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家

고려사 : 열전 현덕수(玄德秀)

餘香堂 2015. 2. 21. 20:10

고려사 : 열전

현덕수(玄德秀)

현덕수(玄德秀)는 연주(延州 : 지금의 평안북도 영변군) 사람이다. 사람됨이 강직하고 귀인의 풍모에다 담략도 있었다. 그러나 의기를 자부하며 말을 과장되게 하므로 사람들로부터 간혹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비범하여 연주분도장군(延州分道將軍) 김치규(金稚圭)가 보고 특이한 인물로 여겨 개경으로 데려갔다. 책을 읽어 대의에 통달하였고 글도 잘 지었으나 여러 번 과거에 낙방하고 병까지 얻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명종 4년(1174) 조위총
(趙位寵)이 서경(西京 : 지금의 평양특별시)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절령(岊嶺 : 지금의 황해북도 황주군·봉산군·서흥군 사이에 있는 자비령) 이북 지방이 모두 조위총에게 호응했다. 현덕수가 그의 부친인 도령(都領)1) 현담윤(玄覃胤)과 함께 자기 고을의 장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옛날 거란(契丹)의 소손녕(蕭遜寧)이 침범했을 때 성들이 모두 항복하였으나 우리 고을만 당당하게 성을 지켰으니 그 공적의 기록이 왕실에 보관되어 있소. 이제 조위총이 역심을 품고 왕명을 거역하니 그의 죄는 천지간에 용납될 수 없소. 참으로 마음에 충의를 품은 사람이라면 어찌 차마 그를 따르겠소이까?”

이어 장수들과 함께 대궐을 향해 절을 올리고 만세를 연호한 후 성문을 굳게 닫고 지켰다. 조위총이 사람을 시켜,

“지금 북계(北界) 40여 성의 군대가 이미 이곳에 모였는데 유독 너희 성만 오지 않았으니 장차 정예병을 동원해 그 죄를 물을 것이다. 신중히 생각해 몇 사람의 말만 듣지 말고 군마를 정비해 속히 서경으로 오는 것이 좋을 것이다.”
라는 내용의 글을 보내 항복을 재촉했다. 성 안에서는 현덕수를 권행병마대사(權行兵馬臺事)로 추대하였고 현덕수는 연주 장군 언통(彦通) 등 서른 명을 보내 편지를 가지고 온 자를 잡아 죽였다. 조위총이 다시 글을 보내어,

“지금 군사를 일으킨 것은 장차 북쪽 국경의 여러 성을 구원하려는 것이다. 여러 성의 군사들이 이미 청천강(淸川江)에 도착했는데 너의 성만 오지 않았으니 장차 군사를 진격시켜 너희를 섬멸할 것이다.”
고 협박하자 연주 사람들의 마음이 크게 흉흉해졌으며 조위총과 내응하려는 자도 있었다. 그래서 현덕수가 맹주(猛州 : 지금의 평안남도 맹산군)의 장수와 향리의 명의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거짓으로 작성해 몰래 성 밖에 사는 사람을 시켜 성 안으로 던지게 하였다.

“개경의 군대 10령이 이미 철령(鐵嶺 : 지금의 강원도 고산군과 회양군 사이의 철령)을 넘어 동계(東界)로부터 곧 서경을 공격할 것이다. 조위총의 허위문서를 받은 고을들은 경솔히 군대를 움직이지 말고 각자의 고을을 굳게 지키면서 경군을 기다리라.”

그 글을 본 성안 사람들은 딴 마음을 품지 않게 되었다. 현덕수는 연주부사(延州副使) 최박문(崔博文)과 판관(判官) 안지언(安之彦), 김공유(金公裕) 등과 함께 군사를 나누어 성문마다 진을 치고 수비하고 있었다.

