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의 일생
중국의 정치가, 공산주의 이론가.
자 윤지[潤之]. 호남성[湖南省] 상담현[湘潭縣] 소산[韶山] 출생.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우며 8세 때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13세까지 <논어>와 <四書>등을 읽었다. 16세까지 아버지의 반대로 진학을 못하고 농사일을 도우며 틈틈이 책을 읽다가 1909년 동산[東山]고등소학에 들어갔다. 그 뒤 장사[長沙]의 상향[湘鄕]중학으로 옮겼고, 동맹회 <민립보[民立報]>의 열렬한 독자가 되어 그 신문에 실린 반청론[反淸論]이나 혁명론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 11년 10월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혁명군에 입대하였다가 12년 제대한 뒤 제1중학에 입학하였으며, 다시 제1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대학이나 외국유학을 하지 못했던 그는 이 학교에서, 영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중국의 봉건사상 비판에 힘썼던 교사 양창제[楊昌濟]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는다. 재학 중인 17년, 거의가 제1사범학교 학생들로 구성되고 호남성 혁명 지식인들의 본영이 된 신민학회[新民學會]를 조직했다.
18년 학교를 졸업한 뒤 북경[北京]으로 가서 호남[湖南] 청년들의 외국 유학을 도왔다. 그 해 10월 등소평은 소년중국학회에 가입하였고, 양창제의 소개로 베이징 대학 도서관 주임인 이대교의 조교로 일하면서 방청하였으며 철학회와 신문학연구회[新文學硏究會]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또 양창제에게 유물론적 철학과 윤리학 강의를 받았고 비밀학생단체들과 접촉하면서 무정부주의에 관한 책을 많이 읽어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로 기울게 되었다. 19년 5∙4 운동 발발 후 호남학생연합회를 설립하고 <상강평론[湘江評論]>을 펴냈으나 곧 폐쇄당하고 베이징으러 도망쳤으며, 러시아 혁명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20년 상해[上海]에서 진독수[陳獨秀]를 만났으며 다시 장사로 돌아와 24년까지 장사 제1사범학교의 부속 소학교 교장 겸 사범부의 어문(語文) 교사가 되었다. 22년 양창제의 딸 양윤혜[梁閏慧]와 결혼하였고, 그 해 7월 상해의 중국공산당 창립대회에 참가하였으며, 호남성 대표로서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회의에 출석하였다. 24년 국공합작(國共合作)이 되자 공산당 중앙위원, 국민당 제1기 후보, 중앙집행위원, 선전부장 대리, 중앙농민운동 강습소장, 정치주보 사장 등을 겸임하였다.
26년 장개석[蔣介石]의 숙청으로 상해에 갔다가 27년 무한[武漢]으로 가서 중국공산당 중앙농민부장이 되었고 국공분열[國共分裂] 뒤 농홍군[農紅軍] 3,000명을 조직하여 정강산[井岡山]에 들어가 근거지로 삼고 주덕[朱德]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이듬해 공농홍군(工農紅軍) 정치위원이 되었고, 30년 홍군 제1방면군 군사위원, 중국 공농혁명위원회 주석에 올랐다. 31년 강서성[江西省] 단금[瑞金]의 중화 소비에트 정부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이 되었고, 그 인민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34년 10월 단금에서 섬서성[陝西省] 연안[延安]까지의 12,500km에 이르는 대서천(大西遷)을 시작하였으며, 도중에 귀주성[貴州省] 준의[遵義]회의에서 당 지도권을 장악하였다. 서안사건[西安事件]을 거쳐 국공합작에 성공하자 항일민족통일전선을 수립하고, 홍군을 국민혁명 제8로군으로 개편하여 일본군에 대항하였다.그리고 <지구전론(持久戰論)>(1938)<신단계론(新段階論)>(38)<신민주주의론>(40)을 발표했는데, 마지막 것은 중국공산당 강령으로 채택되었다.
45년 4월 모택동은 이를 중앙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치보고로 발표했고, 중앙위원회 주석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인 45년 8월 중경[重慶]에서 장개석과 회담하여 화평건국의 제원칙에 합의하였으나 실행이 불가능하게 되자, 46~48년 내전을 벌여 승리하였고, 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북경에 세우고 국가주석 및 혁명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49년 12월 소련을 방문을 하여 50년 2월 중소우호동맹호조조약과 기타협정을 맺었다.
58년 제2차 5개년계획의 개시와 더불어 ‘총노선’ ‘대약진’ ‘인민공사’ 등 이른바 3면홍기(三面紅旗)운동을 펼다. 59년 4월 국가주석을 사임하고 죽을 때까지 당주석으로만 있었다. 64년 4월 <모택동어록>을 간행시켰고, 65년 이후의 중소논쟁과 문화대혁명 기간을 통해 ‘모택동사상’을 높이 내걸었다. 68년 10월, 59년부터 국가 주석으로 있던 유소기를 실각시켰다. 69년 모택동-임표체제가 확립되는 듯하였으나, 71년 9월 임표도 반모택동 운동에 실패하여 죽었다. 70년 헌법수정초안을 채택하여 1인체제를 확립하고 중국 최고지도자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그가 사망하기 직전인 76년 4월 대중반란이라고도 할 1차 천안문사건이 일어나 위대한 영웅∙독재자 모택동은 완전히 고립된 채 죽음을 맞이하였다.
1. 문화대혁명에 대한 평가
문화대혁명의 성격은 크게 “권력투쟁”과 “노선투쟁”으로 파악되고 있다. 보통 문화대혁명은 대약진운동을 통해 실권한 모택동이 복권하기 위해서 일으킨 권력투쟁으로 해석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선 노선투쟁적인 면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과연 당시 모택동이 문화대혁명과 같은 무리한 일을 벌여가며까지 권력투쟁에 나설 필요가 있었냐느거다. 실제로 대약진운동 후에도 모택동은 표면상으로는 실권했으나 민중들 사이의 지지도에서 유소기나 등소평을 압도했다. 뿐만아니라 모택동은 당의 주요세력(특히 군사권)에 대한 실질적인 권력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상황에서 권력투쟁이란 무의미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문화대혁명은 개인적 권력욕에 의한 권력투쟁이라기보다 자본주의적 수정주의 노선에 대한 노선투쟁으로 해석될 수 있다. 또 이러한 문화대혁명은 계급독재의 발전면에서 분석되기도 하는데, 이 입장에 따르면 문화대혁명은 계급독재의 발전을 목표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강제하며, 억압적인 이데올로기를 통하여 인민에 대한 지배권력을 악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지배권력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간섭이 허용되게 하였다. 즉, 문화대혁명은 당과 대중사이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했으며, 곧 대중 노선의 승리로 해석될수도 있다.
물론 결과론적 입장에서 보면 문화대혁명은 명백한 실패였기 때문에 문화대혁명을 바라보는 관점이 한 쪽으로 치우치기 쉬웠을 것이다. 이러한 문화대혁명은 후반기로 갈수록 전체적인 상화이 통제를 벗어나 난동으로 차닫는 가운데 모택동이 그것을 억제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지만 좀처럼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는 문화대혁명이 백화제방운동이나 대약진운동처럼 마찬가지로 모택동이 기대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치닫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문화대혁명을 권력투쟁으로 해석하느냐 노선투쟁으로 해석하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아니 어쩌면 그둘을 나누어 한쪽으로만 문화대혁명을 바라보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위와 같은 과정을 통해 문화대혁명을 다른 관점에서 보고자 했던 것이다.
