을 관장하는 산신(山神)을 불러 모기떼가 일제히 사라져 나타나지 않도록 명령하였다고 한다. 진묵조사는 애통히 울부짖으면서 노모에게 생전에 약속한 천하의 명당인 ‘천년향화지지’에 안장하였다. 그리고 노모의 왕생극락을 발원하며 승려들과 함께 지극지성으로 49제를 올리었다. 그 때, 진묵조사는 슬피 울면서 노모의 영전에 다음과 같은 불후의 제문을 지어 바쳤다. ◐노모의 영전에 바치는 제문(第文) / 진묵조사(震默大師) 胎中十月之恩何以報也 膝下三年之養未能忘矣 열달동안 태중의 은혜를 무엇으로 갚으리요 슬하에서 삼년동안 길러주신 은혜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만세 위에 다시 만세를 더 하여도 자식의 마음에는 부족한데, 백년 생애에 백년도 채우지 못하시었으니, 어머니의 수명은 어찌 그리 짧습니까? 한 표주박을 들고, 노상에서 걸식하는 이 중은 이미 말할것도 없거니와, 비녀를 꽂고 아직 출가하지 못한 누이동생이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상단불공과 하단의 제가 끝나니 승려는 각기 방으로 찾아가고, 앞산 뒷산 첩첩산중인데 어머니의 영혼은 어디로 가시었습니까? --------------- 이 제문(第文)은 전국승려에게 전파되었다. 그 제문을 받아 읽은 승려들 가운데는 각기 떠나온 어머니를 생각하고, 효도를 하지 못한 자책감에 대성통곡하는 승려가 부지기수였다. 어쩌면 진묵조사의 제문은 만세를 두고 불교가 존재하는 한, 모든 승려들의 사모곡의 제문이 될 것이다. 진묵조사는 노모생전에 약속한 대로 노모를 천년향화지지에 안장하였다. 그곳은 현재, "전북 김제군 만경면 화포리 조앙산"이다. 누구의 입에선가... 진묵조사의 어머니인 조의씨를 두고 성모(聖母)라는 존칭이 붙여졌다. 또, 누구의 입에선가, 진묵조사 어머니의 묘소의 풀을 깎고, 향화를 바치고, 공양을 올리고 기도하면, 한 가지 소원은 성취할 수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묘소옆에는 성모암(聖母庵)이 들어서고, 또다른 사찰이 창건되었다. 곧이어 경향각지에서 성모(聖母)의 묘소를 친견하고 기도하기 위해 향화와 공양을 올리기 위한 순례자들이 줄을 이었다. 성모(聖母)의 묘소에는 한 시도 빠짐없이 촛불이 밝혀지고 향화가 피워 올랐으며, 순례자들의 기도소리가 끝이지 않았다. 진묵조사는 노모와의 약속대로 '무자손천년향화지지'에 노모를 모신 것이다. 한국의 역사에 묘소앞에 촛불 밝히고, 향을 피우며 온갖 공양물을 올리면서 기도하는 곳은 유일하게 진묵조사의 어머니 묘소 뿐일 것이다. 어느 날, 진묵조사는 스스로 삭발하고, 목욕하고 나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는 지팡이를 끌고서 산문을 나가 개울을 따라 걷다가 지팡이를 세우고, 물가에 서서 손가락으로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가르키면서 따르던 시자에게 말했다.
석가모니의 참모습은 알지 못하는구나.” 마침내, 그는 지팡이를 어깨에 메고 자신의 선실로 돌아와 가부좌를 하고서 제자들을 불러 작별의 말을 하였다. “나는 이제 떠나갈 것이다. 물을 것이 있으면 지금 물어 보아라.” 종승(宗乘=법맥)을 뉘에게 잇겠습니까?” 진묵조사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열반에 들으려 하였다. 제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간청하였다. 간청하는 제자들을 딱한 듯 보면서 마지못해 이렇게 말하였다.
명리승이긴 하지만, 정장노(靜長老= 서산, 휴정대사)에게 붙여 두어라.” 이윽고 진묵조사는 자신의 열반종 소리를 들으면서 영원한 대적삼매(大寂三昧)에 들어가니, 그 때, 그의 세수가 72세요, 법랍이 52이니 곧 계유(1632)년 10월 28일이었다.
대성통곡하며, " 대사는 승려이면서, 행은 진실한 유자(儒者)였다고 증언하고, 애도 하였다. 진묵조사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전면의 네 기둥에는 앞서의 취흥이 도도했을 때의 뱃포큰 시(詩)가 주련(柱聯)에 적혀 있었다. 진묵조사와의 진영과 어머니의 진영, 그리고, 진묵조사의 시집간 여동생마저, 처녀 시절의 진영으로 신앙의 대상으로 봉안되어 있었다. 그의 가족은 일제히 단상에 불상처럼 앉아 중생의 재앙을 멸하고, 복(福)을 주는 전능한 신(神)이 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남녀신도들이 역시 촛불을 밝히고 헌향,헌화, 쌀, 과일 등과 지폐를 놓고 다투워 소리높여 중생의 소망을 이루려는 기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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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통력으로 불을 끈 진묵 대사(震默大師)
진묵대사(1562~1633)는
조선 16대 왕인 인조대왕(11년) 때의 고승(高僧)으로
속명은 일옥(一玉)이고, 진묵은 법호이다.
