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遊靑鶴山記 : 栗谷先生

餘香堂 2015. 5. 29. 15:07

遊靑鶴山記 044_280b : 栗谷先生全書卷之十三


隆慶己巳。余休官。省祖母于江陵。與鄕人語及泉石。余曰。大嶺以東遊觀者。必稱寒松, 鏡浦。此皆江海之勝耳。不聞有洞天溪壑。可棲幽貞者。蓋有之矣。我未之見也。朴宥大宥在旁曰。吾聞之。張上舍汝弼。連谷縣之西。有山來自五臺。蟠根百餘里。中有洞壑。甚淸勝。深處有靑鶴。棲于巖峯上。此眞仙境也。只是遊人不到。故隱而不耀耳。余聞之。不覺爽然。遂定尋幽之計。權表丈有亭在海上。名曰無盡。表丈先往相待。余與舍弟瑋季獻踵焉。時夏四月望前一日也。亭下長川。迤邐入海。海口多嵒石。可爲釣磯。表丈指川曰。川源出自五臺之北臺。沿流而入。可見鶴巢。鄕人云。黃昏泛小艇。張汝弼仲鄰亦與焉。白沙隔海。月色如晝。風止波恬。放棹中流。擧酒向月而相屬。夜深還亭。明日。表丈及余季獻仲鄰聯轡而行。過白雲遷。至兔谷之口。路旁巖流。挾以樹陰。下馬而憩。溪上有丘可構屋。余謂表丈曰。若成茅齋數椽于此丘。則可作幽棲之所矣。余等倚嵒數游魚。良久不發。朴大宥策馬追到。使童僕拾榾柮。炊飯于沙上。遇虞人問路。使之前導。行到曲淵。絶壁中拆。驚湍下注。環回作潭。水色蒼黑。旁巖俯窺。凜然神悸。復踰二난001嶺。凡行三十餘里。一嶺甚高峻。緣路水石。轉入轉奇。眼眩不可悉記。蓋兔谷以西。造化漸施巧手。以爲鶴巢巖張本矣。嶺下平郊。方可三四里。羣峯擁翠。一溪繞碧。寒巖秀異。喬木扶疏。有一草屋。籬落蕭條。若隱者之室。刳木受泉。以爲水碓。余等徘徊顧瞻。頗有遺世絶俗之思。復行五里餘。得僧舍而休焉。板屋甚溫。老僧指林閒細逕曰。從此行數十步。有一佳境。余等尾老僧而往。果見翠崖削瓜。飛泉噴雪。逍遙石上。手撫孤松。暝色蒼然。乃還僧舍。名其潭曰漲雲。有僧智正者。慣踏山路。招問其狀。正曰。自此西行四里許有鳥道。名曰觀音。遷其西有石門。石門內有食堂巖。巖西有山城。雉堞宛然。復行五里許。乃有石峯突起。勢摩九霄者凡三。挾以雲壁。雪色嵯峨。淸流瀉其閒。峯上有靑鶴巢。但石棧甚危。一跌便落千仞矣。明朝。余等輕服芒鞋。策杖而出。智正與虞人啓行。山逕茅塞。加以落葉。殊不可辨。沿川履石。極其艱險。行未幾。已見奇峯疊石。氣象頓異。得一綫路。橫繞高岡。攀木而登。望見雲岑縹緲。林壑窈冥。奔流戛玉。乍隱乍現。不知洞府之幽邃。又隔幾許也。虞人曰。此是觀音遷第一巖也。峯回路斷。碧崖當前。緣崖腹而過。下有深淵。余與季獻匍匐僅度。大宥先往顧笑。下岡乃至石門。圓巖架于崖角。巖下有竇。僅可低頭而入。旣入石門。境色尤奇。慌然別一世界也。四顧皆峙石山。翠柏矮松。縫其罅隙。兩屏之閒。川源甚遠。激而爲瀑。晴雷振壑。渟而作淵。寒鏡絶瑕。泓澄瑩綠。落葉不著。回流曲曲。石狀千變。山陰樹影。雜以嵐氣。翳翳然不見日光矣。散步白石。玩弄晴漪。欲選勝而未領其要。移席者屢。最後得一巖。平廣有階選勝而未顩謂其。移席者屢。最後得一巖。平廣有階級。列坐其上。設小酌。仰見直西一峯。最高異狀。創名之曰矗雲峯。巖名舊曰食堂。改之曰祕仙。名其洞曰天遊。巖下之潭曰鏡潭。摠名其山曰靑鶴。余等欲歷山城。以訪鶴巢。適有雨意。恐山蹊益惡。悵然中止。還尋歸路。十步九顧。余與大宥。約繼淸游。未至僧舍五十餘步。坐溪上盤陀石午飯。出山至兔谷。權愼謹仲。携酒相候于路畔層巖。巖側垂瀑可丈餘。觴于巖上。名之曰醉仙巖。乘夕還無盡亭。噫。自有天地。便有此山。天地之闢。亦已久矣。尙未名于世。山城之築。未知何代。想其經始者。不過避亂之吏民而已。若有幽人逸士。一扣石門。則豈無一言留於後耶。抑雖有其人。而世失其傳耶。彼五臺, 頭陀等山。譬之於此。風斯下矣。猶且揚休播美。觀者接武。玆山乃藏光匿輝於重巒複壑之中。無人闖其封域。況閫奧乎。世人之知不知。於山無所損益也。顧物理不當爾也。一朝遇吾輩。使後人知有此山。斯亦有數焉耳。又安知更有靈境祕於塵外。尤異於此山。而吾輩亦未之知耶。嗚呼。世有遇不遇者。獨山乎哉。