2. 모택동식 사회주의의 문제점
1.모택동 개인의 문제점
♣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중국화
처음 모택동의 조직원칙은 다른 성공적인 비적들의 그것과 같았다. 즉 힘과 지혜(새로운 가르침을 포함하여)로써 그 지역 사람들의 호의를 끌어내는 것이다. 반면 코민테른을 통해서 중국에 들어온 소련의 이데올로기로는 중국적인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모택동의 사상은 제1차 국공합작을 거치면서 발전하게 된다. 모택동은 이 시기에 레닌의 개념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틀속에 중국 혁명의 성공을 위한 열쇠는 우선 농촌의 다양한 계급에 대한 조심스럽고 지적인 분석에,그리고 두번째는 주어진 혁명의 단계마다 어떤 계급이 적이고 어떠 계급이 친구인가를 구분하는 대단히 실제적인 전술을 이용하는데 있다고 주장했다. 세번째는 농촌에서의 당 조직가의 역할은 무엇이든 아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안내자이자 촉매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농민의 요구를 분명히 파악하여 혁명과정의 한 단계로서 가능한 한 많은 수와 단결하여 가능한 한 가장 적은 수를 공격하는 전술을 따를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후에 펼쳐지는 대장정에서 보여지는 모택동에 모습은 이상적인 사회주의 지도자의 모습이 아닐수 없다. 그는 홍군의 지도자 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병사들과 똑같이 행군하고 똑같은 여건에서 생활했다.
이처럼 모택동은 일반 대중의 정신, 요구와 이익을 잘 느끼고 있었다. 여기서 모택동이 주장하는 “대중노선”이라는 것은 당은 대중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슬픔과 요구를 발견해야 하며, 당은 그것들을 공식화하여 대중에게 그것이 그들의 최선의 이익이라고 설명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대중으로부터 나오고 대중에게로 돌아간다는 이러한 개념은 상충계급의 관료가 지방민들의 진정한 이익을 느끼고 그들을 위해서 통치하 때 최고의 선정을 베풀 수 있었던 중국적인 전통에 정말 어울리는 일종의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면 이러한 모택동식의 사회주의가 중국에서 받아들여질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우리는 그 해답을 언어에서 찾을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어떤 사상을 서양의 언어로 완전히 옮길수 없듯이 마르크스 사상역시 그 번역상에서 미묘한 차이가 존재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는 도시의 생활, 특히 서유럽의 산업화 과정에서 차마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경우가 많았던 19세기 초 공장 노동자들을 가르킨다. 하지만 이것이 중국어로 번역되었을 때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계급’ 즉 “무산계급”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도시에 있건 농촌에 있건 아주 가난한 사람을 의미하게 되었던 것이고, 중국에서는 대부분 그런 사람들이 농촌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용어의 중국화 문제와는 전혀 다르게, 주로 농촌적인 것이라고 할 후 있는 중국의 경제적인 토대는 소련보다 훨씬 뚜렷하게 중국 혁명에 농촌적인 성격을 불어넣지 않을 수 없었다. 농민들이 주된 혁명가가 되어야했기 때문이다.
중국화를 특징지은 마지막 요소는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자부심에 바탕을 둔 압도적인 중국 민족주의의 감정이었다. 이것은 중국이 남의 개의 꼬리가 될 수 없음을 의미했다. 사실 중국인은 오로지 중국적인 마르크스 주의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 아래서 모택동의 중국식 사회주의는 민중들의 지지를 받고 결국 장개석의 국민당을 몰아내고 붉은 중국을 건설했다.
♣ 칼 마르크스+진시황제
이렇게 모택동은 농촌사회가 중국 혁명의 주된 수혜자이어야 한다는 신념을 통해서 도시의 관료사회에 대한 반감을 표현했고, 농촌에서의 오랜 경험을 통해서 중국 농민의 행복한 삶을 가로막는 장애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민중(주로 농민)들의 지지를 받아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단 모택동은 자신이 권력을 장악하자 중공의 지도와 통제 아래 중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농민들을 이용해야 한다는 실제적인 필요 때문에 중국 농민의 해방이라는 이상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뿐만아니라 권력을 손에 쥔 이후에 모택동에게서는 예전 인민들과 함께 대장정을 해쳐나갔던 이상적인 사회주의적 지도자의 모습은 찾기 힘들었다. 그는 마치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쥔 황제와도 같았다. 그는 어떠한 견제세력의 존재도 불허했다. 그는 정치적 경쟁자가 되기에는 너무 어린 사람들이나 상식적 태도를 지닌 기술자들한테서만 제안들을 들으려 했다. 이 때문에 그는 자기비판 능력을 잃었고 동시에 아무도 그에게 충고하지 못했다. 이결과 대약진 운동때 모택동은 비참한 현실은 알지 못한채 왜곡보고에 흐믓해 해야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모택동의 변질은 계속된 실패를 불러 일으키게 된 것이다.
♣ 모택동의 기술에 대한 무지와 군사적 견해
먼저 모택동은 과학에 대한 소양과 경험이 없었다. 그가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연상시키는 그런 규모와 스타일로 많은 인구를 대중 노역에 동원하는 일을 그토록 성급하게 착수했던 데에는 이와 같은 기술에 대한 무지가 한 원인 이었을 수도 있다.
또 모택동은 성인 시기의 부분을 군사지도자로 지냈다. 모택동의 군대는 장교와 사병의 구분이 없는 등 완전한 평등주의적 체계였다. 모택동의 군대는 그 사명에 완벽하게 맞춘 하나의 사회 체계였다. 그렇기에 모택동은 이러한 군대를 이끌고 승승장구했다. 그래서 모택동은 “대중운동”의 무한한 잠재력에 대한 믿음을 군사적인 관점에서 생각하게 된 것이다. 모택동은 함께 먹고 함께 일하고 사람들은 하나의 통일된 메커니즘인 인민공사를 발전시킬 것이며, 이것은 군에 대응하는 민간인 공동체가 될것이라고 믿고있었던 것이다.
2.모택동식 사회주의 자체의 문제점
신중국, 즉 중화인민공화국은 스스로를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사회라고 천명했다. 모든 생산재는 공유하고, 정부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는 계획경제를 주축으로 하며, 무엇보다도 프롤레탈리아에 의한 지배를 정당화하는 체제를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신중국이 진정으로 사회주의∙공산주의를 민중의 필요에 의해 받아 들였는가라는 질문엔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바로 그들의 이데올로기에 관한 문제 때문이다. 실제로 모택동의 서가마다 중국의 위대한 문학적품, 역사책 등은 수도 없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마르크스, 앵갤스 심지어는 스탈린이 쓴 책은 한권도 없었다고 한다. 또 모택동이 마르크스-레닌 주의를 따르기 보다는 ‘자치통감’을 신봉했다고 한다. 이는 모택동이 젊은 시절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인 ‘이립삼주의’에 반대하고 중국 실정에 맞는, 다시 말해 농민 중심의 혁명을 선동했다는 점에서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이러한 모택동에서 우리는 중국 공산당의 이념적 노선을 살펴볼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의 모택동은 개인의 노선이 곧 중국 공산당의 노선이 될만큼 헤게모니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문제점을 발견할수 있다. 왜 신중국은 자신들의 노선을, 당시 전세계에서 소련만이 채택하고 있던 공산-사회주의로 정할 수밖에 없었을까?
