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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왕실보의「서상기」

餘香堂 2015. 6. 2. 14:43

  아래의 글은 [네이버 지식백과] 「서상기(西廂記)」- 살아 한 이불, 죽어 한 무덤(『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휴머니스트, 2006)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이 내용은 전남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양회석 교수가 1996년에 도서출판 진원에서 낸 번역서 『서상기』에도 잘 나와 있습니다.

 

 

살아 한 이불, 죽어 한 무덤이기를

 

너랑 나랑, 너무 너무 다정했지. 정이 넘쳐, 불처럼 뜨거웠지.

진흙 한 덩이 쥐어다가, 너 하나를 빚고, 나 하나를 빚었기 때문이지.

이제 우리 둘을 함께 부숴 물에다 반죽하였다가,

다시 너 하나를 빚고, 다시 나 하나를 빚으리.

내 안에 네가 있고, 네 안에 내가 있도록.

살아서 너와 한 이불, 죽어서는 한 무덤이기를.

 

-관도승(菅道昇), 「아농사(我儂詞)」

 

  관도승은 원대 여류 예술가로, 당대 최고의 서예가 겸 화가로 꼽히는 조맹부(趙孟頫)의 부인이다. 예술적 취향이 같기 때문에 그들 부부의 금슬은 남달랐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 조맹부가 한 여인을 첩으로 들이고자 하였다. 아내 관도승이 점잖게 남편을 꾸짖어 사랑의 의미를 일깨운 것이 바로 이 시다. 조용히 조맹부는 허망한 욕심을 접었다. “내 안에 네가 있고, 네 안에 내가 있으니” 부부이고, 따라서 “살아서 한 이불, 죽어서는 한 무덤”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되새기면서.

 

  그런데 바로 이 대목은「서상기」의 여주인공인 앵앵(鶯鶯)이 연인 장생(張生)에게 들려주었던 유명한 대사이다. 또 “앵앵 안에 장생이 있고, 장생 안에 앵앵이 있는” 사랑 이야기가 바로「서상기」다. 따라서 관도승의 노래를 한 마디로 줄인다면, “「서상기」의 사랑을 본받아라”는 것이 된다. 왕실보(王實甫)의「서상기(西廂記)」는 이처럼 참사랑의 본보기로 당시 사람들에게 각인되어 있었다.

 

  암울한 세상에서 태어난 천하 명작

 

 「서상기(西廂記)」가 태어난 원나라 시대는 암울한 시기였다. 중국을 점령한 몽골족은 유목민족으로, 농경을 기반으로 하는 한족(漢族)의 전통문화와 가치관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 심지어 강남의 드넓은 농경지를 방목장으로 바꾸고자 할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민족을 구분하여 몽골인과 색목인(色目人), 한인(漢人), 남인(南人)의 순으로 차별하였고, 게다가 신분에 차등을 두어 선비, 즉 문인의 사회적 지위를 창기(唱妓) 아래 거지 위로 간주하였다.

 

 「서상기」의 작자 왕실보에 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는 것도 문인을 홀대하였던 당시 사회 풍조와 무관하지 않다. 암울한 시대를 살았던 왕실보의 삶의 편린을 후배 극작가 가중명(賈仲明)의 추도사에서 엿볼 수 있는데, 추도사는 그가 ‘풍월영(風月營)’, ‘앵화채(鶯花寨)’, ‘취홍향(翠紅鄕)’에서 맹활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청풍명월의 본영”이니, “꾀꼬리와 화초의 성채” 또는 “울긋불긋 꽃동네”라는 의미의 이러한 단어들은 기녀들의 거주지를 그럴싸하게 표현한 것이다. 당시 기녀들은 관에 소속된 관기(官妓)이자, 연극을 공연하는 배우였다.

