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自足의 境界, 脫俗의 境地 ▩
다음에 소개하려는 시는 조선 중기의 유명한 학자 龜峯 宋翼弼의 〈足不足〉이란 작품이다. 모두 40구 280자에 달하는 장편으로 '足'자만을 운자로 사용한, 중국에서도 달리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특이한 작품이다. 그 형식 뿐 아니라 내용 또한 참으로 삶의 귀감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다. 文如其人(글은 곧 사람이다)이라고 宋翼弼의 일생 학문이 이 한 수의 시에 무르녹아 있다 해도 조금의 지나침이 없다.
☆★☆ 足不足 ☆★☆
龜峯 宋翼弼(1534~1599)
君子如何長自足(군자여하장자족) 군자는 어찌하여 늘 스스로 족하며
小人如何長不足(소인여하장부족) 소인은 어찌하여 늘 족하지 아니한가.
不足之足每有餘(부족지족매유여) 부족하나 만족하면 늘 남음이 있고
足而不足常不足(족이부족상부족) 족한데도 부족타 하면 언제나 부족하네.
樂在有餘無不足(낙재유여무부족) 즐거움이 넉넉함에 있으면 족하지 않음 없지만
憂在不足何時足(우재부족하시족) 근심이 부족함에 있으면 언제나 만족할까.
安時處順更何憂(안시처순갱하우) 때에 맞춰 순리로 살면 또 무엇을 근심하리
怨天尤人悲不足(원천우인비부족) 하늘을 원망하고 남 탓해도 슬픔은 끝이 없네.
求在我者無不足(구재아자무부족) 내게 있는 것을 구하면 족하지 않음이 없지만
求在外者何能足(구재외자하능족) 밖에 있는 것을 구하면 어찌 능히 만족하리.
一瓢之水樂有餘(일표지수낙유여) 한 표주박의 물로도 즐거움은 남음이 있고
萬錢之羞憂不足(만전지수우부족) 만금의 진수성찬으로도 근심은 끝이 없네.
古今至樂在知足(고금지락재지족) 古今의 지극한 즐거움은 족함을 앎에 있나니
天下大患在不足(천하대환재부족) 천하의 큰 근심은 족함을 알지 못함에 있도다.
二世高枕望夷宮(이세고침망이궁) 秦 二世가 望夷宮서 베게 높이 했을 젠
擬盡吾年猶不足(의진오년유부족) 죽을 때까지 즐겨도 충분할 줄 알았지.
唐宗路窮馬嵬坡(당종노궁마외파) 唐 玄宗이 馬嵬坡에서 길이 막히었을 때
謂卜他生曾未足(위복타생증미족) 다른 삶을 산다해도 족하지 않으리라 말했네.
匹夫一抱知足樂(필부일포지족락) 필부의 한 아름도 족함 알면 즐겁고
王公富貴還不足(왕공부귀환부족) 왕공의 부귀도 외려 부족 하다오.
天子一坐知不足(천자일좌부지족) 天子의 한 자리도 족한 것은 아닐진데
匹夫之貧羨其足(필부지빈선기족) 필부의 가난은 그 족함 부러워라.
不足與足皆在己(부족여족개자기) 부족함과 족함은 모두 내게 달렸으니
外物焉爲足不足(외물언위족부족) 외물이 어찌하여 족함과 부족함이 되리오.
吾年七十臥窮谷(오년칠십와궁곡) 내 나이 일흔에 窮谷에 누웠자니
人謂不足吾則足(인위부족오즉족) 남들야 부족타 해도 나는야 족해.
朝看萬峯生白雲(조간만봉생자운) 아침에 만 봉우리에서 흰 구름 피어남 보노라면
自去自來高致足(자거자래고치족) 절로 갔다 절로 오는 높은 운치가 족하고,
暮看滄海吐明月(모간창해토명월) 저물 녁엔 푸른 바다 밝은 달 토함을 보면
浩浩金波眼界足(호호금파안계족) 가없는 금 물결에 眼界가 족하도다.
春有梅花秋有菊(춘유매화추유국) 봄에는 매화 있고 가을엔 국화 있어
代謝無窮幽興足(대사무궁유흥족) 피고 짐이 끝없으니 그윽한 흥취가 족하고
一床經書道味深(일상경서도미심) 책상 가득 經書엔 道의 맛이 깊어 있어
尙友千古師友足(상우만고사우족) 千古를 벗 삼으니 스승과 벗이 족하네.
