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家

반란군도 감복시킨 충의장군 현득리

餘香堂 2015. 3. 27. 12:01

□■□ 반란군도 감복시킨 충의장군 현득리 □■□


‘이시애의 난’ 때 순절한 연주 현씨 현득리는 고려 때 조위총의 난에 공훈을 세웠으며 문하시랑 평장사(정2품 재신)를 지낸 현담윤의 후손이며, 세종 때 문과(文科, 대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가 된 현규의 셋째 아들이며 목사(牧使, 정3품 수령)를 지낸 현득원(玄得元)이 그의 형이다.
현득리는 세조 8년에 원종공신에 추록되었으며, 부사직(副司直, 5위의 종5품)을 거쳐 전주판관(判官, 종5품)을 역임했다.

현득리가 전주판관으로 재직할 때 관북의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시애의 아우 이시함은 조정에서 함경도민을 쓸어 죽이려고 하상도군을 동원해 북상중이라고 했다.
이시애는 함경도 병마절도사 강호문, 길주목사(정3품 수령) 설득신, 관찰사(종2품 지방장관) 신명을 죽였다. 함경도 군관 이속이 모두 이시애의 편이었기에 기세가 등등했다.
조정에서는 구성군 준으로 도총사를 임명하고 부사(副使)로 호조판서(정2품 장관) 조석문을 임명했다. 그 다음 강순 어유소, 남이를 대장으로 삼은 다음 육도 병정 3만 명을 징발해 함흥에 집결하도록 했고, 문무 장략이 있는 28인을 선발해 먼저 영흥에 파견했다. 이때 현득리는 전라도 병정 700명을 인솔해 함경도에 출전했다.

판관 현득리는 출전하는 날에 왼손 넷째 손가락을 잘라 부인 전씨(全氏)에게 주며 “내 죽음을 각오하고 역적을 치러 가오. 적이 강성하여 살아 돌아올 기약이 없으니 내 손가락을 주고 가는 바이오. 이 손가락이 혈색이 좋으면 내 살아 있는 것이고, 혈색이 죽으면 내가 죽은 것이니 그 때는 이 손가락으로 장사를 지내시오”라고 말하고 출정한 것으로 전해진다.
부인은 남편이 장도에 오르는데 마음을 어지럽게 할까 눈물을 감추고 붉은 피가 떨어지는 손가락을 비단에 싸서 소중히 간직했다.

그리고 하루에도 몇 차례씩 비단 주머니를 풀어 보았다. 다행히도 현득리가 출전한지 오래 되었는데도 선홍빛 손가락이 여전했다. 현득리 판관의 안부와는 관계없이 시간이 지나면 잘린 손가락이 변색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기이하게도 여전했다. 보통 사람의 손가락 같으면 하루만 지나도 변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출전한 후 달포가 되도록 손가락이 선홍빛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 전씨 부인은 세수를 하고 몸을 정결하게 한 후 단정하게 꿇어앉아 비단 주머니를 풀어보니 어제까지도 살아있던 손가락이 까맣게 죽어 있었다. 부인은 남편이 전사했다 생각하고 대성통곡했다. 하루가 지난 후 말 울음소리가 나서 나가보니 남편이 출정할 때 타고 간 말이 입에 화살을 물고 달려와 있었다.

부인은 이제는 판관공이 전사함이 틀림없으므로 의리를 챙기고 손가락을 염습해 장사를 지냈으며, 남편이 타던 말도 며칠 후 죽어 남편 묘 아래에 묻어주고 충마상을 세웠다.
판관 현득리는 함경도에 출전한 후 내소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적진 깊숙이 진격했다. 당시 함경도민은 모두 이시애 편이기에 고립무원 상태에서 좌충우돌하다가 화살이 떨어지고 칼도 부러졌다. 맨손이 된 현 판관에게 적은 항복할 것을 권고하다가 듣지 않자 격살하고 말았다.
당시 적도들은 현 판관의 의연한 죽음을 보고 “충의장군 현득리를 이곳에 매장하다 사람들은 이곳에 우마를 놓아 밟는 일이 없도록 하라(忠義將軍 玄得利 埋北庭 人不放牛馬踐踏)”고 표목을 세웠다.

이 사실을 구암 이정선생이 후일 함경도 외직에 나가 고적기를 편찬했는데 이 책에 현득리 판관의 장렬한 죽음이 기록돼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현득리 판관은 부인 천안 전씨 처가의 인연으로 천안으로 이주해왔다고 하며 천안 풍세지역은 현 씨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한편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한 현규(玄珪)는 군자감정(軍資監正, 정3품)과 고부군수(古阜郡守, 종4품 수령)를 지냈는데 현규가 출세하게 되면서 그의 후손이 연주 현씨에서 분관하여 오래도록 살아온 성주를 본관으로 삼았기에 현규의 후손들은 ‘성주 현씨’로 불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