 

  한편 원나라 때에는 상당 기간 과거 제도가 폐지되는 등 사회가 급변하면서 문인들은 전통적으로 누려오던 우월한 지위를 잃게 되었다. 입신양명의 길이 막힌, 적지 않은 문인들은 ‘서회(書會)’라 불리는 극작가 협회를 조직하여, 기녀들에게 극본을 제공하면서 공생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후배인 가중명의 추도사는 왕실보 역시 그러한 삶을 살았음을 말해준다. 좋은 작품에는 작가 개인의 삶은 물론이고 시대의 숨결이 투영되기 마련이다.

 

 「서상기」는 불우한 문인과 천시 받는 기녀의 간절한 소망을 여실히 담아내고 있는데, 이는 작가 자신의 실제 체험을 반영한 것이자, 또한 대중의 소망을 반영한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이 변질되어 버린 암울한 시대에서 왕실보는 남녀 주인공의 '참사랑'을 통하여 전통적인 삶의 방식과 가치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서상기」가 시공을 뛰어넘어 사랑을 받는 첫 번째 이유이다.

 

 「서상기」는 젊은 서생인 장생과 명문대가 규수인 앵앵의 사랑 이야기를 섬세한 감각과 유려한 필치로 그려낸 잡극(雜劇)1) 작품으로서 원나라 시대의 문학을 대표한다. 이후 「서상기」는 연극으로서 무대에서 상연됨과 동시에 문학작품으로서도 꾸준한 사랑을 받는다. 명(明)나라 초기의 극작가 겸 연극평론가인 가중명이, 기존 연극 중에서 “「서상기」가 천하 으뜸이다"고 단정한 것이나, 또 청(淸)나라 초기의 저명한 문학평론가이자 사상가인 김성탄(金聖嘆)이 무수한 역대 전적 중에서 유독 「서상기」를 지목하여 『이소(離騷)』『장자(莊子)』『사기(史記)』『두보 시(杜詩)』『수호전(水滸傳)』과 더불어 ‘육재자서(六才子書)’라 지칭하였던 것은 이러한 맥락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비록 일부 보수주의자가 “「서상기」는 음란함을 가르치고, 「수호전」은 도둑질을 가르친다”고 매도하면서 그것의 사회적 유통을 금지시키려 하였지만, 그럴수록 「서상기」의 명성은 오히려 높아만 갔고, 그 문학ㆍ예술적 위상은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21세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몽룡과 춘향을 모르는 한국인이 없듯이, 장생과 앵앵을 모르는 중국인은 없다. 뿐만 아니라 일찍이 조선 시대에 김정희(金正喜)가 언해본(諺解本)을 낸 것을 비롯하여, 19세기 이후 유럽의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ㆍ소개되면서 세계적인 명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책자로 나온『서상기』의 삽화

 

  귀족 남성의 ‘불장난’에서 선남선녀의 ‘참사랑’으로

 

 『삼국지』『수호전』등 중국을 대표하는 거작들이 그러하듯이「서상기」 역시 어느 날 한 사람의 손에 의해 갑자기 완성된 것은 아니다. 장생과 앵앵 이야기는 멀리 당나라 단편소설인 전기(傳奇) 「앵앵전(鶯鶯傳)」에서 비롯된다. 이 소설은 서기 799년에 원진(元稹)이 쓴 것으로,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장생은 글공부를 하러 보구사라는 절에 기거하게 되는데, 때마침 최 대감의 미망인 정씨 부인이 딸 앵앵과 아들 환랑을 데리고 절에 든다. 이때 인근에 있던 군대가 난을 일으키자, 부인은 집안을 보호하기 위해 먼 친척인 장생에게 도움을 청한다. 장생이 그 지역 사령관을 불러와 부인 일가는 무사히 난을 피하게 되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정씨 부인이 마련한 연회에서 장생은 앵앵을 만나 그녀의 빼어난 미모에 반하고 만다.