병마사 차중규(車仲圭)가 연주로 오는 길에 운반역(雲畔驛)에서 운주(雲州 : 지금의 평안북도 운산군) 사람들에게 살해당하자, 분대감찰어사(分臺監察御史) 임탁재(林擢材)와 녹사(錄事) 이당취(李唐就) 등이 병마사의 인장(印章)을 챙겨 연주로 찾아와서 “병마사가 이미 죽었으니 우리들은 갈 곳이 없습니다. 우리들을 살려주십시오.”라고 애원했다. 이렇게 되자 연주 사람들은 현덕수의 동생인 선지별감(宣旨別監)·용호군장군(龍虎軍將軍) 현이후(玄利厚)를 병마사 권한대행으로 삼고, 현덕수에게 감창사(監倉使)2)
일을 대행하게 하였으며, 이당취에게는 그대로 병마녹사를 보게 하는 등 각 부서들을 재배치하고 엄중히 성을 지켰다.

안북도호도령(安北都護都領) 강우문(姜遇文)과 34성의 도령들이 연주의 장수와 향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왔다.

“개경에서 장차 대군을 동원해 북부 국경의 여러 성을 토벌하려 하고 있다. 우리 성들은 실상 아무 죄도 없기 때문에 서경의 조상서(趙尙書 : 조위총)가 안타깝게 생각한 나머지 우리들을 구원하려고 병사들과 군마를 소집한 것이다. 그런데 귀성에서만 오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만약 딴 마음을 품고 복종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 일족을 깡그리 죽일 것이니 군대를 인솔하고 서경으로 달려와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하라.”

또 운주낭장(雲州郞將) 군우(君禹)도 변맹(邊孟)을 보내 편지로 설득해 왔다.

“서경에서 파견한 관원들이 40여 성의 군사와 사원들의 승병 1만여 명을 끌고 와 귀성을 공격하려 하니, 신중히 생각하여 속히 오도록 하라.”

그러나 임탁재가 변맹의 머리를 베어 성 밖에 걸어두었다. 잠시 후 서경 군대가 연주성을 공격해 왔으나 임탁재가 격파하였다. 저녁이 되자 서경 군사들이 다시 성 남쪽에 진을 치고서 이렇게 외쳤다.

“동북 여러 성들이 거병한 것은 이 나라를 바로잡고자 함인데, 너희들만 호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려 왔다. 현이후 형제와 임탁재·이당취 등을 죽인 후 성문을 열어 항복하는 사람에게는 후한 상을 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도륙하겠다.”

현덕수가 남문으로 나와 공격하자 서경 군사들은 마침내 성을 포기하고 바로 개경을 향해 진격하였다. 개경 서쪽에 도착한 직후 이의방
(李義方)에게 패배 당하자 그들은, “비록 개경에서는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연주는 작은 성이면서도 오랫동안 함락시키지 못했으니 불가불 토벌해야 한다.”고 하면서 다시 연주로 달려와서 몇 겹으로 포위했다. 현덕수가 고용지(高勇之)3)와 이당취를 시켜 급습하게 하여 적을 대파하였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서경 군사들이 다시 공격해 오자 현덕수도 출전하여 적을 크게 격파하고 병장기를 셀 수 없이 노획하였다.

이듬해 금나라가 고라(高羅)를 시켜 군대를 이끌고 연주 부근에 진을 치게 하자, 성안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고라가,