당시 중국의 당면 과제는 제국주의와 봉견사회의 잔재를 뿌리 뽑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민중의 단결이 그 어떤 때보다도 절실히 요구되었으려 고로, 그들은 민중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지배이데올로기가 필요했다. 이러한 점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이 일에 가장 적합한 사람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진실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인류역사상 최초로 사회변화의주체를 일부 지배계층에서 피지배계층으로 내린 사상으로서, 반제 반봉건을 기치로 과거를 어떠한 나라보다도 광범위하게 청산할 필요가 있었던 중국에게 그것은 하나의 대안이었을 것이다.
또 다른 한가지의 이유로서 지적될 수 있는 점은, 다시 중국공산당이 소련의 원조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당시 국민당의 장개석을 지지하고 있던 미국이 민주주의 국가였으며, 모택동으로서는 이 점을 경계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모택동식의 사회주의는 제대로 된 이념의 바탕이 없이 필요해 의해 나타난 수단처럼 보일수도 있는 것이다. 또 중국은 역사상에 있어 자본주의의 과정 거의 겪지 못했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그 시기가 수십년에 불과하다. 사회주의란 자본주의 사회를 배경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인데 이점에서도 중국의 사회주의는 불안정한 출발을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중국식 자본주의를 이끄는 지도자인 모택동 당사자 역시 평생동안 한 번도 자본주의를 경험하지 못한다. 그는 생전에 서방국가를 방문한적이 없다. 국외로 나간 것은 두 번의 소련 방문이 고작이다. 이런 모택동의 자본주의와 서양에 대한 지식의 결핍은 대약진운동과 같은 파국을 야기하기에 이른다.
3. 모택동 사상의 본질과 평가
1. <모택동 사상>이란 말의 유래
<모택동사상>이란 말이 제일 처음 사용된 것은 연안에서의 정풍시기 였다. 1943년에 유소기는 중국공산당 건립 22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당내의 멘셰비키주의를 청산하자>라는 한편의 글을 썼다. 이 글에서 유소기는 모택동을 최대한 추켜세웠고, 아울러 <모택동사상>으로 각자 자신을 무장할 것과 당 내 멘셰비키주의의 청산을 중국 공산당원들에게 호소하였다. 같은 해에 왕가상도 <중국공산당과 중화민족 해방의 길>이라는 글을 써서 중국공산당 건립22주년을 기념하였다. 이 왕가상의 글에서 <모택동사상>이란 말을 정식으로 쓰기 시작하였으며, “모택동사상은 바로 중국의 마르크스․레닌주의이자, 중국의 공산주의다.”라고 말했다.
1944년, 연안정풍운동이 말기로 접어들 무렵에 모택동의 동향이자 모택동의 어용문인인 숙삼은 <모택동 동지의 초기 혁명활동>이란 글을 써서 모택동을 더욱 추켜세웠다. 숙삼은 모택동사상이 모택동주의로까지 발전된다고 주장하였다. 1945년 5월 14일 유소기가 중국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 석상에서 黨章 개정에 관한 보고를 실시하였을 때 모택동사상이 중국공산당의 모든 고작지침임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으며 아울러 이를 1945년 6월 11일에 통과된 中國共産黨章程의 총강령에 포함시켰다. 유소기는 이 보고 중에서 모택동사상을 중국적 공산주의, 중국적 마르크스주의 및 마르크스주의를 민족화한 탁월한 본보기라고 해석하였다. 이로부터 모택동사상은 중국공산당및 정치․군사․문화․교육․경제 등 각 방면을 지도하는 사상이 되었다.
모택동사상이 중국공산당 내에서 첫번째 서열에 오른 뒤에, 그 내용은 시간이 지나면서 끊임없이 첨가되기도 하고 삭감되기도 하였다. 그 변화의 과정은 다음의 네 단계로 나뉜다.
제1단계는 1945년에서 1950년까지이며, 유소기가 모택동사상의 기초를 닦았다. 이시기에 유소기는 <당정수정>의 보고를 통해 모택동사상을 중국공산당의ꡐ혁명건국이론ꡑ으로 설정하였다.
제2단계는 1951년부터 1958년까지로서, 이때 모택동사상의 기수는 진백달이었다. 진백달은 중국공산당 소수의 이론가 중의 한 사람으로서 연안시기에 모택동의 개인 정치비서였다. 그는 1951년 7월에 중국공산당 건립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모택동사상을 논함>이란 소책자를 편찬하고 모택동사상의 내용을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하였다.
첫째, 모택동은 중국 최고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대표자이며, 마르크스․레니주의의 보편적 진리와 중국혁명의 구체적인 실제를 정확하고 활발하게 결합하였다.
둘째, 근대중국은 동양의 수많은 모순이 집약된 곳이며, 중국의 이와같은 풍부한 혁명 경험은 모택동의 저작과 모택동사상에 집중적으로 반영되고 있다.
셋째, 중국혁명은 세계혁명의 일부분이며, 모택동은 식민지와 반식민지 국가의 혁명에 관한 레닌과 스탈린의 학설을 구체적이고 깊이있게 발전시켰다.
넷째, 모택동은 무산계급이 주도하는 인민의 대중혁명을 이끌었다. 모택동은 레닌과 스탈린이 제시한 민족의 문제는 실질적으로 농민의 문제라는 견해를 모방하고 이를 발전시켜 노동자 계급이 영도하는, 노동자와 농민연맹을 기초로 하는 이민민주전제정치의 이론을 제출했다.
다섯째, 모택동은 혁명 수립의 근거를 무장으로 보았고, 모든 역량을 농촌에 집중시켜 농촌으로부터 도시를 포위하고 그 다음에 도시를 탈취하는 방식을 견지하였다.
여섯째, 모택동은 한편으로는 연합하고, 또 한편으로는 투쟁하는 광범위한 통일전선을 창출하였다.
일곱째, 모택동은 자산계급의 민주혁명에서 사회주의혁명으로 전환하는 것에 관한 레닌과 스탈린의 학설을 더욱 발전 시켰고, 모험주의와 급진주의를 반대하였다.
여덟째, 모택동은 레닌과 스탈린의 당 건립 학설에 근거하여, 당내 투쟁의 운동형식, 즉 정풍운동의 형식과 학습운동의 형식을 창출하였다.
진백달이 제시한 모택동사상의 내용은 유소기가 제시한 것과 대동소이하며, 진백달은 단지 유소기의 일부 관념을 반복했을 뿐이었다.