 

  연회 뒤 장생은 시녀 홍낭 편에 시를 보내어 앵앵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우여곡절 끝에 앵앵은 마음을 열고, 두 사람은 장생의 거처인 서상에서 밀회를 나누게 된다. 홍낭이 장생에게 정식 청혼을 하도록 권하고 두 사람의 사실혼 관계를 안 부인 역시 혼인을 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장생은 과거 급제 후 더 좋은 혼처를 기대하며 머뭇댄다. 결국 사랑은 깨지고,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 이후 장생은 마무리를 잘했다고 친구들에게 자랑한다.

 

  자전적인 이 소설은 당시 젊은 서생들의 연애 행각을 대변하는데, 철저히 남성적이고 귀족적인 입장을 보여준다. 목전의 연애와 장래의 출세 사이에서 갈등하는 서생들의 혼전 연애는 왕왕 비극으로 끝나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과거에 합격하면 통상 고관 명문의 사위로 발탁될 가능성이 높았고 그 때문에 급제 이전의 결혼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젊은 혈기의 서생들이 이성에 이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어서 혼전 연애는 왕왕 일어났다. 물론 급제하면 출세에 유리한 규수를 찾아 사랑하던 여인을 떠나기 십상이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비극이 발생하는데, 그 고통은 언제나 여인의 몫이었다.

 

  장생은 앵앵을 버린 뒤에도 여전히 흥미진진하게 들먹거리며 심지어 “지난 잘못을 잘 고쳤다”고 친구들에게 자랑한다. 반면에 앵앵은 “오열하며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로 단념할 따름이었다. 남성의 시각에서 보면 「앵앵전」은 멋진 로맨스일 테지만, 사회적 통념에서 볼 때 장생의 사랑은 무책임한 '불장난'에 다름 아니다. 특히 자신의 배신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사랑하던 여인을 남자의 앞날을 망칠 ‘요물’이라고 매도하기까지 하는 장생의 태도는, 여성의 입장은 말할 것도 없고 상식적인 독자가 보기에도 반감을 자아낸다.

 

  민간예인(民間藝人)의 손으로 넘어오면서「앵앵전」의 이러한 애정관은 변모하게 된다. 중국에는 당나라 말기에서 오대(五代)를 거쳐 송나라 시기에 접어들면서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바탕으로 전국적으로 많은 대도시가 형성되었다. 여기에 모여든 상공업 종사자들은 자연스레 시민 계층으로 성장하였으며 그에 따라 대중 예술도 활발하게 일어났는데, 당시 성행한 여러 대중예술 가운데 「서상기」와 관련하여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설창(說唱)이다. 장생과 앵앵의 사랑이야기도 설창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사랑을 파기하는 남성중심적인 태도 때문에 줄거리에 약간의 변화가 일어났다. 즉, 대중은 사회적 약자에 속하는 앵앵의 불행한 결말을 달갑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대중이 듣고 싶은 것은 귀족 남성의 '불장난'이 아니라, 평생의 부부로 이어지는 선남선녀의 '참사랑'이었다. 이와 같이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장생과 앵앵의 사랑이야기는 새롭고 풍부한 내용이 보태지고, 비극적 결말에서 행복한 대단원으로 환골탈태(換骨奪胎)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설창 예술의 성취를 집대성하여, 잡극「서상기」의 탄생에 결정적인 디딤돌을 놓은 사람은 금(金)나라의 이야기꾼 동해원(董解元)이었다. 그는 제궁조(諸宮調)라는 설창예술로 대중의 취향에 맞춰 재구성된 이야기를 연창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를「서상기제궁조」또는「동해원서상기」라 부르며, 줄여서「동서상(董西廂)」이라 칭한다. 「동서상」은 사건, 인물형상, 주제 등에서「서상기」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다만, 반란군과의 전투 장면이 전체의 1/6에 달할 정도로 번잡하고 장생이 지나치게 경박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으며, 일부 말투가 인물의 신분에 부합되지 않는 등의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게다가 제궁조는 이야기꾼 혼자서 연창하는 것이기에, 연극에 비해 생동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책자『서상기』의 표지