“우리 황제께서, 너희 나라 국경에 있는 고을들이 국왕의 명령을 거역했는데 연주성만 그들을 따르지 않아 오랫동안 적도들의 위협을 받으며 형세가 심히 위급하다는 보고를 들으셨다. 이에 나에게 분부해 군대를 인솔하고 가서 도와주라는 명령을 하셨으니 달리 의심하지 말라.”
고 알려왔다. 현담윤은 평소 금나라 사람에게 은정과 신의가 있는 사람으로 소문나 있었기에 그의 군영으로 가 사정을 알렸다. 고라가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 황제께서 보고받은 것이 과연 맞았다. 위급한 일이 있으면 내가 응당 도울 것이니 그대들은 충성과 의리를 다해 한마음으로 왕실을 보호하라.”
고 격려한 후 돌아갔다. 서경군에 소속된 여러 성의 군대가 다시 연주를 공격했으나 현덕수가 또 격파하였다. 이에 왕은 현담윤을 장군으로, 안북호장 노문유(魯文腴)를 합문지후(閤門祗候)로 임명하여 향리에 살게 하였다. 또 현덕수를 내시지후(內侍祗候)로 삼았으며 안북도령(安北都領) 송자청(宋子淸)4)
·문신로(文臣老)·강우문(姜遇文)에게는 공로에 따라 관직과 상을 주고 모두 개경에 살게 했다. 애초에 안북지역이 조위총 편에 섰다가 나중에 그들과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현덕수가 글을 올려, 지후의 고신(告身 : 임명장)을 반납한 후 과거를 치르겠다고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얼마 후 안남도호부사(安南都護副使)로 나가 청렴하고 공명정대하게 다스렸으므로 향리와 백성들이 그를 존경하고 두려워했다. 현덕수는 음사(淫祀)를 몹시 싫어하여 엄격히 금지했기 때문에 무당들은 그 고을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어떤 향리가 여자 무당과 그의 남편을 잡아들이자 현덕수가 무당을 문초하고 나서 동료들을 돌아보면서 “이 무당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다.” 하고 일러주었다. 동료들이 “여자가 아닌데 어찌 남편이 있는가?” 하고 웃자 현덕수가 무당의 옷을 벗겨 보게 하니 과연 남자였다. 앞서 무당들이 사족(士族)의 집에 드나들면서 몰래 부녀들을 난행했으나 욕을 당한 여자들이 수치스럽게 여겨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못하였고 이를 기회삼아 놈들이 곳곳에서 더러운 음행을 자행했던 것이다. 그래서야 온 고을 사람들이 현덕수의 귀신같은 안목에 감탄하였다.

내직으로 들어가 도관낭중(都官郞中)으로 있을 때, 산원동정(散員同正) 노극청(盧克淸)이 가세가 빈한한 나머지 집을 팔려 했으나 잘 팔리지 않았다. 노극청이 일이 있어서 지방으로 간 사이 그의 처가 현덕수에게 백금(白金 : 은) 12근을 받고 집을 팔았다.5)
집에 돌아와 이를 안 노극청이 현덕수에게,

“내가 당초에 은 9근으로 이 집을 사서 여러 해 살면서 칸수를 늘리지도 않고 보수도 하지 않았으면서 이제 12근을 받았으니 그게 어찌 옳은 일이겠소? 나머지를 돌려주겠소.”
라고 하자 현덕수가, “당신이 의롭게 살아가는데 내가 어찌 홀로 의를 지키지 않겠는가?”라며 받지 않았다. 그러자 노극청이,

“내 평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는 터에, 어찌 헐값에 사들여 비싸게 팔아 추한 돈벌이를 하겠소? 만일 당신이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집값을 전부 돌려주겠으니 내 집을 돌려주시오.”
라고 하자 현덕수는 어쩔 수 없이 차액을 돌려받았다. 그리고는 “내가 노극청만 못해서야 되겠는가?”하며 사원에 시주해 버리니, 이 일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요즘 세상에도 그런 사람들을 볼 수 있구나!” 하고 감탄했다.

뒤에 이부낭중(吏部郎中)으로 임명되자 간관(諫官)이 “변방 출신의 사람에게 그런 관직을 주는 것은 부당하다.6)
”고 반대했기 때문에 병부낭중(兵部郞中)으로 고쳐 임명했다가 사재소경(司宰小卿)으로 전임시켰다. 그러나 처의 양모가 죽은 것을 친모라고 거짓 보고했던 일이 밝혀져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신종 때 전중감(殿中監)으로 다시 임명되었고 여러 번 승진해 병부상서(兵部尙書)까지 지내다 사직한 후 고종 2년(1215)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