德比先賢雖不足(덕비선현수부족) 德은 선현에 비해 비록 부족하지만
白髮滿頭年紀足(백발만두년기족) 머리 가득 흰 머리털, 나이는 족하도다.
同吾所樂信有時(동오소락신유시) 내 즐길 바 함께 함에 진실로 때가 있어
卷藏于身樂已足(권장우신낙이족) 몸에 책을 간직하니 즐거움이 족하도다.
俯仰天地能自在(부앙천지능자재)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보아 능히 자재로우니
天之待我亦云足(천지대아역운족) 하늘도 나를 보고 족하다고 하겠지.
○●○ 구봉 송익필(龜峯 宋翼弼)에 대하여 ○●○
구봉 송익필은 이율곡과의 벗으로 어머니의 신분이 천하였지만 아버지가 공신이었다. 동생 운곡 송한필(雲谷 宋翰弼)도 문학에 이름이 높아 대학자 율곡 이이(栗谷 李珥)가 말하기를 성리학을 알 만한 사람은 오직 익필과 한필 형제뿐이라 말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시 서출(庶出)로서 벼슬을 하지 못하였으나 이이(李珥), 성혼(成渾)등과 사우교제하면서 성리학에 통달했고 예학 (禮學)과 문장에 뛰어나 이산해, 최경창, 백광홍, 최 입, 이순인, 윤탁연, 하응임 (李山海, 崔慶昌, 白光弘, 崔笠, 李純仁, 尹卓然, 河應臨)등과 함께 8文章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으며 시와 글씨에도 능하였다 한다. 당시 현 고양시 송포동 구봉산 기슭에서 후진을 양성 문하생 중 김장생, 김 집, 정 엽, 서 성, 정홍명, 김 반 등 많은 학자가 배출되었으며 이중에서 특히 金長生이 그의 예학을 이어받아 대가가 되었다.
1599년(선조 32) 임진왜란이 끝난 2년 후 「구봉집 을 남기고 66세로 죽게 되니 선조 대왕께서는 지평으로 추증 하는 한편 문경공(文敬公)으로 시호를 내리시었다 한다. 부친 송사련(宋祀連)은 1496(연산 군 2)-1575년(선조 8) 甘丁 아들 안돈후(安敦厚)의 서녀(庶女)와 혼인 안처겸(安處 謙)의 서고종(庶姑從) 미천한 가문출신으로 벼슬할 기회를 살피다가 안당(安塘)과 사이가 좋지 않던 권 신, 심 정(權 臣, 沈 貞)에게 아부 관상판관(觀象判官)이 되었 다. 1521년(중종 16) 처 조카인 정 상과 공모 안 당, 안처겸, 권신(安 塘, 安 處謙, 權臣)등이 심정, 남곤(南 袞)등의 대신을 제거하려 한다고 무고로 밀고 신사무옥(辛己誣獄) 사건을 일으켜 안당, 안처겸 등 안씨 일문과 많은 사람에게 화를 입히고 자신은 그 공으로 당상에 올라 30여 년간 세력을 잡았다. 죽은 후 1586년(선조 19) 안처겸 등이 무죄로 밝혀져 관직이 삭탈 되었다.
구봉 선생은 천자(天姿) 가 투철하고 눈동자가 겹쳐 찬란한 빛이 있어 뭇 사람의 존경을 받아 오던 중 율곡 선생이 이조판서로 있을 때 사람됨과 능력이 특출하여 장차 나라의 큰 동량이 됨을 알고 선조 대왕께 구봉 선생의 행적을 아뢰니 즉시 입궐케 하라 하시어 율곡은 밤중에 구봉을 불러들였다. 어전에 부복한 후 임금이 묻는 말에만 대답을 하였더니 좀 가까이 와서 얼굴을 들라하시었다. 그러나 구봉은 “소신에게는 압인지기(眼引之氣)가 있어 성상께서 놀래실까봐 두렵습니다.”하니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니 짐을 보라 하시어 임금을 주시하는 동안 눈에서 호랑이 눈과 같이 불빛이 번쩍이자 대왕은 놀라 넋을 잃고 오랫동안 아무런 분부가 없자 담담히 소신은 물러갑니다하고 대궐을 나왔다 한다.