융경(隆慶) 기사년(1569)에 내가 벼슬을 그만 두고 강릉(江陵)으로 조모님을 뵈러 갔다가 마침 향리(鄕里)사람들과 더불어 경치 좋은 천석(泉石)에 대하여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다.


내가 말하기를, "대관령(大關嶺) 이동(以東)으로는 유람하는 이들이 으레 한송정(寒松亭)과 경포대(鏡浦臺)를 일컫는데, 이는 다 강해(江海)의 승경(勝景)일 뿐이다. 동천(洞天)과 계학(溪壑) 중에 고인(高人)이 서식(棲息)할만한 곳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혹 있어도 내가 아직 보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였다.


박 대유가 옆에 있다가 말하기를, "내가 장 상사 여필(張上舍 汝弼)에게 들으니, '연곡현(連谷縣) 서쪽에 오대산(五臺山)으로부터 백여 리를 뻗어 내려온 산이 있고 그 가운데 동학(洞壑)이 있어 매우 맑으며, 그 유심(幽深)한 곳에 청학(靑鶴)이 암봉(岩峯) 위에 깃들이고 있으니, 참으로 선경(仙境)이나 유람하는 사람이 이르지 않으므로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심신이 시원하여졌다. 드디어 이 유심(幽深)한 곳을 찾아보기로 계획을 정하였다. 마침 권 표장(權表丈: 율곡의 서모가 권씨이므로 서외숙을 이름)의 정자(亭子)가 해상(海上)에 있는데, 이름을 '무진(無盡)'이라 하였다. 외숙이 먼저 가서 서로 기다리기로 하고, 나와 아우 위 계헌(瑋季獻: 위는 이름 계헌은 자)은 뒤따라갔다. 때는 첫여름 4월 보름 하루 전이었다.


정자 아래는 긴 냇물이 옆으로 뻗쳐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 입구에는 암석이 많아서 낚시터가 될 만하였다. 외숙이 냇물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냇물의 근원이 오대산 북대(北臺)에서 나왔는데 그 흐름을 따라 들어가면 학소(鶴巢: 학의 둥지)를 볼 수 있다고 향인들은 말한다."고 하였다.


황혼에 작은 배를 띄웠는데, 장 여필 중린(張汝弼仲鄰)도 함께 참여하였다. 흰 모래는 바다를 막고 있으며 달빛은 낮과 같았고, 바람은 그치고 물결은 고요했다. 노를 저어 중류(中流)에 이르러 술을 들고 달을 향하여 서로 마시고 깊어서야 정사로 돌아왔다.


그 이튿날에 표장 및 나와 계헌·중린이 고삐를 연이어 백운천(白雲遷)을 지나 토곡(兎谷) 입구에 당도하니, 길가 암석 위로 흐르는 물에 나무 그늘이 덮여 있었다. 말에서 내려 쉬는데, 계곡 위에는 초옥(草屋)을 얽을 만한 언덕이 있었다.


내가 외숙을 보고 말하기를, "만약 몇 칸의 모옥(茅屋)을 이 언덕 위에 지으면 은거(隱居)할 곳이 될 만하다." 하였다.


우리가 암석에 의지하여 물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세면서 한참 동안 머물러 있는데, 박 대유(朴大宥)가 말을 몰아 뒤쫓아 이르렀다. 동복(童僕)을 시켜 삭정이를 주워 모래 위에서 밥을 지어먹었다. 우인(虞人: 옛날에 산림(山林)등을 관리하던 사람)을 만나 길을 묻고 그를 전도(前導)로 삼아 곡연(曲淵)에 이르니, 절벽이 갈라진 곳에 거센 물이 쏟아져 내려 빙 돌아 못을 이루었는데, 물빛이 검푸르렀다. 바위 곁을 굽어보니, 늠연(凜然)히 정신이 오싹하였다.