그는 김제군 만경면 화포리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는데
화포리는 옛날, 불거촌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불거(佛居)가 불개(火浦)로 변한 것으로
부처님이 살았던 마을이란 의미이다.
서산 대사와 쌍벽을 이룰 만큼, 뛰어난 고승이지만
깊은 산중에서 은둔하고 지낸 까닭으로
크게 역사에서 알려지지 않은 전설상의 인물처럼 되어버렸다.
서산, 사명 대사가 임진왜란 당시에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하기 위하여
승병을 모집하여 일본을 상대로 크나큰 업적을 이룬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가 주로 머문 사찰로는 변산 월명암(月明庵),
전주 원등사(遠燈寺), 대원사(大元寺) 등을 꼽을 수 있다.
대사가 사미(沙彌)시절,
김룡사에서 대중공양에 먹을 상추를 씻는데
김룡사에서 10여리 떨어진 대승사에서 불이나,
스님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고는
손에 든 상추를 들고, 물을 뿌려 불을 끄고 나니
상추는 먹지 못하게 되어 스님들의 호된 질책을 받았으나,
며칠 지난 후, "대승사"에서 온 스님이 김룡사에 볼일이 있어 들렀다가
대승사에 불이 났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불이 꺼졌는데
주변에 상추들이 널려 있었다고, 전하자...
사미의 신통력에 모두들 놀랐다고 하였다.
(일설에서는 해인사의 팔만 대장경을 모신 장경각에서
불이 나는 것을 관하고, 상추로 물을 뿌려
해인사 장경각의 화재를 막았다고 전한다.)
술을 즐겨 마신 진묵대사의 일화로
득남을 위해 백일기도를 하기로 결심하고
절을 찾아온 마을사람에게, 진묵대사는
“곡차를 가져다 주면 아들을 낳게 기도를 해 주겠다”고 해서
마을 사람은 곡차를 가져다가 진묵 대사께 드렸으나,
가져온 술만 마실 뿐...
진묵 대사는 한 번도 법당에 들어와 기도염불을 해주지 않았다.
백일기도가 거의 끝나갈 무렵
마을 사람은 진묵 대사를 찾아가
“스님께서는 곡차를 가져다주면,
아들을 낳기 위한 기도를 해 주시겠다고 하고는
매일 곡차만 드시고
기도는 안 해 주시니 너무 하십니다.”라고 말을 하자
진묵대사는 “그래...?! 그러면 내가 나한님에게
득남을 할 수 있게 부탁을 해 보겠습니다.”
진묵 대사는 그날로 나한전에 들어가
“이 마을에 한 보살이 아들 낳기가 소원인데,
한 번만 좀 들어주지.” 하면서 나한의 뺨들을 일일이 다 때렸다.
그날 밤 그 보살의 꿈에 나한들이 나타나서
“진묵 대사가 우리들의 뺨을 때려서
몹시 아프니, 득남의 소원은 들어 줄 테니
제발 진묵대사에게 다시는 그런 부탁은 하지 말라”라는
부탁을 하고 사라졌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그 보살님은 아들을 낳게 되었고
그 후, 많은 사람들이 그 절에서 기도를 한 후
신이한 영험을 보았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진묵대사는 7세에 전주, "봉서사"로 출가하여
명리엔 초연한 분으로,
참선(參禪)과 경전(經典)을 독송(讀誦)하는 일로
일생의 업으로 삼을 만큼, 수행(修行)에 전념하였다.
석가모니(釋迦牟尼)의 소화신(小化身)으로 추앙을 받을 정도로
법력(法力)이 출중하였으며, 술을 잘 마시기로 유명하여,
술에 관한 기행이나 설화도 많이 전해져 내려고 있으며.
기억력이 뛰어나 책장에 눈길만 한번 스쳐도
모두 외울 정도의 신통력으로 많은 이적(異跡)낳았다고 전한다.
다음은,
/진묵대사의 선시(禪詩)이다.
천금지석 산위침(天衾地席 山爲枕)
월촉운병 해작준(月觸雲屛 海作樽)
대취거연 잉기무(大醉居然 仍起舞)
각혐장수 괘곤륜(却嫌長袖 掛崑崙)
하늘은 이불이요, 대지는 잠자리로다
태산을 베개하고 구름을 병풍 삼으니
저 달은 촛불이요, 바다는 큰 술잔이로다
얼큰히 대취하여, 자리를 털고 일어나
어깨춤 덩실덩실 치려 하다가 마노니
행여나, 장삼자락이 곤륜산에 걸릴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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