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규보와 개구리 이야기 ○●○
어느 날 임금님이 혼자 야행을 갔다가
깊은 산중에서 날이 저물었습니다.
걱정하던 차에 한 민가를 하나 발견하고는
주인에게 하루 밤을 묵자고 청했지만
젊은 집주인은 조금 더 가면 주막이 있으니까
그곳으로 가라며 돌려보내었습니다.
돌아서면서 임금님은 그 집 대문에
붙어있는 글을 보았습니다.
"有我無蛙人生之恨"
(나는 있지만 개구리가 없어 인생의 한이로다)
임금님은 그 글에서 개구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 궁금했습니다.
주막을 찾은 임금님은
국밥을 시켜먹으며
주모에게 그 외딴 집의
젊은이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모는 과거에
낙방한 후 마을에도
내려오지 않고 집안에서 책만 읽으며
살아가는 젊은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더욱 궁금해진 임금은 그 외딴 집으로
되돌아가 사정사정한 끝에 하룻밤을
묵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집 주인의 글 읽는 소리에
잠은 달아나고 궁금증은 더욱 커졌습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개구리가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주인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옛날 노래를 아주 잘하는 꾀꼬리와
목소리가 듣기 거북한
까마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꾀꼬리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까마귀가
꾀꼬리에게 "3일후에 노래
시합을 하자"고 도전했다.
꾀꼬리는 어이가 없었다.
까마귀의 목소리
자체가 듣기조차
거북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꾀꼬리는 원래 노래를 잘 불렀지만
3일 동안 목소리를 아름답게 다듬었다.
그러나 까마귀는 노래 연습은 하지 않고
논두렁을 돌아다니며 개구리를 잡아
노래 심판인 두루미를 찾아 선물하고는
잘 봐 달라 부탁했다.
약속한 3일이 되어 꾀꼬리와 까마귀가
한곡씩 노래를 부르자 심판을 맡은
두루미는 까마귀의 손을 들어주고는
까마귀가 더 잘했다고
판정하고는 자리를 떴다.
젊은 주인은 대문에 붙은 개구리에
관한 글은 불의와 불법으로 얼룩진
나라의 실상을 풍자한 것이라며
자신의 실력이나 지식은 전혀 남에게
뒤지지 않음에도 과거를 보면 언제나
떨어진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은 노래를 잘하는 꾀꼬리 같으나
상납할 개구리가 없어 초야에
묻혀 산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임금은 그 집주인의
품격이나 지식이 고상하다는 것을
간파하고는 슬쩍 거짓말을 했습니다.
자신도 여러 번 과거에 낙방하고
전국을 떠돌고 있는데 며칠 후에
임시과거가 있다는 말을 듣고 한양으로
올라가는 중이라며 꼭 과거에 응시하라고
약속을 받아내었습니다. 그리고는
궁궐로 돌아와 임시과거시험을
개최하라고 명하였습니다.
과거를 보는 날 그 젊은이도
응시하여 과거문제를 받아보았습니다.
"有我無蛙人生之恨"
(나는 있지만 개구리가 없어 인생의 한이로다)
다른 사람들은 그 뜻을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임금이 계신
궁궐을 향해 한번 큰 절을 올리고
답을 적어 내어 장원급제하였습니다.
이 젊은이가 바로 당대의
유명한 학자이셨던
이규보 [李奎報, 1168~1241]
선생이었습니다.
그는 명문장가로 그의
시풍(詩風)은 당대를 풍미했고
몽골군의 침입을 진정표(陳情表)로써
격퇴하기도 하였고
《동국이상국집》 《국선생전》 등이
책을 썼으며 <동명왕편(東明王篇)〉이란
작품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규보
시대 |
고려 |
별칭 |
<자>춘경(春卿), <호>백운거사(白雲居士), <시호>문순(文順), 삼혹호선생 |
출생 |
1168년(의종 22) |
사망 |
1241년(고종 28) |
직업 |
문신, 학자, 문인 |
성별 |
남 |
분야 |
역사/고려시대사 |
본관 |
황려(黃驪: 지금의 경기도 여주) |
1168(의종 22)∼1241(고종 28).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문인
[개설]
본관은 황려(黃驪). 초명은 인저(仁氐),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 만년(晩年)에는 시·거문고·술을 좋아해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고 불렸다. 아버지는 호부시랑(戶部侍郎)을 지낸 윤수(允綏)이다.
[생애와 활동사항]
9세 때부터 중국의 고전들을 두루 읽기 시작했고 문(文)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다. 14세 때 사학(私學)의 하나인 성명재(誠明齋)의 하과(夏課: 과거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여름철에 절을 빌려 학습하는 일)에서 시를 빨리 지어 선배 문사로부터 기재(奇才)라 불렸다. 이때 그는 문한직(文翰職)에서 벼슬해 명성을 얻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지엽적 형식주의에 젖은 과시의 글(科擧之文) 등을 멸시하게 되었고 이것은 사마시(司馬試)에 연속 낙방하는 요인이 되었다.