그후 선생님은 학문을 닦고 후진양성을 낙으로 삼으며 시를 지은 뒤 한 구절 중에서
진영조무성(盡永鳥無聲) 날이 저무니 새소리가 없고
우여산갱청(雨餘山更靑) 비온 뒤 산은 더욱 푸르도다
사희지도태(事稀知道泰) 사소한 일에도 도의 크기를 알고
거정각심명(居靜覺心明) 고요한 삶은 마음 밝음을 깨닫도다
일오천화정(日午千花正) 해 솟은 대낮에도 많은 꽃이 피고
지청만상형(池晴萬象形) 맑은 연못에는 만상이 나타나는구나
종래언어잔(從來言語淺) 끝내 말이 없으니
묵식차간정(默識此間情) 잠잠한 사이에 정을 알게 되었네
구봉 선생의 이기설은 율곡 선생과 일치하며 未動은 性이요 己動은 情인고로 미동 과 이동은 모두 心이니 性과 情을 종합한 것이다. 이것을 물에 비유한다면 心은 물과 같고 性은 물의 고요함과 같으며 情은 물의 파동과 같다 하시었다. 심, 정, 성의 상호관계를 요령 있게 비유한 고견이며 이순신에게 병법을 가르칠 때 아래 시를 유념하도록 하였다.
월흑안비고(月黑雁飛高) 달 밝은 밤에 기러기 높이 나니
선우야순도(戰于夜循道) 선우는 밤에 도망치리라
또한 심심 당부하기를
“독룡이 숨어있는 곳의 물은 편벽 되게 맑으리라(毒龍潛處水偏靑)” 하니 이러한 일곱자 글귀를 이순신 장군은 잊지 않고 잘 이용하였다 한다.
◆ 구봉 송익필의 설화 ◆
♣ 20대에 이름을 날리다.
구봉은 1534년 여산 송씨, 송사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7세 때 ‘산가모옥월참차山家茅屋月參差 - 산 속 초가집에 달빛이 어른거리네’라는 싯구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하였고, 20대에 이미 ‘8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꼽혔으며, 시와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당대의 대학자 율곡 이이와는 서로의 학문적 경지를 흠모해 평생에 걸친 우정을 나누었다. 그리고 일찍이 교육자의 길에 들어, 후일 예학의 대가로 크게 이름을 떨치는 사계 김장생, 수몽 정엽, 기옹, 정홍명 같은 제자들을 배출해 냈다. 그러나 구봉은 신분차별이 엄격하였던 조선중엽에 태어나 종의 자손이라는 신분상의 문제와 동인들의 방해로 끝내 정계에 진출하지 못하였다.
구봉의 외증조모는 안씨 집안의 종이었다. 그의 아버지 송사련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 외삼촌인 안당의 일가를 몰락시켰고, 신사무옥辛巳誣獄이라 불린 이 사건은 가문과 혈연관계를 중시하는 당시 유생들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았다. 송씨 일가의 이러한 약점은 자식인 송구봉의 대에 이르러, 동인들에 의해 불거지게 된다. <선조수정실록>에는 ‘사노(私奴:남자 종) 송익필을 체포하라!’는 요지의 기록이 남아있다. 그가 일찍이 관직을 포기하고 교육자로 나선 것도 이러한 출신상의 배경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송구봉은 학문만 대단했던 것이 아니다. 번개가 치는 듯한 안광과 당당한 풍채에서 우러나오는 독특한 기백으로 인해 많은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 무릎이 꺾여 절을 하고만 사연
당시 조정에서 판서의 직위에 있던 홍가신은 송구봉을 흠모하여 자주 서신을 보내 학문과 업무에 관한 대소사에 많은 자문을 구했다. 이런 홍가신에게 경신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동생 경신은 판서의 직위에까지 오른 형이 한낱 종의 자손에게 굽실거리는 것을 무척이나 못마땅하게 여겨 노골적으로 불만을 나타내곤 했다.
두고만 보던 형은 어느 날 동생을 불러 편지 하나를 건넸다. "너, 이걸 가지고 구봉 선생께 전하거라." 평소 가뜩이나 불만이 많은 동생 경신은 길길이 뛰며 화를 내었다. "종놈의 새끼한테 제가 왜 갑니까?" 그러나 형은 이런 동생을 잘 달래 기어이 보냈다. "가서 서신만 전하거라." 형의 명을 끝내 어길 수는 없어 동생은 단단히 벼르며 송구봉의 집을 찾아갔다.