다시 두 고개를 넘어 30여 리쯤 걸어가니, 한 고개가 대단히 높고 길가의 수석(水石)이 깊이 들어갈수록 더욱 기이하여, 눈이 어지러워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다. 대개 토곡(兎谷)에서부터 서쪽으로 오면서 하늘의 조화가 점차 교묘한 솜씨를 보여서 학소암(鶴巢巖)을 형성할 바탕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고개 밑에 펼쳐진 편편한 들판은 사방 3∼4리쯤 되어 보였다. 여러 봉우리는 푸른빛으로 싸이고 한 시내에 푸른빛이 둘렸으며, 한랭(寒冷)한 바위가 뻗어나고 큰 나무들이 무성한 가운데 한 채의 초옥(草屋)이 있는데 울타리가 쓸쓸하여 마치 은자(隱者)의 집과 같았고, 통나무를 쪼개 홈통을 만들어 물을 받아서 물방아를 만들었다. 우리는 두루 배회하며 둘러보는 사이에 세속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시 걸어서 5리 남짓한 곳에 이르러 승사(僧舍)를 찾아 쉬었는데, 판옥(板屋:판자로 이은 집)이 매우 따뜻하였다. 노승(老僧)이 숲 사이로 보이는 작은 길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 길로부터 수십 보를 가면 한 아름다운 곳이 있다."하였다.


우리가 그 노승을 따라 가보니, 과연 푸른 낭떠러지가 오이(爪)를 깎아 세운 듯하고 날아 떨어지는 천류(泉流)가 백설(白雪)을 뿜어내었다. 암석 위에 소요(逍遙: 고요히 왔다 갔다 함)하며 외로운 소나무를 어루만지다가, 해가 지고 어둠이 깔려서야 승사로 돌아와서 그 못을 '창운(漲雲)'이라 이름 하였다.


중 지정(智正)이 산길에 익숙하다 하기에 그를 불러 그 상황을 물어 보았더니, 지정이 말하기를, "여기서부터 서쪽으로 4리쯤 가면 조도(鳥道: 새라야 지나갈 수 있을 만한 험한 길)가 있어 그 이름을 '관음천(觀音遷)'이라 하고 그 서쪽에 석문(石門)이 있으며 석문 안에 식당암(食堂巖)이 있고 식당암 서쪽에 산성(山城)이 있어 성가퀴(雉堞)가 지금도 완연하다.


다시 5리쯤 가니 석봉(石峯)이 우뚝 솟았다. 그 중에 구소(九宵: 하늘의 제일 높은 곳)에 닿을 만한 봉우리가 무릇 셋으로 운벽(雲壁: 구름의 벽을 이룬 산)이 둘렀고 설색(雪色:역시 눈빛과 같은 산을 이름)이 험준한데, 맑은 물이 그 사이에서 쏟아지고 있으며, 그 봉우리 위에는 청학소(靑鶴巢: 청학의 둥지)가 있으나 석잔(石棧:돌로 된 잔도)이 매우 위태로워 한 번 헛딛으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 이튿날 아침에 우리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짚신에 지팡이를 짚고 나섰다. 지정(智正)이 우인(虞人)과 함께 길을 인도하였다. 산길이 잡초로 막힌 데다가 낙엽이 덮여 분간할 수 없으므로 냇물을 따라 돌을 밟아 가는 길이 더없이 험난하였다. 걸어간 지 얼마 안되어 기이한 봉우리와 첩첩이 쌓인 돌이 있어 그 기상(氣象)이 매우 특이하였다.


한 가닥의 작은 길을 찾아 멧부리를 돌아 나무를 더위잡고 올라가 바라보니, 구름에 쌓인 멧부리는 아득하고 임목(林木)에 덮인 산학(山壑)이 깊숙하며, 거세게 흐르는 계곡 물이 옥을 부딪치는 소리를 내어 숨을락 보일락 하므로, 동부(洞府)가 얼마나 조용하고 깊숙한지 알 수 없으며, 또 그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알 길이 없다.


우인이 말하기를, "이는 관음천(觀音遷)의 제 1암(第一巖)이다. 봉우리 도는 곳에 길이 끊기고 푸르른 벼랑이 앞에 닿는데, 그 벼랑의 중턱을 따라 지나 내려가면 깊은 못이 있다."고 하였다.