16세부터 4·5년간 자유분방하게 지내며 기성문인들인 강좌칠현[(江左七賢):이인로(李仁老)·오세재(吳世才)·임춘(林椿)·조통(趙通)·황보항(皇甫抗)·함순(咸淳)·이담지(李湛之)의 모임으로 죽림칠현·죽림고회·해좌칠현이라 불림]과 기맥이 상통해 그 시회(詩會)에 출입하였다. 이들 가운데서 오세재(吳世才)를 가장 존경해 그 인간성에 깊은 공감과 동정을 느꼈다고 한다.
1189년(명종 19)유공권(柳公權)이 좌수(座首)가 되어 실시한 사마시에 네 번째 응시해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이듬해 지공거(知貢擧) 임유(任濡), 동지공거(同知貢擧)이지명(李知命) 등이 주관한 예부시(禮部試)에서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관직을 받지 못하자, 25세 때 개경의 천마산(天磨山)에 들어가 시문을 짓는 등 세상을 관조하며 지냈다. 장자(莊子)의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 어떠한 인위도 없는 자연 그대로의 낙토)의 경지를 동경하기도 하였다. 백운거사라는 호는 이 시기에 지은 것이었다. 26세 때인 1193년(명종 23)에 개경으로 돌아왔으나 빈궁에 몹시 시달리면서 무관자(無官者)의 처지를 한탄하였다.
1197년(명종 27) 조영인(趙永仁)·임유·최선(崔詵) 등 최충헌(崔忠獻) 정권의 요직자들에게 관직을 구하는 편지를 썼다. 거기에서 그동안 진출이 막혔던 문사들이 적지 않게 등용된 반면, 자신은 어릴 때부터 문학에 조예를 쌓아왔음에도 30세까지 불우하게 있음을 통탄하고 일개 지방관리라도 취관 시켜줄 것을 진정하였다. 이 갈망은 32세 때 최충헌의 초청시회(招請詩會)에서 그를 국가적인 대공로자로 칭송하는 시를 짓고 나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이에 사록겸장서기(司錄兼掌書記)로서 전주목(全州牧)에 부임하였다. 그러나 봉록 액수가 적었고 행정잡무가 번거로웠다. 상관과 부하는 태만하였으며 동료들이 중상을 하는 등 관직생활은 고통스러웠다. 결국 동료의 비방을 받아 1년 4개월 만에 면직되었다. 처음에는 자조(自嘲) 하다가 다음은 체념하고 결국 타율적으로 규제받는 것을 숙명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1202년(신종 5)동경(東京: 현재 경상북도 경주)과 청도 운문산(雲門山) 일대의 농민폭동진압군의 수제원(修製員)으로 자원하여 종군하였다. 현지에서 각종 재초제문(齋醮祭文)과 격문(檄文), 그리고 상관에의 건의문 등을 썼다. 1년 3개월 만에 귀경했을 때, 상(賞)이 내려질 것을 기대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문필의 기능과 중요성에 대해 깊은 회의를 느꼈다.
1207년(희종 3)이인로·이공로(李公老)·이윤보(李允甫)·김양경(金良鏡)·김군수(金君綬) 등과 겨루었던 「모정기(茅亭記)」가 최충헌을 만족시켜 직한림(直翰林)에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문필을 통한 양명과 관위 상의 현달이 함께 할 수 있을 가능성에 대해 다시 자신감을 갖기 시작하였다.
1215년(고종 2) 드디어 우정언(右正言) 지제고(知制誥)로서 참관(參官)이 되었다. 이때부터 출세에 있어서 동료 문사들과 보조를 같이 하면서 쾌적한 문관생활을 만끽하였다. 금의(琴儀)를 두수(頭首)로 하여 유승단(兪升旦)·이인로·진화(陳澕)·유충기(劉冲基)·민광균(閔光鈞), 그리고 김양경 등과 문풍(文風)의 성황을 구가하였다.
1217년(고종 4) 2월우사간(右司諫)이 되었으나 가을에 최충헌의 한 논단(論壇)에 대해 비판적이었다고 하는 부하의 무고를 받아 정직당하고, 3개월 뒤에는 좌사간(左司諫)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집무상 과오를 범한 것으로 단정, 좌사간마저 면직되었다.
이 같은 사태는 그때까지 전통적인 왕조규범으로 직무를 수행하고자 하였고, 그러한 태도를 관리의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 그에게 큰 충격과 교훈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관념이 최충헌의 권력 앞에서 무의미한 것이 되고 파탄되어 버리자 또 다시 자신의 사고(思考)와 태도를 바꾸어 보신(保身)에 대한 특별히 마음을 두게 되었다.