집에 당도해 사람을 부르니, 마침 밖에 아무도 없었는지 마중을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홍경신은 흥분하여 소리를 질렀다. "종의 새끼가 이럴 수 있다니, 게 익필이 있느냐!" 방안에서 글을 읽고 있던 송구봉은 낯선 사람이 함부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고 이상하게 여겨 직접 마루로 나와 손님을 맞았다. "그 뉘시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송구봉을 욕보이겠다고 기세 등등하던 홍경신이 갑자기 깍듯이 절을 하며 예절을 차리는 것이었다. "편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리로 가지고 오시오." "아닙니다. 그냥 여기 놓고 가겠습니다." 그리고는 얼굴도 제대로 보지 않고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돌아온 동생에게 홍가신이 물었다. "편지는 전했느냐?" "아뇨, 못 전했어요. 정신이 까막까막해서 놓고만 왔습니다." 그러자 형이 웃으며 말했다. "정신이 까막까막한 것만 아니라, 너 오줌쌌지? 구봉 선생과 마주 앉아 쳐다보는 건 율곡 하나고, 성우계는 나하고 곁에 앉아 얘기하는데 구봉 선생과 마주 앉으면 벼락치는 것 같아서 나도 마주 앉지는 못하느니라." 훗날 홍경신은 자초지종을 묻는 세인들에게 '절을 하는 게 아니라 갑자기 무릎에 힘이 빠져 넘어진 것'이라며 변명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 임금을 바라보지 않는 신하
구봉을 알아주는 몇 안 되는 지기였던 율곡은 다가오는 국가의 환란을 짐작하고 선조에게 송구봉을 끊임없이 천거했다고 한다. 당시 율곡은 성우계와 함께 송구봉이 병조판서라도 하면 왜놈은 공격할 마음조차 못 먹는다며 여러모로 선조를 설득하였다. 율곡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던 선조는 마침내 그를 만나보기에 이르렀다. 우여곡절 끝에 송구봉과 대면하게 된 선조는 그의 학식과 경륜에 찬탄을 금치 못하였다. 그런데 선조가 보니 송구봉은 눈을 감고서 말을 하지 않는가. 그래서 그 까닭을 물어보았다. "경은 왜 눈을 뜨지 않소?" "제가 눈을 뜨면 주상께서 놀라실까 염려되어 이리하옵니다." "그럴 리 있겠소? 어서 눈을 뜨시오. 어명이오." 이에 할 수 없이 눈을 뜨니, 선조는 그만 그의 눈빛에 놀라 기절하고 말았다. 결국 눈도 제대로 쳐다볼 수 없는 신하를 조정에 둘 수가 없다 하여 이 일은 무산되었다고 한다.
송구봉에 관하여 전해지는 정사나 야사에는 꼭 율곡 이이가 함께 등장한다. 송구봉을 알 만한 이는 율곡 정도였고, 관직에 등용될 수 없는 신분인 송구봉은 자신의 뜻을 율곡을 통해 펴고자했다. 그가 나중에 동인의 미움을 받아 노비가 된 것도, 율곡과의 친교로 서인의 정책 자문 역할을 많이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후 율곡은 십만양병설을 건의하지만 당파싸움에 여념이 없던 당시 중신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그는 임진왜란이 닥치기 전에 죽고 만다. 하지만 율곡은 쉽게 눈을 감지는 않았다. 율곡은 앞으로 일어날 전란을 예상하고 임금이 피난 가는 길목에 화석정을 세워 갈 길을 밝혀, 죽어서도 군주를 구한다. 이러했던 율곡이 백성들을 생각하지 않았을 리 없을 것이다. 이에 율곡이 송구봉을 찾아가 앞날을 준비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율곡 이이 선생이 세상을 뜨자, 그의 죽마고우이던 구봉 송익필은 애도의 시를 지어서, "그대와 나는 합해서 하나인데, 반쪽만 남은 나는 사람 구실 못하겠네" 라는 애절한 슬픔을 토로했었다.
☆★☆ 鳥鳴有感(조명유감) 새가 우는 것을 보며 ☆★☆
-송익필-
足足長鳴鳥(족족장명조) 족족하며 길게 우는 새는,
如何長足足(여하장족족) 어찌하여 길게 만족해하는가.
