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천산은 완전히 계획을 갖고 꾸며놓은 산 같다.
물론 산의 생김새가 기본적으로 갖춰져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지만...
성형미인도 이목구비가 갖춰져 있을 때에 더 아름다울 수 있다.
강천사가 있어 강천산으로 불리어지는 듯하다.
강천사는 처음에 복천사(福川寺, 福泉寺)라 하였으며 또한 산세가 용이 꼬리를 치며 승천할 형상이라 하여 용천사(龍泉寺)라고도 하였다.
강천사라는 이름은 선조 때 학자 귀봉 송익필이 이곳에 유숙하며 "숙 강천사(宿 剛泉寺)"라는 시를 지었는데 이때부터 강천사로 불리었다 한다.
송익필은 서얼 출신이지만 서인의 이론가요 정치가로 일세를 풍미하였고,금수강산 곳곳에 그의 글이 닿아있다.
강천사는 처음 도선국사가 보광전, 첨성각 등을 창건하였고,고려 27대 충숙왕 3년(1316년)에 덕현선사가 오층석탑을 세우고 중창하였다.
강천사는 불전이 3개소, 승방이 12개소,부속암자가 12개나 되어 한때 500여 수도승이 살았던 거찰.
그런데 임진왜란(1596년) 때에 석탑 하나만 남고 사찰 건물과 연대암 등 12암자가 모두 소실되었다.
다시 지었지만 6.25 동란으로 완전 소실되었으며 1959년 김장엽 스님과 1978년 이경모 스님,현재의 김재덕 스님이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산고수장(山高水長)이랬는데,이 말은 적어도 강천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강천산의 높이야 500m대로 야산에 불과하지만 강천천 깊은 골은 여느 심산유곡에 견주어도 하나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이는 호남정맥을 벽으로 '디귿'자의 산세가 여러 봉우리로 부터 물을 받아내기 때문이다.
거기다 인공으로 조성한 물줄기는 충분히 착시현상을 일으키고 남음이 있겠다.
이번 산행은 한마음산악회의 가을 이벤트산행이다.
관광버스 두 대가 꽉 찼다.
역활분담을 하여 무전기로 연결하며 운영의 묘를 추구해 나갔다.
참여한 회원들의 면면과 목적은 다 제각각이어서 귀차(歸車)시간과 장소만 알려주곤 자유산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방목(放牧)을 한 셈.
산행코스: 대형주차장-강천사-현수교-강천산(왕자봉)-형제봉 갈림길-금성산성 북문-산성산-북바위-비룡폭포-구장군폭포-주차장(원점,4시간 30분)
아래는 참고 개념도
강천산 주위의 관광유적지
버스가 강천산에 닿을 즈음 그 유명한 메타세콰이어길이 나온다.
담양에는 대나무 말고도 이렇게 메타세콰이어가 유명하다. 메타세콰이어 나무는 중국 중부지방이 원산지라고 알려진 침엽수.
아래 대형주차장에 주차 안내요원의 안내를 따라 버스 두 대를 댄다.
그리고는 제 각각 제 뿔뿔이 제 갈 길을 찾아 나선다.
지역 농산물을 파는 상업지역을 지나...
숲속으로 들어가는 듯하였지만...
이내 매표소 앞에 도착을 한다.
경로와 국가유공자를 제외하고 단체로 매표를 한다. * 개인 3,000원, 단체(30인 이상) 2,500원
.
병풍바위에서 쏟아지는 물줄기
병풍폭포 안내문
처음 계획된 깃대봉으로 오르는 들머리(제4등산로)에서 리드 중인 강만식씨.
제4등산로의 이정표.
제4등산로 기점은 금강교를 건너자마자 있다.
나는 현수교(구름다리)를 햔한다.
이는 하산시 구름다리로 다시 올라가지 않기 위하여 미리 구름다리를 경유하기 위함이다.
일주문인 강천문(剛泉門)을 지난다.
강천문(剛泉門) 현판은 남곡 김기욱(南谷 金基旭)의 글이다. 그 우측으로 신사중춘절(辛巳仲春節, 2001년 음 2월)
내려올 때 들리기로 하고 카메라만 한 번 들이대고 패스다.
5층 석탑을 살짝 당겨잡은 후...
절의탑(節義塔)을 지난다.
절의의 고장 순창의 선현들을 위하여 세운 탑.
강천천 왼쪽으로 조그만 비각이 보인다. 삼인대(三印臺)이다.