제3단계는 1958년에서 1976년까지로서, 이때에는 임표가 모택동 사상의 전파자였다. 1958년 8월의 廬山會議에서 팽덕회․황극성 반당집단을 제거한 뒤에 모택동은 팽덕회를 대신하여 임표를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제1주석 겸 국방부 부장에 임명하였고, 임표는 이로써 군사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임표는 중앙군사위원회의 업무를 맡게 된 뒤에 곧 전군인에 대하여 모택동사상의 학습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아울러 수많은 <모택동어록>을 출판하였다.
당시 중국공산당 간행물의 선전에 근거하면, 소위 모택동사상의 내용을 다음의 열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마르크스주의의 세계관과 방법론에 관한 것
(2) 혁명의 기본적인 이론과 당의 정치노선에 관한 것
(3) 무산계급전제정치에 관한 학설
(4) 농민문제에 관한 학설
(5) 혁명통일전선에 관한 학설
(6) 혁명수립의 근거 학설
(7) 사회주의 경제건설문제에 관한 학설
(8) 전쟁과 전략문제에 관한 학설
(9) 제국주의에 관한 학설
(10) 국제공산주의 운동에 관한 학설
(11) 문화예술문제에 관한 학설
(12) 당의 건설에 관한 학설
제4단계는 1976년 10월에서 1981년 6월 27일까지로, 이 시기는 保毛派(모택동과 모택동사상을 보호, 유지하려는 파)와 貶毛派(모택동과 모택동 사상을 재검토하고 그 착오와 폐단을 드러내는 파)의 투쟁시기라고 할 수 있다. 보모파의 대표는 화국봉이며, 이들은 두가지대요(모주석이 제시한 決策을 굳게 유지 보호해야 한다는 것과, 모주석의 지시를 끝까지 변함없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높이 받들었다. 폄모파의 대표는 등소평으로, 그들은 실천만이 진리를 검토하는 유일한 기준이라는 주장을 견지하며 모택동의 착오를 검토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투쟁에서 결국 폄모파가 승리하고, 중국공산당은 11회6중전회에서 ‘건국이후 몇 가지 역사문제에 대한 당의 결의에 관하여’란 결의를 통과시키고 모택동이 과거에 저지른 착오를 적절하게 검토하였다.
이상의 분석으로, 우리는 중국공산당 내의 투쟁의 벼놔에 따라 모택동사상의 내용이 끊임없이 첨가되거나 삭제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모택동 사상의 근원을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택동사상의 특징을 분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
2. 모택동사상의 특징
모택동사상의 특징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전제독재사상, 계급투쟁이론, 전쟁만능론 및 농민유토피아사상을 포함한다. 이러한 특징은 전통적으로 중국의 어두운 일면인 농민폭동사상 혹은 流寇思想과 暴政思想에 근원하며, 일부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계급투쟁만능론과 폭력만능론 및 유토피아 사회주의 사상 등에서 유래한 것이다.
(1) 전제독재사상
모택동의 전제독재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이 강조하는 무산계급 전제정치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모택동이 죽은 뒤에 대륙의 인민들은 모택동이 수립한 전제독재제도가 모든 재난과 죄악의 근원이었음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모택동식 전제독제사상은 다음의 세가지 특징을 갖는다.
첫째, 맹목적인 개인숭배와 현대화 造神運動, 둘째, 관료주의의 성행, 셋째, 人治를 실시하였으며 法治에 기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맹목적인 개인숭배와 현대화 조신운동이 특히 큰 영향을 주었으며, 모택동의 帝王思想 및 공산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모택동은 10대에 제왕사상을 가지게 되었으며,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때 나는 비로소 光緖 황제와 자희 태후 두 사람이 모두 죽고, 새 황제인 宣統(현재의 傳儀)이 2년간 통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군주제도를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황제 및 관리들은 모두 성실하고 선량하며 총명한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나는 古史를 읽고 요, 순, 진시황, 한무제 등의 정치적 업적을 크게 동경하였다... 그리고 <<세계영웅전>>이라는 한 권의 책을 통해 나폴레옹, 캐더린 여왕, 피터 대제, 워싱턴, 크렁스톤, 루소, 몽테스키외, 링컨 등을 알게 되었다.
또 그는 1945년 7월에 모택동은 좌순생, 장백균과의 좌담에서 “장선생(장자)은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굳이 두 개의 태양을 만들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머리를 검사해 봐야 한다”고 하였다.
이런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모택동은 제왕사상을 농후하게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제왕사상을 숭배했던 모택동은 1949년에 정권을 탈취한 뒤에, 개인숭배와 자신을 신격화하는 일련의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문화대혁명 기간(1966년~1976년)에는 ‘3층운동(모주석에게 충성하자, 모택동사상에 충성하자, 모주석의 혁명노선에 충성하자)’ 이라는 선도 아래 엄연한 중국 고대제왕의 화신이 되었다.
모택동은 스탈린의 개인숭배를 모방하였으나, 청색이 감색에서 나왔지만 오히려 감색보다 더 푸른 것과 마찬가지로 스탈린보다 더 심한 개인숭배를 요구하였다.
모택동의 전제독재사상의 근원은 그 자신이 학습하여 획득한 제왕사상외에 마르크스.레닌주의로부터도 비롯된다. 왜냐하면 중국공산당과 각국 공산당은 조직문제에 있어서 누차 ‘민주집중제’와 ‘집단영도’를 강조하지만, 결국은 모두 전제독재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단, 개인독재가 아니라 소수인의 전제(즉, 집단 영도)였다.
모택동이 전제독재사상을 강조하고 공산당이 전제독재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원인은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각국 공산당은 정권을 탈취하기 이전에는 합법적인 지위를 갖지 못하였고 대테로 모두 하나의 음모폭력집단이었다. 그리하여 엄밀한 조직과 鐵의 기율을 갖추고 있었으며 무장을 하였는데, 중요한 임무는 정권을 탈취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투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지휘의 집중화가 필요했고 독단전횡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소위 민주란 단결하여 역량을 발휘케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둘째, 공산당은 정권을 탈취한 뒤에 무산계급의 전제정치를 실행하여 정권을 유지하고 굳건히 해야 했다. 따라서 당은ꡐ무산계급전제정치의 도구ꡑ가 되었다. 도구로서의 당의 실체는 고도의 독재를 실시해야만 비로소 임무를 완수하고ꡐ무산계급조직의 최고 형식이 될 수 있었다. 바로 모택동이 말한바, “工․農․商․學․兵․政․黨의 7개 방면에서 당은 일체를 영도해야 한다”는 것과 같다.
셋째, 사회주의의 정치제도는 극권통치의 체제이며, 계급전제정치를 표명하는 정권으로서 민주적인 대의기관이 없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가 없으며, 행동.거주.직업 선택의 자유 그리고 공정한 심판제도도 없었다
따라서 중국공산당이 모택동의 전제독재사상에 입각하여, 통치를 하게된 것이었다.
(2) 계급투쟁만능론
계급투쟁이론은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사상이다. 모택동은 이 이론을 흡수하고 충분히 운용하여 ‘모택동사상’의 중요한 요소로 만들었다.
