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家

[스크랩] 시조 현담윤

餘香堂 2015. 2. 11. 15:33

 

연주현씨대종회


ㆍ전화번호 02-739-6712

ㆍ주 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당주동 145(미도파광화문빌딩604호)
-연주현씨(延州玄氏)대종회 회장 현승종, 수석부회장 현진규, 사무국장 현석두

----------------------------------------------------------------------------


◀ 시조(始祖) 현담윤(玄覃胤) 영정
연주(延州)는 평안북도 영변(寧邊)의 고호(高號)이며, 영변군은 영주(迎州)와 무주(撫州)의 합명(合名)이다. 영주는 본래 고려 때의 밀운군(密雲郡)인데 670년(광종 21) 연주(延州)로 고쳐 지주사(知州事)를 두었으며 995년(성종 14) 방어사(防 使)를 두었다가 공민왕(恭愍王) 때 연산부로 승격되고 1413년(조선 태종 13) 도호부로 개편되었다.
무주는 원래 고려의 운남군(雲南郡)인데 995년 무주방어사라 하였다가 공민왕 때 태주(泰州)로 이속되었고, 1391년(공양왕 3) 감무(監務)를 둔 후 태종(太宗) 때 무산현(撫山縣)이 되었다. 1419년(세종 11) 연산과 무산을 합하여 영변으로 개칭하고 세조(世祖) 때 연주(延州)를 나누어 운산군(雲山郡)에 속하게 하고, 그후 여러 변천을 거쳐 1895년 영변군으로 개칭되었다.
현씨(玄氏)의 시조 현담윤(玄覃胤)은 본래 평안도(平安道) 연주(延州) 출신으로 고려(高麗)의 의종조(毅宗祖)에 장군(將軍)을 지내고 명종(明宗) 때 일어난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功)을 세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라 연산군(燕山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현담윤(玄覃胤)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시조의 봉군지명(封君地名)인 연주(延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현씨(玄氏)의 본관(本貫)은 연주를 비롯하여, 성주(星州)·창원(昌原)·순천(順天) 등 무려 106본(本)이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현존(現存)하는 본관은 30여 본에 불과하며 이들의 관향도 모두가 시랑공(侍郞公) 현담윤(玄覃胤)을 시조로 받드는 동조동근(同祖同根)의 자손들이 살았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므로 1747년(영조 23) 정묘보(丁卯譜)를 편수(編修) 할 때 연주 현씨(延州玄氏)로 단일화(單一化) 하였고, 1982년에 간행된 임술보(壬戌譜) 때도 문중(門中)의 합의(合議)에 따라 본관을 연주로 통일(統一)하였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시조 담윤(覃胤)의 3 형제 중 덕수(德秀)와 이후(利厚) 두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반적 조위총(趙位寵)의 반란을 평정하는데 훈공을 세워 맏아들 덕수가 내시지후(內侍祗候)와 안남 부사(安南府使)를 거쳐 경상도 안렴사(慶尙道 廉使)를 역임한 후 신종(神宗)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에 올라 팔거군(八 君)에 봉해졌다가 수에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으로 이봉(移封)되어 그의 후손들이 성주 현씨(星州玄氏)로 분적(分籍) 하였다.
둘째 이후(利厚)는 경상도 안렴사(慶尙道安廉使)를 지내고 광성군(廣城君)에 봉해졌고, 1186년(명종 16) 문과(文科)에 급제했던 덕유(德裕)는 시조의 셋째 아들로 이부(吏部)와 예부(禮部)의 시랑(侍郞)을 거쳐 서경유수(西京留守)로 나갔다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낸 후 대사공(大司空)에 이르러 회원군(檜原君)에 봉해져서 그의 후손들이 창원 현씨(昌原玄氏)로 분관(分貫)하였으며, 성산부원군 덕수(德秀)의 둘째 아들 원미는 영동정(令同正)으로 순천군(順天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순천 현씨(順天玄氏)로 분관(分貫)하였다.
고려조에서 무훈(武勳)으로 명성을 떨쳤던 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와서 9세손 규(珪)가 세종조(世宗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판군자감사(判軍資監事)를 지내고 고부 군수(古阜郡守)로 나갔다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와 이조 정랑(吏曺正郞)을 역임하였다. 그의 아들 득원(得元)은 어릴 때부터 기절(氣節)이 탁월하고 효우(孝友) 도한 돈독하였는데, 세종조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1454년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고 민정을 보살폈으나 이듬해 단종(端宗)이 손위(遜位)하자 벼슬을 버리고 아들 보손(寶孫)과 같이 영천(永川) 묵방동(默坊洞)으로 돌아와 은거하며 종신토록 질의를 지키다가 여생을 마쳤다.
한편 빈(彬)의 아들 익수(翼洙)는 가세(家勢)가 빈궁했으나 청백(淸白)하여 처사(處士)로 일컬어졌으며 지릉 참봉(知陵參奉)에 천거되었으나 노부모(老父母)의 봉양을 위해 나가지 않고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였다.
「죽창한화(竹窓閑話)」에 의하면 좌참찬(左參贊) 효생(孝生)의 아들인 석규(錫圭)가 한양(漢陽)에 과거를 보러 갔을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제천정(濟川亭)에서 여러 왕자(王子)들과 함께 잔치를 베풀고 있는데 과거를 보려고 몰려든 선비중에 한 선비를 가리키며 불러 오도록 했다.
세조(世祖)는 그 선비에게 예의를 갖추어 손님으로 접대하면서 이름과 사는 곳을 묻고는 좌중(座中)을 둘러보며 "누가 이중에서 처녀 딸을 둔 이가 있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먼 길을 오느라고 의관(衣冠)이 해어지고 형용(形容)은 초췌한 그 선비를 쳐다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효령에게 처녀 딸이 있어 지금 혼인(婚姻)처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라고 하니, 세조(世祖)는 "좋은 사위를 구하려면 이 사람보다 나은 이가 없다'고 했다. 이에 효령대군(孝寧大君)이 "가문(家門)이 적합치 않을 것 같습니다' 하니 세조는 "옛날부터 큰 인물은 초야(草野)에서 많이 나왔으니 혼인(婚姻)을 정하기로 하시지요" 하며 권했다. 뒤에 서원군(瑞原君)이 그 선비의 집안을 알아보니 영남(嶺南)에서 문명(文名)을 덜치고 있는 가문이어서 사위를 삼았는데, 그 선비가 바로 석규(錫圭)였다. 그는 여러 벼슬을 거치면서 청렴하고 공정하게 정사(政事)를 처리하였고, 형조 판서(刑曹判書)·우참찬(右參贊) 등을 역임하면서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이밖에도 당대에 이름난 성리학자(性理學者)로 손곱힌 상벽(尙壁)이「관봉문답(冠峰問答)」·「관봉유고(冠峰遺稿)」등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학자(學者) 약호(若昊), 문장과 글씨에 능했던 덕윤(德潤)·재덕(在德) 등이 가문의 번영을 이루었고, 한말(韓末)에 와서는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로 유명한 병근(炳瑾)과 익철(益哲)이 대(代)를 이어 가문을 빛냈다.


[人口(1985년 현재)] 48,154명이 있다.
---------------------------------------------------------------------------

출처 : 연주현씨대종회

출처 : 연주현씨 대종회(延州玄氏 大宗會)
글쓴이 : 선비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