 

「동서상」의 이러한 문제점과 한계를 일소한 것이 바로 왕실보의「서상기」다. 제궁조 「동서상」이 잡극 「서상기」로 전환되는 과정은, 20세기 초 우리의「춘향전」이 판소리에서 창극으로 바뀌는 과정과 닮은꼴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결코 단순한 번안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왕실보는 뛰어난 글재주와 노련한 극작술로 흔한 사랑 이야기를 동서고금에 손꼽히는 명작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인인 왕실보가「앵앵전」의 남성중심적인 애정관을 부정하고「동서상」의 대중적 취향을 채택했을까?

 

  이는 앞서 지적하였듯이 입신공명의 길이 막혀 암울한 시대를 사는 문인으로 기녀(배우)들과 공생적인 삶을 영위하였던 그의 인생 경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즉, 「앵앵전」에서 앵앵은 남성중심적인 불장난의 희생물에 불과하지만「서상기」에서 두 사람은 대등한 입장에서 ‘참사랑’을 하다가 마침내 과거 급제 후 백년가약을 맺게 되는데, 이러한 전환은 문인의 소망(과거 급제)과 기녀의 갈망(백년가약)이 투영된 결과인 것이다. 좀 확대시켜 말하자면,「서상기」는 원작「앵앵전」의 귀족적이고 남성적인 애정관을 탈피하여 대중의 보편적인 인생관을 담아냄으로써 명실상부하게 중국 고전극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시공을 뛰어넘는, 아름다운 인물 형상과 강한 울림

 

  원대 잡극은 대부분 1본(本) 4절(折) 3인데 반하여, 「서상기」는 보통 작품의 다섯 배에 달하는 5본 20절로 파격적인 장편이다. 그러나 줄거리는 의외로 간단하다.

 

  보구사에서 마주친 장생과 앵앵은 피차 호감을 갖는다.(제1본)

  노부인이 반란군을 물리친 자에게 딸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장생이 위기를 해결하자 정항과의 약혼 사실을 들어 번복한다.(제2본)

  상사병으로 식음을 전폐하는 장생 때문에 앵앵은 갈등하고, 홍낭은 두 사람을 결합시키기 위해 노력한다.(제3본)

  마침내 두 사람은 부부관계를 맺는다. 이를 안 노부인은 장생에게 과거 급제를 결혼 조건으로 내건다.(제4본)

  과거 급제 후 장생이 금의환향하는데, 정항이 모함하여 앵앵을 빼앗으려 한다. 결국 정항은 자결하고 두 사람은 백년가약을 맺는다.(제5본)

 

  어느 날 우연히 만나 첫눈에 반한 선남선녀가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행복한 가정을 이룬다는 내용인데, 사실 이러한 식의 이야기는 식상할 정도로 비일비재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상기」가 명작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차적으로는 매력적인 극중 인물의 형상화와 보편적인 소망을 담은 강한 메시지를 들어야 할 것 같다.

 

  극본은 참사랑을 실천하는 청춘남녀의 모습을 성공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여주인공 앵앵은 다정다감하면서도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다. 그녀는 부모가 큰 그릇이 못되는 외사촌 오빠와 정혼한데에 불만을 가지고 있지만, 시름에 싸여 말없이 동풍(東風)만을 원망할 따름이다. 그러나 그녀의 속내를 알지 못하는 노부인은 홍낭과 함께 보구사에 가서 바람이나 쐬다 오라고 한다. 외부 세계와 차단된 채 살아온 그녀가 학식과 기상을 겸비한 장생을 만나자 호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앵앵은 결코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법이 없다. 장생의 글재주와 거문고 솜씨에 감탄하고 또 반란군을 물리치는 능력을 목도하면서 서서히 장생을 향해 자신의 마음을 열어간다.