모택동은 계급투쟁을 ‘전세계의 기준’이 되는 ‘만병의 영약’으로 보았고, 이 이론을 가지고서 중국이 안고 있는 정치.경제.문화.교육의 문제를 분석하려고 하였다. 계급투쟁이론은 ‘공산중의노선의 한 조항’으로 변하여 그들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강령이 되었던 것이다. 모택동은 “공산당의 철학이 바로 투쟁의 철학이며, 게급투쟁이 있어야 비로소 철학이 있다.”고 누차 강조하였다.
모택동은 <모순론>이란 책에서 ‘대립투쟁’에 대해서 수많은 예를 들어가며 말하고 있다. 모택동은 계급투쟁이론을 운용할 때 특별히 ‘對立面(극복해야 할 상대)의 수립’을 중시하였다.
공산당 내부에서 발생한 일련의 투쟁은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대상이 없으면 대상을 만들어야 했고, 대립면이 없으면 또한 대립면을, 예컨대 鳴放運動 등과 같은 것을 일으켜야 했다.
모택동은 살아있는 동안 결코 계급투쟁이라는 무기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강조하여 말하기를 “계급투쟁은 장기간 존재해야 한다. 따라서 계급과 계급투쟁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매년, 매달, 매일 단위의 당대회나 전국대회 등 각종 대회를 개최하여 계급투쟁을 강조해야 한다. 또한 대회가 열릴 때마다 이를 강조해서 말해야 한다”고 하였다.
계급투쟁은 곧 모택동의 행동 지도방침이 되었으며, 정치와 경제에 큰 영향을 주었다.
먼저 정치면에서, 중국공산당은 계급투쟁이 사회발전의 유일한 원동력이라는 관점을 견지하였고, 이로인해 모든 것에 대한 공격과 타도를 부르짖엇다. 그 결과 계급투쟁이 절대화․보편화되어 중국대륙에는 폭력의 기운이 만연하게 되었다.
경제면에서는, 중국공산당은 계급투쟁으로 생산투쟁을 대체하여ꡐ혁명을 잘하면 생산은 자연히 상승한다고ꡑ주장하였으며,ꡐ차라리 2년간 생산을 못할지언정 잠시라도 계급투쟁을 멈춰서는 안된다ꡑ고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의 경제는 붕괴 직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택동 사후에 중국공산당은ꡐ계급투쟁ꡑ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의 경향을 비판하면서 모택동이 저지른ꡐ계급투쟁 확대화ꡑ의 착오를 공개적으로 견책하였다. 이러한 견책의 예는 수없이 많지만, 중요한 몇가지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1963년에서 1965년까지 일부 농촌과 도시에서 잔개한 사화주의 교육운동에 대한 비판을 들 수 있다. 이 운동은 비록 간부들의 작풍과 경제관리 방면의 문제해결에는 어느정도 작용을 하였지만, 성격이 다른 두문제를 한결같이 계급투쟁이나, 계급투쟁의 당내 반영으로 본 것은 착오였다고 비판한다.
둘째로, 문화혁명에 대한 비판을 들 수 있는데, 중국공산당은 문혁은 당과 국가 그리고 인민에게 건국이후 가장큰 좌절과 손실을 안겨주었다고 비판한다.
문혁에 대한 모택동의 주요한 논점은 다음과 같다. 1949년 중국공산혁명 이후 수많은 자산계급의 대표적인물, 반혁명의 수정주의 분자들이 이미 당과 정부, 군대, 문화영역 등 각 계급에 침투하여 당연히 마르크스주의자와 인민들이 가져야 하는 상당부분의 영도권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당 내 자본주의 노선의 실권파들은 중앙에 자산계급의 사령부를 설치하고, 수정주의 정치노선과 조직노선의 대리인을 각 성․시 및 자치구역과 중앙의 각 부문에 두고 있다. 과거 각종 투쟁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었다. 이번 문화대혁명의 추진으로 비로소 전면적으로 공개 폭로하였으며, 주자파들이 탈취했던 권력도 탈환하였다. 이는 실질적으로 한 계급이 다른 한 계급을 뒤엎은 정치 대혁명이었으며, 앞으로도 몇차례 더 진행되어야 한다. 이 논점으로 부터 “무산계급전제정치하에 혁명을 계속하자”는 이론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모택동의 논점에 대하여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중국으 현실에 부합되지 않는 것으로 비판하고, 아울러 당내에는 근본적으로 유소기, 등소평을 우두머리로 하는 ‘자산계급 사령부’란 존재하지 않으며, 유소기를 ‘반란의 우두머리, 스파이, 노동자의 착취자’라는 이름의 죄명을 씌운 것은 순전히 임표와 강청의 모함이었다고 보았다.
어떻게보면, 문혁이란 의식형태를 도구로 삼은 한차례의 격렬한 권력투쟁이라 할 수 있다. 모택동은 ‘계급투쟁과 무산계급의 전제정치 아래 혁명을 계속 진행시키자’는 이론을 내세웠으며, 임표는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그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유소기와 등소평을 제거한 것이었더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과연 문화 혁명을 중국공산당내의 권력투쟁의 일환으로 보야야 하는가. 그렇게 보기에는 몇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당시 모택동은 비록 제1선에서 물러나 있고 국가주석 자리를 유소기에게 이양했지만, 중국공산당내의 최고 핵심권력인 중앙군사위원회의 주석직을 맡고 있었으며, 중국 공산당내에서의 모택동의 위치는 비록 많은 비판세력이 있었지만 확고했다고 볼 수 있다. 모택동을 비판한 세력이 대중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세력은 아주 미약한 정도였다. 따라서 모택동은 그들을 제거하기해 굳이 대중을 동원할 필요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문화대혁명은 단순한 권력 투쟁이 아니었다고 판단되며, 모택동의 사상적인 측면에서 이상을 달성하기 위한 한 방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시말해 모택동은 자신이 추구했던 사회주의 사회건설을 이룩하기위해 과도기적인 이론을 제기했는데 이 이론에서 그가 강조했던 내용은 사람의 개조문제와 계급투쟁의 확대문제였다. 즉, 인간의 의식이 사회주의적인 의식으로 바뀐다면 사회주의 사회는 자연 도래한다고 생각하였으며, 대중운동(계급투쟁의 대중화)을 통해 이러한 의식을 확립하려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주의적인 의식개혁의 일환으로 문화대역혁명이라는 운동을 발동했다고 말할수 있다.
(3) 폭력만능론
‘폭력만능론’ 혹은 ‘전쟁만능론’은 모택동 사상의 핵심 중 하나이다. 이 사상은 모택동이 맹신적으로 추종했던 계급투쟁이론과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계급사회에서 어떤 생산관계 및 그에 상응하는 상층건설의 근본적인 개혁은 반드시 계급투쟁을 거쳐 최고형식 즉, 폭력혁명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폭력만능론의 창시자는 모택동이며, 모택동의 이 이론은 마르크스․엥겔스․레닌․스탈린 등 여러 사람의 관점을 계승한 것이며,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를 절대화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모택동의 폭력혁명사상을 다음의 세 방향에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모택동은 농민폭동의 주창자였다. 모택동은 전통적으로 중국의 어두운 일면인 농민폭동을 계승하였다. 모택동은 중국역사에서 농민폭동의 역할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노동자(무산계급)를 주도세력으로 보는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이론을 수정하여 농민을 혁명의 주도적인 역량으로 보았다. 이는 일종의 수정주의 관점이다.