나와 계헌이 기어서 겨우 건너가는데, 대유(大宥)가 먼저 가서 뒤돌아보고 웃는다. 멧부리를 내려와 석문에 이르니, 둥근 바위가 돌 언저리에 걸쳐 있고, 바위 아래에는 구멍이 나 있었다. 겨우 머리를 숙이고 걸어서 석문(石門)을 들어서니, 그 경색(境色)이 더욱 기이하여 황연(慌然)히 딴 세계였다.


사방을 두루 돌아보니, 모두 석산(石山)이 솟아 있고 푸른 잣나무와 키 작은 소나무가 그 틈바구니를 누비고 있었다. 석산이 양쪽으로 병풍처럼 둘러쳐진 가운데 냇물의 근원이 매우 먼데, 수세(水勢)가 거센 곳에 폭포를 이루어 맑은 하늘에 천둥소리가 계곡을 뒤흔드는 듯하고 고인 곳에는 못이 되어 차가운 거울에 얼이 없는 듯한가 하면, 깊고 맑고 아름답고 푸르러 낙엽이 붙지 못하고 휘돌아 흐르는 구비마다 암석 모양이 천변만화하고 산그늘과 나무 그림자에 이내가 섞여 어스레하여 햇빛이 보이지 않았다.


흰 돌 위를 거닐며 잔잔한 물살을 완상(玩賞)하면서 좋은 자리를 고르려 하였으나 그 요령을 얻지 못하고 여러 번 자리를 옮기다가 최후에 한 바위를 발견하였는데 편편하고 넓으며 층계가 있었다. 일행이 그 위에 앉아서 간단한 술자리를 베풀었다.


정서(正西)에 있는 한 봉우리를 우러러보니, 가장 놓고 모양이 특이하기에 이름을 '촉운봉(矗雲峯)'이라 하고, 이 바위의 이름을 옛적에 식당암(食堂巖)이라 하였던 것을 고쳐 '비선암(秘仙巖)'이라 하며, 동부(洞府)의 이름을 '천유(天遊)'라 하고, 바위 아래 있는 못을 '경담(鏡潭)'이라 하며, 산 전체를 '청학산(靑鶴山)'이라 이름 하였다.


우리가 산성(山城)을 답사하여 학소(鶴巢)를 탐방하려 하였으나 마침 비가 올 기미가 있으므로 산길이 더욱 험악해질까 염려되어 섭섭하였으나 그만 중지하고 돌아오는 길을 찾는데 열 걸음에 아홉 번은 돌아보았다. 나는 대유와 더불어 이다음의 청유(淸遊)를 약속하였다. 승사(僧舍)와의 거리를 50보 쯤 두고, 시내 위 반타석(盤陀石: 평평하지 않은 바위)에 앉아 점심을 지어먹었다.


산을 나와 토곡(兎谷)에 이르니, 권 신 근중(權愼謹仲)이 술을 가지고 길가의 층암(層巖:층을 이룬 바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바위 옆에는 한 길 가량 되는 폭포가 드리워졌다. 이 바위에 앉아 술잔을 나누며 이름을 '취선암(醉仙巖)'이라 하였다. 저녁이 되어서야 무진정(無盡亭)으로 돌아왔다.


아! 천지가 있은 뒤로 이 산이 있었을 것이고, 천지의 개벽이 이미 오래 되었는데도 이 산은 아직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산성(山城)의 구축이 어느 시대에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아마 이를 처음 구축한 자는 피란(避亂)을 위한 관리나 백성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유인(幽人)이나 일사(逸士)가 한번 이 석문을 찾아 왔었다면 어찌 한 마디의 말도 후세에 남겨 놓은 것이 없겠는가? 아니면 혹 그러한 사람이 있었어도 이미 실전(失傳)되어 버린 것일까?


오대산이나 두타산(頭陀山) 등은 여기에 비유하면 그 품격이 낮은데도 오히려 이름을 떨치고 아름다움을 전파하여 관람하는 자가 끊이지 않는데, 이 산은 중첩된 봉우리와 동학(洞壑) 속에 그 광채를 감추고 숨겨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니, 하물며 그 웅성 깊은 곳이랴.


세상 사람들의 알거나 모르거나 산에 있어선 아무런 손익(損益)이 없지만 물리(物理)란 본시 그렇지 않다.


이번에 우리를 만나서 후세 사람이 이 산이 있는 줄 알게 되었으니, 이 또한 운수인 것이다.


또 이외에도 신령스러운 곳이 세속 밖에 비장되어 있어 이 산보다 더 기이한데,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 세상에 지기(知己)를 만나고 만나지 못하는 것이 어찌 산뿐이겠는가!         -옮긴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