마침내 장생이 자신 때문에 식음을 전폐하고 사경을 헤맬 때, 그녀는 참사랑을 확신하고 스스로 장생의 침소를 찾아든다. 영민하고 기지 넘치는 그녀는 이러한 과정에서 시종일관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장생과 편지를 주고받는 일련의 장면에서, “그이를 죽이고 살리고 한다”는 홍낭의 말처럼 장생의 마음을 휘어잡는 한편, 홍낭을 구슬려 사랑의 가교를 놓게 한다. 이렇게 그녀는 주동적으로 사랑을 설계하고 굳건하게 다져나간다. 이러한 면은「앵앵전」 속의 앵앵과는 뚜렷이 구분된다. 그녀는 더 이상「앵앵전」속의 피동적인 여인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주도하는 주체적인 여성이어서, 오늘날까지도 깊은 인상을 심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장생은 기상과 재능을 겸비한 서생이다. 도도한 황하의 물결을 굽어보며 자신의 큰 포부를 노래하는 데서, 또 반란군으로 인한 위기를 해결하며 자신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데서 우리는 장생이 듬직한 사내대장부임을 발견하게 된다. 반면 그는 앵앵 앞에 나서기만 하면 안절부절 허둥대는데,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는 오히려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게 된다. 앵앵에 대한 그의 마음은 변함없는 것이어서 사랑을 얻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여기지만, 외모 따위에 집착하는 육감적인 사랑이 결코 아니다. 꽃길에 찍힌 앵앵의 발자국을 보고 그녀의 마음을 헤아릴 정도로 섬세하고 예민한 감각을 통하여 그녀의 내적 아름다움을 확인하였기에, 과거 응시도 포기하고 죽음마저 불사하는 것이다. 봉건 사회에서「앵앵전」의 장생처럼 남자가 재주는 있되 덕이 없다면, 혼전 연애는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서상기」의 장생은 다르다. 재주와 덕을 겸비한 그의 모습은 예나 오늘이나 참사랑의 귀감을 보여주고 있다.

 

  봉건 사회에서 명문대가의 규수는 언제나 삼엄한 감시를 받기 때문에, 자유연애는 꿈도 꾸지 못하는 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녀 홍낭의 역할이 크게 빛을 발한다. 처음 홍낭은 노부인의 명령을 받아 앵앵을 철저히 감시한다. 훗날 노부인의 허위와 가식을 알아채고 장생과 앵앵의 참사랑을 확인하자 그녀는 적극적으로 두 사람의 사랑을 후원하는데, 이때 그녀의 열정적인 성격이 잘 드러나고 있다.

 

  또 노부인과 정항이 두 사람의 사랑을 가로막을 때면 어김없이 나서서 대항함으로써 용감하고 재치 넘치는 모습을 한껏 보여준다. 특히 상전인 노부인과 귀족 청년 정항의 허점을 꼬집는 장면들은, 우리나라 탈춤의 말뚝이처럼 극적 재미를 배가시켜 준다. 따라서 열정적이고 용감한데다 영민하기까지 한 홍낭은 비록 조연이지만 주연 못지않게 매력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현대 중국어에서 홍낭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남을 도와주는 사람’이라는 뜻의 일반명사로 쓰일 정도로 오늘날에도 대중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이상 세 젊은이는 각각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노부인과 정항으로 대변되는 기성관념에 대항하여 참사랑을 쟁취해 나간다는 점에서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동지들이다. 일반적으로 갈등이 없다면 연극도 없다고 말한다. 그들의 사랑 역시 그것을 가로막는 반대 세력에 의해 시련을 겪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단단해진다.「서상기」의 주요 갈등은 '참사랑'을 추구하는 쪽과 가로막는 쪽 사이에서 전개되는데 가로막는 쪽의 대표는 앵앵의 어머니다.