1219년(고종 6)최이(崔怡)의 각별한 후견 덕분으로 중벌은 면하게 되어 계양도호부부사병마검할(桂陽都護府副使兵馬黔轄)로 부임하였다. 다음해 최충헌이 죽자 최이에 의해 귀경하게 되면서 최이와 절대적 공순관계(絶對的恭順關係)를 맺게 되었다. 일체의 주견 없이 다만 문필기예의 소유자로서 최씨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충실히 집행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 뒤 10년간은 최씨정권의 흥륭기(興隆期)이기도 하거니와 그가 고관으로서 확고한 기반을 다진 시간이었다.
보문각대제지제고(寶文閣待制知制誥)·태복소경(太僕少卿)·장작감(將作監)·한림학사시강학사(翰林學士侍講學士)·국자좨주(國子祭酒) 등을 거치면서, 1228년(고종 15)중산대부 판위위사(中散大夫判衛尉事)에 이르렀고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1230년(고종 17) 한 사건에 휘말려 위도(蝟島)에 유배되었다. 그는 이때까지 권력에 심신을 다 맡겨왔던 터였는데 자기를 배제하는 엄연한 별개의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새롭게 놀랐다. 보신을 잘못하는 자신이 부덕한 사람으로 통감되었다. 8개월 만에 위도에서 풀려나와 이해 9월부터 산관(散官)으로 있으면서 몽고에 대한 국서(國書) 작성을 전담하였다. 국서는 최씨의 정권보전책으로 강화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고, 그는 이 정책에 적극 참여한 셈이었다.
65세 때 판비서성사 보문각학사 경성부우첨사지제고(判秘書省事寶文閣學士慶成府右詹事知制誥)로 복직되었고, 1237년(고종 24)수태보 문하시랑평장사(守太保門下侍郎平章事)·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예부사 한림원사 태자대보(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判禮部事翰林院事太子大保)로서 치사(致仕)하였다.
[학문세계와 저술활동]
왕정(王廷)에서의 부패와 무능, 관리들의 방탕함과 관기의 문란, 민의 피폐, 그리고 남부지방에서 10여 년 동안 일어난 농민폭동 등은 이규보의 사회·국가의식을 크게 촉발시켰다. 이때 지은 것이 바로 『동명왕편(東明王篇)』·『개원천보영사시(開元天寶詠史詩)』등 이었다. 그리고 문집으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 있다.
혜문(惠文)·총수좌(聰首座)·전이지(全履之)·박환고(朴還古)·윤세유(尹世儒) 등과 특별한 친분을 유지하였다. 71세 이후에는 하천단(河千旦)·이수(李需) 및 승통(僧統) 수기(守其) 등과 사귀었고, 최씨의 문객인 김창(金敞)·이인식(李仁植)·박훤(朴暄)과도 교제가 잦았다.
[평가와 의의]
그는 이권에 개입하지 않은 순수하고 양심적인 관직자였으나 소심한 사람이었다. 학식은 풍부하였으나 작품들은 깊이 생각한 끝에 나타낸 자기표현이 아니라 그때그때 마다 떠오르는 바를 그대로 표출한 것이었다. 그는 본질적으로 입신출세주의자이며 보신주의자였다. 그렇게 된 근본이유는 가문을 일으키고, 고유의 문명을 크게 떨치고자 하는 명예심에서였다. 최이에게 바쳐진 그의 시들이 최이의 은의에 대해 감사를 나타내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최씨정권 아래에서 볼 수 있는 일반 문한직 관리층의 한 전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순(文順)이다.
참고문헌
•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편시(東明王篇詩)」(박창희, 『역사교육』11·12 합집, 1969)
• 「고려중기(高麗中期)의 민족서사시(民族敍事詩)」(이우성, 『성균관대학교논문집』7, 1963)
• 「영웅서사시(英雄敍事詩)-동명왕(東明王)-」(장덕순, 『인문과학』5, 1960) 요약 테이블
'知 * 好 * 樂'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봄 여름 가을 겨울 24절기 24절기 입춘에서 대한까지 24절기 24절기의뜻 24절기 표 24절기 뜻 24절기와 농부의 달력 생활속24절기 24절기의 의미 20 (0) | 2015.02.04 |
---|---|
[스크랩] 知足常樂 能忍自安(지족상락 능인자안)-逸山禹壽億(행서)자료 (0) | 2015.02.04 |
[스크랩] 모택동의 일생과 사상 (0) | 2015.01.29 |
도광양회(韜光養晦)와 주동작위(主動作爲) (0) | 2015.01.27 |
[스크랩] 화평굴기(和平屈起) (0) | 2015.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