모택동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농민에 대한 이론을 반대하고 중국역사에서의 농민폭동을 극구 찬양하였으며, 중국역사발전의 진정한 원동력으로 추켜세웠다. 또한 모택동은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농촌에 혁명의 근거지를 세우고 농촌으로부터 유격전을 전개하여 도시를 포위하며 마지막으로 도시를 탈취한다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이에 농민을 조직하고, 농민을 흡수하며, 농민폭동을 선동하고, 지주에 대한 투쟁을 벌여 지주계급을 제거하는 것이 모택동 혁명사상의 핵심적 내용이 되었다.
둘째, 모택동은 무장부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모택동이 채택한 농민폭동 노선은 이후 ‘전쟁만능론’ 및 ‘정권은 총에서 나온다’는 이론으로변하였다. 모택동은 군대는 폭력의 도구일 뿐 아니라 정권을 탈취하고 굳건히하는 주요지주임을 직접 체험하였다. 그는 “군대는 국가정권의 주요부분으로 국가정권을 탈취하고 아울러 이를 보호 유지하려면 그에 합당한 강대한 군대를 갖추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즉, 모택동은 군대가 있으면 권력을 가질 수 있고, 무기가 있으면 세력이 생기며, 무기가 많을수록 세력이 강대해 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셋째, 모택동은 무장투쟁을 法寶(유효한 방법)으로 맹신하였다. 그리하여 모택동은 “중국혁명에서 중국공산당이 적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세 가지 주요 法寶로서 통일전선, 무장투쟁, 당의 건설을 꼽을 수 있다”고 하였다. 모택동은 또 무장투쟁을 발전시켜 폭력혁명이라는 하나의 투쟁형식을 수립하였다.
모택동의 무장투쟁사상은 스탈린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스탈린은 “중국에 있어서 무장혁명으로 무장의 반혁명을 공격하는 것이 중국혁명의 특징 중 하나이며 또한 중국 혁명의 장점이다”라고 말했다. 모택동은 스탈린의 관점에 근거하여 ‘중국에서 무장투쟁과 분리된 것은 무산계급과 공산당의 지위를 갖지 못한다’는 논점을 제시했다.
그러나 모택동이 죽고 4인방이 실각한 뒤에 이러한 모택동의 폭력혁명사상에 대한 많은 비판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개량주의를 반대하던 사람들은 과거의 태도를 바꾸어 개량주의 또한 계급투쟁의 한 형식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만약 개량주의로서 생산력 해방의 목적을 달성할 수만 있었다면 폭력혁명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보기 시작한 것이었다. 또한 자산계급 의식형태의 전제정치를반대하였다. 폭력으로 다른 사상의 출현을 막을 수 있고, 또한 사람을 굴복시킬 수 있으며, 심지어 행동적으로 다른 사상을 갖는 것조차 막을 수 있지만, 사상의 개조를 원치 않는 사람으 사상을 억지로 개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예컨대 폭력으로서 결혼을 시킬 수는 있겠지만 애정을 강요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4) 농민유토피아사상
‘농민유토피아사상’은 모택동사상의 중요한 구성요소였다. 모택동의 농업사회주의 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사상을 계승한 것도 있고, 일부는 스스로 창안한 것이다. 이러한 농업사회주의 사상은 다음의 몇 가지 특징을 갖는다.
첫째, ‘窮過度’의 방법을 사용하여 사회주의를 건설하려고 하였다.궁과도의 방법을 사용하여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는 모택동의 사상은 그의 독창적인 견해였다. 모택동은 중국대륙을 ‘一窮二白(첫째 대단히 빈궁하고, 둘째 지식이 백지상태이다)’의 사회로 보았고, 이러한 극도의 악화된 환경조건을 이용하여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한다고 줄곧 강조하였다. 그는 “우리는 대단히 빈곤하고 지식 수준 또한 매우 낮다. 하나는 窮이며, 하나는 白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窮’이란 공업이 거의 발전하지 못하고 농업또한 거의 발전하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白’이란 하나의 길다란 백지를 의미하며, 이는 바로 문화수준이나 과학수준이 그리 높지 않음을 말함이다. 궁하면 사고가 변하여 비로소 혁명을 요구하게 되고 강해지기 위해 분발한다. 하나의 긴 백지는 새로 글씨를 쓰기에 아주 좋다.”고 말하였다. 객관적인 경제규율은 완전히 무시하고 주관적인 능동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이러한 견해를 근거로 모택동은 일련의 정치운동을 발동시켰던 것이다.
둘째, 농민을 혁명의 주도적인 역량으로 보았다. 모택동은 ‘농민혁명’에 의존하여 정권을 수립한 사람이다. 그는 중국대륙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농업인구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하여,노동자를 혁명의 주도세력으로 보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을 수정하여 농민을 주도세력으로 보았다.
셋째, 농업사회주의적 유도피아사상은 정치운동으로서 경제를 발전시키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중국대륙은 경제적 기초가 빈약하고 사회주의사회 단계로의 신속한 진입이 어려웠기 때문에 모택동은 ‘특급과도’라는 관념을 제시하였는데 그 구체적인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생산력이 생산관계를 결정한다는 마르크스의 이론을 뒤집어 생산관계가 생산력을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모택동은 소농소유제의 생산관계를 사회공유제의 생산관계로 전환하면, 농업생산 방식이 여전히 소와구식 농기구를 이용하는 수준이라도 생산력 면에서 큰 약진을 이룩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른바 생산관계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곧 정치운동에 의존하여 현재의 상태를 변화시키고 사람을 개조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택동은 이러한 사람의 개조를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였다. 그러나 주관적인 의지에 근거하여 객관적인 경제 규율을 무시하였기 때문에 중국 경제 발전에 나쁜 영향을 미쳤다.
(2) 三面紅旗운동을 추진하였다. 1958년부터 중국공산당은 공산주의사회로의 진입을 단축하기 위하여 이 운동을 추진하면서 ‘사람은 많은 대답성을 갖고 있다’, ‘땅은 많은 산물을 갖고있다’, ‘인민공사는 하늘로 가는 사다리이며, 공산주의는 천당이다’라는 등의 수많은 구호를 내걸고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원하던 바대로 되지않고, 공산주의사회로의진입을 단축시키지 못했을 뿐만아니라, 가지고 있던 얼마간의 경제적 기반도 거의 소비하게 되었다.
넷째, 과학문화의 교육을 소홀히 하고 지식인을 경시하였다. 그는 지식이 없는 농민들이 오히려 지식인들 보다 경제 문제를 더 잘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농민계급에 대한 숭배’는 모택동사상의 주요한 지주였다. 모택동은 모든 지식인들을 강제로 ‘勞改營’으로 보내 노동의 개조를 받도록 하였다. 그리고 모택동은 반동분자를 적발해낸다는 구실로 지식인을 정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수단으로도 모택동이 강조했던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차별을 없앤다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노동분배의 원칙에 어긋남으로 인하여 과학문화교육의 정상적인 발전을 방해하는 결과만을 초래하였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회주의 건설에 대한 모택동의 견해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고, 여기에 자신의 주관적인 견해를 첨가한 것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모택동은 사회주의에서 공산사회로의 진입에 대한 환상을 품게 되었으며, 정치운동을 중심으로 이것을 실현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 중국공산당 내에서 정치운동만이 활발해지고 생산력의 발전은 더디게 되었다.