 

  노부인은 봉건 혼인 제도의 수호자로서, 문벌을 고려하여 정항과의 혼인을 고집한다. 애정 없는 결혼을 달가워하지 않는 앵앵의 탈선행위를 막기 위해 노부인은 아예 외부 사람과의 접촉을 막는다. 그러나 앵앵은 장생에게 사랑의 감정을 품게 되자, 주도적으로 사랑을 추구하며 홍낭은 그들의 결합을 적극적으로 돕는다. 여기에서 봉건 시대 예교(禮敎)의 이념과, 사랑의 자유를 갈망하는 젊은 세대의 이상이 정면으로 충돌하는데, 이것이 전체 극을 관통하는 주된 흐름이다.

 

  재상의 미망인인 노부인은 가정 안에서 모든 것을 지배하는 권력자로서, 딸의 순결한 애정과 평생의 행복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시종일관 봉건적이고 폭압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그녀는 비록 늠름하고 점잖지만 말과 본심이 다르고, 필요하다면 신의를 헌 신짝처럼 여긴다. 앵앵은 점차 이에 반발하다가 마침내 장생 그리고 홍낭과 연합하여 어머니를 배반하고 장생과 부부관계를 맺어 버린다. 당시의 상황에서 보자면 이러한 모녀의 첨예한 갈등은 실로 파격적인 것이다.

 

  작자 왕실보는 작품 말미에서 “온 천하 사랑하는 이들이여 다 가족을 이루소서!”라 외치며 강렬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사랑의 궁극은 결혼으로 이어지고, 결혼은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당연함과는 거리가 먼 세태는 그저 옛날만이 아니다. 때문에 왕실보의 외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특히 앵앵과 장생은 참사랑이 무엇인지를 육감적인 불장난에 눈먼 사람들에게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듣는’ 연극과 ‘읽는’ 극본의 정수

 

  중국에서는 전통 연극을 ‘희곡(戱曲)’이라 하고 서양식 연극을 ‘화극(話劇)’이라 부른다. ‘화극’이 사실적인 무대 배경 속에서 극중 인물이 사실적인 말과 동작으로 일정한 이야기를 재현하는 데 반하여, ‘희곡’은 거의 텅 빈 무대 위에서 주로 노래와 춤으로 일정한 이야기를 표현한다. 특히 노래가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전통 연극의 관람을 ‘희곡을 본다’고 하지 않고 ‘희곡을 듣는다’고 한다.「서상기」는 이러한 '듣는' 중국 연극의 정수를 보여준다. 제4본 제3절, 과거를 보러 떠나는 장생을 전송하면서 부르는 앵앵의 노래 한 토막을 감상해보자.

 

하늘에는 푸르스름한 구름,

땅에는 누런 국화 꽃잎.

가을바람 몰아치는데,

기러기 남으로 나네.

새벽녘 가을 숲 누가 붉게 물들였는가?

모두 이별하는 이의 피눈물이라네.

 

만나기는 더디더니,

헤어짐은 이리도 빠른가!

긴 버들도 임의 말 메어둘 수 없네.

앙상한 숲아 지는 해 붙잡아 다오.

임의 말은 터벅터벅,

내 마차는 허겁지겁.

가슴앓이 면하나 했더니,

초장부터 어느새 이별이라.

 

떠난다는 말을 듣자니,

팔찌가 헐렁해지고,

십리 장정을 바라보니,

온몸이 야위는구나.

이 한을 뉘라서 알아줄꼬?