世人不知足(세인부지족) 세상 사람들은 족족하며 지저귈 줄 모르니
是以長不足(시이장부족) 이 때문에 오랫동안 만족해하지 못하는구나.
○●○ 열복(熱福)과 청복(淸福) ○●○
다산 정약용은 사람이 누리는 복을 열복(熱福)과 청복(淸福) 둘로 나눴다. 열복은 누구나 원하는 그야말로 화끈한 복이다. 높은 지위에 올라 부귀를 누리며 떵떵거리고 사는 것이 열복이다. 모두가 그 앞에 허리를 굽히고, 눈짓 하나에 다들 알아서 긴다. 청복은 욕심 없이 맑고 소박하게 한세상을 건너가는 것이다. 가진 것이야 넉넉지 않아도 만족할 줄 아니 부족함이 없다.
조선 중기 송익필(宋翼弼)은 '족부족(足不足)'이란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군자는 어찌하여 늘 스스로 만족하고, 소인은 어이하여 언제나 부족한가. 부족해도 만족하면 남음이 늘상 있고, 족한데도 부족타 하면 언제나 부족하네. 넉넉함을 즐긴다면 부족함이 없겠지만, 부족함을 근심하면 언제나 만족할까? (중략) 부족함과 만족함이 모두 내게 달렸으니, 외물(外物)이 어이 족함과 부족함이 되겠는가. 내 나이 일흔에 궁곡(窮谷)에 누웠자니, 남들이야 부족타 해도 나는야 족하도다. 아침에 만봉(萬峰)에서 흰 구름 피어남 보노라면, 절로 갔다 절로 오는 높은 운치가 족하고, 저녁에 푸른 바다 밝은 달 토함 보면, 가없는 금물결에 안계(眼界)가 족하도다." 구절마다 '족(足)' 자로 운자를 단 장시의 일부분이다. 청복을 누리는 지족(知足)의 삶을 예찬했다.
다산은 여러 글에서 되풀이해 말했다. "세상에 열복을 얻은 사람은 아주 많지만 청복을 누리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하늘이 참으로 청복을 아끼는 것을 알겠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청복은 거들떠보지 않고, 열복만 누리겠다고 아우성을 친다. 남들 위에 군림해서 더 잘 먹고 더 많이 갖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다 가지려고 한다. 열복은 항상 중간에 좌절하거나 끝이 안 좋은 것이 문제다. 요행히 자신이 열복을 누려도 자식 대까지 가는 경우란 흔치가 않다.
○ 偶吟(우음) ○
-송한필(宋翰弼, 익필의 동생)-
花開昨夜雨 (화개작야우) 어젯밤 비에 피어난 꽃이
花落今朝風 (화락금조풍) 오늘 아침 바람에 떨어지네.
可憐一春事 (가련일춘사) 가련하다! 한 봄의 일이
往來風雨中 (왕래풍우중) 비바람 속에서 오가는구나. <송한필>
* 우주는 그냥 움직일 뿐이다. 봄이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봄이 온다고 생각한다.
● 송한필(宋翰弼) ●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 문장가.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계응(季鷹), 호는 운곡(雲谷). 사련(祀連)의 4남 1녀 중 막내아들로, 익필(翼弼)의 동생이다. 그의 형 익필은 이이(李珥)를 따랐는데 동인들이 이이에 대한 원망을 익필에게 전가하여 일족을 노예로 삼았다. 그는 형 익필과 함께 선조 때의 성리학자 ·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는데 이이는 성리학을 토론할 만한 사람은 익필형제뿐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이름이 높았다. 그의 시 32수와 여러 가지 저서들이 익필의 ≪ 구봉집 龜峯集 ≫ 에 실려 있다
'知 * 好 * 樂' 카테고리의 다른 글
* 知足常樂 * (0) | 2010.10.16 |
---|---|
☆ 안분지족(安分之足)의 처세(處世) ☆ (0) | 2010.10.16 |
☆ 君子의 安貧樂道 ☆ (0) | 2010.10.16 |
☆ 松竹問答 ☆ (0) | 2010.10.16 |
“不足之足每有餘(부족지족매유여)”와 ‘청복(淸福)’ (0) | 2010.10.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