4.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이후 모택동식 사회주의가 실패한 이유
1.일본의 대륙침략
19세기 후반 외국 열강들은, 특히 러시아와 일본은 만주를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많은 결실을 얻을수 있는 유익한 땅으로 주목하여 보기 시작했다. 만주의 지배권을 노리던 러시아와 일본은 랴오둥 반도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처음으로 무력 충돌을 일으켰다. 일본은 1894~95년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전리품으로 중국에게 랴로둥 반도의 할양을 요구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프랑스와 독일의 지원을 얻어 일본에 압력을 가했고, 일본은 결국 이권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1898년 러시아는 음모와 협박을 통해 중국으로부터 랴오둥 반도를 통치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고, 다렌항과 뤼순항에서 중국 동부 철도까지 이어지는 연결 철도의 부설권도 얻어냈다. 만주와 한반도의 이권을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충돌은 결국 1904~05년의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러시아는 이 전쟁에서 패하여 만주 남부에 대한 모든 이권을 일본에 양도했다.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난 뒤 현지 군벌인 장작림의 지배를 받게 되지만 이 지배권은 유명무실한 것이었다. 그는 일본의 묵시적인 군사지원을 얻는 대가로 이 지역에서 일본인들에게 막대한 이권을 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1915년 일본은 중국에게 매우 불리한 21개조 요구사항을 제시하여 중국인들은 관동(랴오둥 반도의 끝에 있는 지역)에 대한 일본의 통치권을 90년 연장하고 만주지방에서 일본의 민사상 특권과 상업적인 특권을 광범위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이 사건은 일본이 중국의 개혁에서 지도력을 발휘하는데 종지부를 찍었으며, 중국의 근대주의적인 민족주의를 고양시켰다.
그리고 이 시기에 신학문을 익힌 학자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역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낡은 유교적인 가치관을 자세하게 비판하고, 중국을 후퇴시킨 모든 것들을 거부하고, 중국의 과거에서 새로운 문화의 요소를 찾아내기 위하여 그들은 관직에서 벗어나 자신의 선배들이 자행했던 정치를 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신문화 운동)
1919년 5월 초, 제 1차 세계 대전을 종결짓는 평화 조약이 중국의 요구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채 베르사이유에서 체결되었다. 서방제국은 아시아 지역의 공산주의의 침투저지에는 동맹국이 필요하다는 생각 하에 산동지역에 독일이 갖고 있던 권리들을 중국 정부에 반환하는 대신 일본에 넘겨주었다. 이러한 결정 소식이 알려지자 5월 4일 수천 명이 참가하여 시작된 5.4운동은 몇주내에 전 중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중국정부는 북경에 계엄령을 선포하였으며, 일분은 중국의 대항구에 해군을 파견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으나, 전국의 상인들과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가함으로써, 중국 정부는 마침내 6월 12일 시위로 구속된 학생들과 지식인들을 석방하고 3인의 친일파 가료들을 해임하는 동시에 베르사이유 조인 거부에 동의했다.(5.4 운동)
1931년 만주의 이권을 차지하려던 일본 군부와 우익은 [만철 폭파사건]을 구실 삼아, 만철 선로를 폭파하고, 이를 중국 측의 소행으로 몰면서 북만주로 일거에 군사운동을 개시하여 9월 18일 선양에 있는 중국군 막사를 공격하였고, 이튿날 그 도시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만주사변)
→그런데 이에 대해 난징 정부는 저항하지 말라는 이해할 수 없는 지시를 내렸고 이런 소극적인 대응으로 일본군은 불과 3개월만에 만주 지방 전역을 점령할 수있었다. 게다가 일본의 만주국을 묵과 적으로 승인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무저항’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1932년이후 상해사변이후 북경 천진 등을 공격하는 등 중국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 가속화와 함께 일본에 의해 굴욕적인 화북 분리 정책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1931년 왕조명 저격이후 ‘화폐개혁’을 실시되었다. 이는 일본 정부에게는 실로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통화개혁으로 중국 통화에 대한 영국의 지배가 강화되자 이 개혁이 불가능하리라고 보던 일본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영국은 시장으로서의 중국의 안정을 바랐으며 따라서 정치적 안정세력으로서 장개석 정권에 의한 통일을 지지했다. 그러나 일본은 다나까 상주문에 있는 만몽 분리라는 생각이 이미 국가의 체질화하여 국민당 정권에 의한 통일을 반대하였다. 그런데 화폐개혁의 성공은 국민정부의 재정을 강화하고, 장개석에 의한 통일과 지배를 확립시켜주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므로 일본정부는 국민당 정권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중국에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한 화북(화북 5성) 분리작업을 가속화하게 되었다.
→ 그러나 국민당 정부는 시종일관 [대일타협외교] 노선을 취하였다.
이러한 화북의 정세에 굴욕을 느끼고, 민족의식에 깊은 상처를 입은 학생들은 마침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12.9학생시위)
2.국민당의 대일 정책 방향
① 안내양외(安內壤外) 정책- 밖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먼저 내부를 평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으로 즉, 중국 공산당과 홍군의 격멸을 먼저하고, 다음 항일을 한다.
만주사변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장개석은 하야하였다. 그러나 1931년 1월, 장개석과 왕조명의 합작이 진행되었고, 왕이 정치, 장개석이 군대의 최고 책임자를 맡게 된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1932년 1월 28일 중국군과 일본군의 해병대가 충돌하는 상해사변이 발발했다.
하지만 국민당은 일본의 침략에 대해서는 3월부터 시작될 예정인 국제 연맹 임시 총회의 동향에 맡기고, 일본과의 전면적인 군사적인 충돌을 피할 뜻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다시한번 국내의 비난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동 3성의 몰락후 민중은 무력에 의해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고자 외치며 대일 선전을 주장했으나 당시 중국의 실력은 공산당의 활약과 중국 내부의 경제 공황의 이유로 대외적으로 무력을 행사하기에는 너무나 빈약했다.
또한, 국제적인 대세를 감안해 본다고 하더라도 일반인의 예상과는 반대로 러.일 또는 미.일전쟁의 발발은 요망에 불과 했다. 소련은 당시 5개년 계획에 몰두하여 다른 나라를 돌볼 여유가 없었으며 미국은 일본에 대항하여 충분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함부로 일본과 사건을 전개할 것같지는 않았다. 영국은 오로지 국내문제에만 치중하였으며 프랑스는 베트남 문제에만 급급했고 이탈리아의 대일 태도는 소극적이었다.
이러한 판국에 중.일전쟁이 일어난다면 중국은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지고 만다. 곧, 내우가 산적해 있는 상황에서 만약의 경우에 의존할 수는 없다. 당장 중국의 급선무는 내부 통일에 있었다.