 

  첫 번째 노래에서 앵앵은 서리 맞아 붉게 물든 단풍잎에 피눈물 흘리는 자신의 심정을 기탁하고 있다. 두 번째 노래에서는, 터벅터벅 앞서 가는 장생의 말과 허겁지겁 따라가는 앵앵의 마차가 극명하게 대조되어 떠나기 싫은 마음과 보내기 싫은 마음을 선명한 이미지로 보여준다. 물론 무대 위에는 가을 경치를 나타내는 세트도 없고, 말과 마차의 실물도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앵앵의 노래를 들으면서 관객들은 머릿속으로 상상할 뿐이다. 전통 연극의 진정한 매력은 보는 데 있지 않고 듣는 데 있다는 사실을 배우도 관객도 다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극작가는 극중 인물의 정감(情感) 속에 외부 경물을 녹여 넣는 데 심혈을 쏟게 된다. 바꿔 말하자면 주체의 정감과 객체의 경물이 혼연일체를 이루는 제3의 이미지를 ‘들려’줌으로써, 관객들이 특정한 경관을 연상함과 동시에 극중 인물의 심정에 공감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법은 중국 서정시의 ‘차경서정(借景抒情)’ 기법을 활용한 것으로 중국 고전극의 특징이다.

 

  사실 명ㆍ청 시대에 이미 100여 종의 판본이 유통되었을 정도로「서상기」는 ‘읽는’ 극본으로 더욱 유명하다. 무대 위의 노래는 책상 머리에 오면 곧장 시(詩)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서상기」를 서정시극(敍情詩劇)이라 일컫기도 한다. 이번에는 남자 주인공 장생의 노래 한 대목을 읽어보자.

 

꽃신은 겨우 반 뼘,

버들허리는 딱 한 줌.

부끄러워 머리 들지 못한 채,

원앙침으로 막는구나.

 

쪽에는 금비녀 떨어질 듯,

삐뚜름한 머리 더욱 멋지구나.

단추를 풀고,

허리띠 끌렀더니,

고운 향이 글방에 가득.

얄미운 사람 나를 괴롭히네!

허! 어찌 아니 얼굴을 돌리는가?

 

부드러운 옥, 따뜻한 향내가 가슴 가득.

아, 무릉도원이 따로 없네!

춘정이 밀려드니 꽃빛이 변하누나!

버들허리 천천히 흔들리더니,

꽃술이 가벼이 터지고,

이슬 방울방울 모란꽃이 피어난다.

 

 「서상기」에서 유일무이하게 남녀의 성행위를 단계별로 묘사하고 있는 대목이다. 일부 보수주의자들이 “「서상기」는 음란함을 가르친다”"고 목청을 높일 때 어김없이 지적하는 장면이지만, 노골적이거나 선정적이라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는다. 가장 음란한(?) 장면마저 이토록 아름다운 시어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서상기」는 그 자체로 거대한 시집이어서, 극본을 읽다보면 주옥같은 중국 고전 시가의 정수를 만끽하게 된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원래「앵앵전」에서 파경으로 끝났던 결말이「서상기」에 오면 행복한 대단원으로 바뀌는 이유는 무엇일까?

 「앵앵전」은 귀족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애정관을 반영하고 있는 반면 「서상기」는 설창 예술의 전통을 계승하여 대중의 보편적인 애정관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서상기」의 내용은 “우연히 만나 첫 눈에 반한 선남선녀가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행복한 가정을 이룬다”는 것으로, 사실상 평범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상기」가 오늘날까지 명작으로 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매력적인 극중 인물과, 보편적인 소망을 담은 강한 메시지를 뛰어난 언어 구사력으로 극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중국에서 고전극을 감상할 때 ‘본다’고 하지 않고 ‘듣는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시 말해, 서양식 연극과 중국식 연극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서양식 연극은 대체로 사실적인 무대 배경 속에서 극중 인물이 사실적인 말과 동작으로 일정한 이야기를 재현하는 데 반하여, 중국식 연극은 빈 무대 위에서 주로 노래와 춤으로 일정한 이야기를 '표현'한다. 특히 중국식 연극은 노래가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에, 연극 관람을 ‘'희곡을 본다[看戱]’'고 하지 않고 ‘희곡을 듣는다[聽戱]’고 한다.

 

 

출처 : 이승하 : 화가 뭉크와 함께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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