삼인대비(三印臺碑)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27호인 '순창 삼인대'
순창군수인 충암 김정, 담양부사 눌재 박상, 무안현감 석헌 유옥등 세 사람이 이곳 강천산 계곡에 모여서 과거 억울하게 폐위된 신비를 복위시키려고 각기의 관인을
나뭇가지에 걸어 맹세하고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하였다.
이때 이들이 소나무 가지에 관인을 걸어 놓고 맹세한 곳이 여기라 하여 이곳을「삼인대」라 부르게 된 것이다.
신비는 중종반정을 반대한 신수근의 딸이다.
중종반정의 공신들은 신수근의 딸을 왕비로 두었다가는 뒷날 후환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중종(中宗)에게 폐비를 강요하였다.
중종은 처음에는 듣지않았으나 결국 공신들의 강압에 못 이겨 신씨를 폐출하고 윤여필의 딸인 장경왕후(章敬王后)윤씨를 새 왕비로 맞아들였지만 결혼한지 10년만에
사망하였다. 장경왕후가 사망하자 신비의 복위를 결의한 것이다.
십장생교를 건너기 전 우측으로 현수교를 오르는 초입이다.
그 길은 강천산(왕자봉 1.2km)으로 오르는 등로이기도 하다.
계단을 타고 조금 오르면 현수교 삼거리.
좌측 30여 미터 지점에 현수교가 숨어있다.
모퉁이를 조금 돌자 현수교(구름다리)가 나타난다.
1980년 8월 완공된 현수교는 높이 50m, 길이 78m, 폭 1m 규모로 밑에서 바라볼 때에도 도전심을 자극하지만 165개 철계단을 따라 현수교 위에 올라서면...
50m 아래 골 바닥이 까마득하게 느껴져 담력 약한 사람은 다리가 후들거리고 머리카락이 쭈뼛 할 정도로 공포감을 자아낸다.
그렇지만 마음이 가라앉은 이후 눈에 들어오는 풍광은 그야말로 한 폭의 산수화다
이제 왕자봉으로 향한다.
30여 분 오르다 전망대에서 돌아본 모습엔 광덕산인 듯 우뚝한 봉이 솟아있고,그 아래엔 현수교가 작은 외나무다리처럼 걸쳐져 있다.
이윽고 올라선 왕자봉.
일행들과 함께 밥자리를 마련하고 정상주로 오디주도 두 잔 얻어 마셨다.
그리고 늦게 합류한 일행들을 기념촬영한다.
나도...
또...
그리고는 금성산성으로 향한다. (왕자봉 갈림길)
왕자봉 갈림길의 이정표
10여 분 만에 형제봉 갈림길에 도착이다. 저수지로해서 강천사로 내려가는 길은 직진이다.
금성산성으로 가는 나는 90도 우측으로 꺾어야 한다.
형제봉 갈림길 이정표 (송낙바위 방향이 금성산성 가는 길이고,구장군폭포 방향이 강천사 가는 길)
그런데 저수지(강천 제2호수)로 가는 길이 폐쇄되었다는 안내이다.
자세히 보니 공사기간이 (2010,10~2014~6)은 지났다.
호남정맥이기도 한 이 길은 높낮이가 거의 없이 유순한 산길이다.
완만한 오름을 오르면서 거대한 인공구조물이 앞을 막는다.
사적 353호, 금성산성(金城山城)이다.
이 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되었고, 조선 태종 9년(1409년에 고쳐 쌓은 후 광해군 2년(1610년)에 보수공사를 하면서 내성도 함께 만들었다.
광해군 14년(1622년)에는 내성 안에 관청을 건립하고 효종 4년(1653년)에 성 위의 작은 담(여장)을 수리하면서 전반적으로 성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외성은 2㎞, 내성은 700m 길이에 돌로 쌓은 산성이다.
동학 농민 운동 때 건물이 많이 불타 없어지고 현재는 동·서·남·북문의 터가 남아 있다.
내성 앞에는 국문영 장군의 비석이 남아 있다.
성문(북문)을 통과하여...
돌아보니 누각엔 그 흔한 현판하나 걸려있지 않다.
이 성문은 북문이다.
북문의 복원한 성곽에서 담양호를 바라보니 그 위로 위풍당당한 산세가 펼쳐져 있다.
얼마전 가려다 만 추월산이다.
복원한 성곽
한번 더 추월산에 눈길이 가는 것은 바로 오늘의 이 강천산과 바꿔치기 하였기 때문일까?
성곽을 따라...
왜성을 닮은 듯 성벽의 흐름이 완만한데...
잡초에 묻힌 성곽.
흔적들.
성곽을 따라 걸으니...