⌌인민은 공산당의 토벌을 위해 정부를 신임하라. 터키의 부흥은 인민이 정부를 신임했기 때문이며 이탈리아가 강대해진 것은 정부와 인민이 협력한 결과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지금 소리 높여 외친다. 중국 국민은 잠시 동 3성을 포기하라. 공산당 토벌을 완수하고 난 후에 정부와 인민이 힘을 합해서 잃어버린 땅을 회복해야 하지 않겠는가.」
- 만주포기선언 中-
곧이어 장개석은 항일을 하는대신 공산당에 대한 토벌을 시작하였다.(5차례에 걸친 초공전)
당시 악여환 소비에트(호북,하남,안휘 의 접합 지점)를 중심으로 하는 병력 증강으로 인해, 무한의 국민당 정권에 가장 큰 위협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3.공산당의 항일민족 투쟁 전선
“ 민족의 총력을 결집하여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여 민족국가의 독립을 옹호하자.” 는 노선을 채택, 프롤레타리아 국제 노선에서 민족주의 노선으로 방향을 바꿨다. 그들은 전 동포에게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 구국을 호소하고, 반장항일(反蔣抗日)을 추구 하였으나, 9월에 장개석을 항일 전에 참가시키기 위하여 핍장항일(逼蔣港日)을 주장하였다. 그것은 강력한 장개석의 정권이 공산당토벌을 포기하고, 함께 공동의 적인 일본에 항거하게 하여 그 사이 전열을 재정비, 공산당의 활로를 찾기 위해서 였다.
4. 공산당의 일치항일은 거짓이다!?
① 공산당에 대한 장의 인식
- 1923년 손문은 소비에 러시아에 군사원조를 요청하기 이해서 당시 러시아어를 공부하고 있었으며 군사전문가였던 장개석을 모스크바로 보냈다. 그러나 장은 방문도중 ‘外蒙古’를 중국에게 반환할 것을 요청하자 소련 측이 이에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고, 장개석은 소련이 혁명의 성공으로 새로운 정부를 수립했으나 제국주의의 야욕은 버리지 않았다고 결론 내리게 된다. 이때부터 장개석은 소련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하게된다.
장개석은 소련의 사회주의적 공산주의에 대해 이것이 대내적으로는 차르의 전체주의와 엄격하게 결합되어 있고 대외적으로는 침략주의 사상적인 무기가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이들을 ‘신식민주의자’로 규정하고 소련의 제국주의에 반대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이 중국의 공산당에 대한 장의 태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와 같은 공산당에 대한 장의 인식은 장개석으로 하여금 공산당 세력은 소련이 중국에서 제 5열을 통한 계급투쟁에 의해서 민주혁명을 방해하며, 다시 농촌 혁명에 의해서 독재 정권의 기초를 조직 수립하기 이한 꼭두각시로 인식하게 되었다.
② 공산당의 내전 중지 일치 항일은 거짓이었다?
-- 장개석이 바라본 공산당에 대한 입장 공산당이 내세운 항일 구국의 주장은, 항일 전면 전쟁을 일으켜 중공으로 하여금 항일 진영의 배후에서 군비를 확장하고 때를 보아 정부를 타도 함으로써 중국 전체를 지배하도록 만들려는 기도이다.
“항일은 중앙 정부의 일관된 정책이며 또 작년에 강서 소공 작전을 완성하고 난 후의 기정 방침이기도하다. 그러나 우리는 중공의 진의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들의 목적은 일치항일에 있지 않고 소공정지에 있다. 그들이 말하는 일치 항일은 다만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일시적인 방편에 불과하다.그러므로 우리들이 오늘 특히 검토해야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정말 중공을 우리들의 항일에 협력시키는가 하는 문제이다.
--- 항전 초기의 모택동의 모습을 한번 살펴보자.
국공 합작이후 전면적인 대일전이 시작된 후 중공은 1937년 9월 22일 함께 국난에 처하는 선언을 발표하고 국민정부에 다름의 4개 항목을 서약했다.,
1. 손중산 선생의 삼민주의는 오늘의 중국에 있어서 필요 불가결한 것이며, 그 실현을 위해 분투한다.
2. 국민당 정권의 전복을 꾀하는 일체의 폭동 정책과 적화 운동을 해소하고 폭동으로써 지주의 재산을 몰수하는 정책을 정지한다.
3. 현재의 소비에트 정부를 해소하고 민권 정치를 실행하며, 이로써 정권의 통일을 기한다.
4. 홍군의 명의와 부대호칭을 해소하고 국민 혁명군으로 개편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의 통제를 받으며, 또 명령에 의하여 출동하여 항일 제 1전선의 임무를 담당한다.
# 1937년 가을, 주덕이 제 8로군을 이끌고 섬서성 북부에서 전선으로 출동했을 때 모택동은 부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연설하였다.
1. 중일전쟁은 중공 발전의 절호의 찬스이다. 우리들의 기본 정책은 전력의 7할을 중공의 발전에, 2할을 국민 정부와의 대등에, 나머지 1할을 항일에 사용한다.
2. 이 정책은 다음 2단계로 나누어 실시한다. 지 1단계에선 국민당과 타협하고 중공의 생존과 발전을 도모한다. 제2단계에선 국민당과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고 그들과 대항한다. 제 3단계에서는 화 중 각 지구에 진출해서 근거지를 만들어 국민당을 반격한다.
그 해 10월 중공 중앙 정치국은 항전 전도와 노선에 관한 결의에서 다시 그 구체적인 대책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1. 통일 전선을 확대 강화하고 조직과 활동을 비밀에서 공개로, 국부에서 전면으로 바꾸어 우리당의 합법적인 지위와 평등하게 경쟁할 만한 지위를 획득한다.
2. 중국의 정치에서 결정적인 요소는 무력이다. 항전의 과정에서 가능한 한 당의 무력을 확대하여 장래 정권을 획득할 기초로 한다.
-- 국민당과 공산당은 일제에 의해 국난을 당해 서로 합작하기는 하면서도 상호 불신하고 경계하여 서로 이기간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 하려고 하였다. 공산당 측은 이 기회를 이용해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항일근거지(해방구)를 건설하고 국민당 통치 구역 내에서 항일 민중운동을 발동시킨다는 명분 아래 민중을 조직하여 공산당 조직 속으로 편입 시켰다.
참고서적.....
1. < 모택동과 중국혁명 > 1989년 서진영 著
2. < 모택동사상과 마르크스주의 > 1987년 Meisner.M 著
3. < 모택동사상론 > 1985년 김충렬 著
4. < 모택동사상 연구 > 1985년 정민 著
5. < 모택동사상의 역사적 성격 > 1985년 오병헌 著
6. < 모택동의 생애와 사상 > 1978년 나창주 著
7. < 모택동주의의 미래 > 1985년 Amin.Sami 著
출처 : ns.webman.co.kr
'知 * 好 * 樂'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知足常樂 能忍自安(지족상락 능인자안)-逸山禹壽億(행서)자료 (0) | 2015.02.04 |
---|---|
이규보와 개구리 이야기 (0) | 2015.02.01 |
도광양회(韜光養晦)와 주동작위(主動作爲) (0) | 2015.01.27 |
[스크랩] 화평굴기(和平屈起) (0) | 2015.01.27 |
[스크랩] 도광양회 (0) | 2015.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