저 앞에 북바위가 튀어나와 있다.
금성산성 산성산 연대봉 603m
조망은 산자락을 다 잡아준다.
송낙바위로 내려가려다...
'송낙바위 가는 길' 푯말.
엥이~ 북바위로 방향을 틀었다.
다시 성곽을 걸어...
삼각점을 밟고...
성곽으로 난 길을 따라...
북바위 정면에 섰다.
북바위는 절벽으로 내려 갈 수 없었고,앞에 시루봉이 보인다.
북바위를 우회하여 돌아나오면 만나는 이정표.
아래에서 보면 거대한 북바위다.
구장군폭포로 내려가는 길은 북바위에서 바로 있다.
조금 내려서면 만나는 이정표.
나는 이 지점에서 젊은 청년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담양으로 가는 길을 묻고 있었는데,갈 길이 바쁜 나는 흡족한 길잡이가 되어주지 못하고 갖고 있는 지도를 건네며 능선을 넘어야만 되니 잘 찾아가라고만 말하였다.
나는 그것이 내내 걸렸다.(순창군에서 세운 이정표에는 담양에 관한 방향은 일러주지 않는다.)
또 이정표.
비룡폭포는 패스.
비룡폭포가 바로 구룡폭포다.
목교를 지나면서 보니...
바로 선녀계곡 입구이다.
계곡을 건너 돌아본 내가 내려온 길은 오른쪽 방향.
거대한 바위 벼랑이 펼쳐진다.
현위치 사방댐 삼거리.
바로 구장군 폭포다.
아홉장수가 자결하려다 죽기로 싸우자하여 승리하였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거대한 바위벼랑을 타고 가는 물줄기가 떨어진다.
왼쪽에서 두 번째. 이 넘은 진짜 자연폭포가 확실하다.
왼쪽것은 능선자락에서 떨어지니 짜가가 맞는 성싶고...
아래에서 올려다 본 현수교가 하늘에 매달려 있다.
구장군폭포 안내문
강천사를 다시 들린다.
강천사 오층석탑은 지방유형문화재 제 92호
이 5층 탑(塔)은 고려 충숙왕(忠肅王) 3년(1316)에 덕현선사(德玄禪師)가 강천사(剛泉寺)를 중창(重倉)할 때 세운 것이라 한다.
6.25동란 때 강천사의 전체 건물이 소실(燒失)될 때 이 탑도 화를 입어 도괴된 바 있다.
그 후 1959년 강천사(剛泉寺)를 다시 세울 때 탑 (塔)도 다시 세우게 되었다.
다보탑(多寶塔)의 높이는 2.5m이고 5층탑으로 되어 있는데, 현재 2,3,4층의 옥개석(屋蓋石)이 6.25당시의 총탄(銃彈)에 의해 일부가 파손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주변에는 파손된 석등(石燈)의 중대석과 보주(寶柱)가 일부 남아 있으며 당간지주(幢 竿支柱) 4기(基)와 가공된 석재(石材)들이 몇 개 흩어져 있다.
안내문
한 켠엔 돌물확이 아무렇게나 ...
대웅정 앞의 키 작은 당간지주.
.
발걸음을 재촉하며 내려오는데 길옆 바위에 각자가 새겨져 있다.
옥천구우(玉川九友)라 새겨져 있고 신창섭을 위시한 아홉명의 사람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옥같은 강천천에 9명의 난봉꾼들이 난장판을 벌렸다.(?)라는 뜻일 것.
아래의 그림은 다산 정약용이 강진유배시절 아내의 낡은 치마폭에 그린 ‘매조도(梅鳥圖)’라는 그림이다.
그림에는 매화나무 가지에 앉은 참새 두 마리가 먼 데를 바라보고 있다.
그 아래에 한시가 적혔는데,제목은 '시집가는 딸아이에게...'이다.
翩翩飛鳥 (편편비조)
息我庭梅 (식아정매)
有烈其芳 (유열기방)
惠然其來 (혜연기래)
爰止爰棲 (원지원루)
樂爾家室 (낙이가실)
華之旣榮 (화지기영)
有賁基實 (유분기실)
시집가는 딸아이에게..
사뿐사뿐 새가 날아와
우리 뜨락 매화나무 가지에 앉아 쉬네.
매화꽃 향내 짙게 풍기자
꽃향기 그리워 날아왔네.
이제부터 여기에 머물러 지내며
가정 이루고 즐겁게 살거라!
꽃도 이제 활짝 피었으니
열매도 주렁주렁 맺으리~
- 다산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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