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羲之 《蘭亭集序》 臨摹本 (왕희지 <난정집서> 모사본)
옛날 중국 주(周)나라 때부터 음력 3월 초순, 정확히는 지지(地支) 중 "사(巳)"의 날에 해당되는 때에 "수계(修禊)"라는 것을 행하는 풍습이 있었다. 수계(修禊)란 본래는 물가에 가서 액을 쫓고 복을 비는 일종의 제사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위진남북조 시대부터 이것이 물가에 가서 술 마시고 노는 풍습으로 (변질?)되었다. 그리고 수계(修禊)를 행하는 날짜도 음력 3월 3일로 고정되었다.
서기 353년 음력 3월 3일, 왕희지(王羲之)는 문인들과 함께 절강(浙江)성 소흥(紹興)시 근처에 있는 난정(蘭亭 : 이름만 봐선 정자같음~)이란 곳엘 놀러갔다. 그 곳에서 옛날 신라(新羅)의 임금들이 안압지(雁鴨池)에서 하던 것과 비슷한 놀이를 하며 놀았다. 무슨 놀이냐 하면 술잔을 물에 띄워 그 술잔이 떠내려 가다가 멈추면 그 술잔 멈춘 곳에 앉아있던 사람이 시를 짓는 놀이...만약에 시를 못 지으면 벌주를 마시는 놀이(한때 대학생 술자리에서 유행했던 Game of Death의 원형에 해당하는 놀이??)...를 하며 놀았다. 참고로 이러한 놀이를 "유상곡수(流觴曲水)"라고 한다. 술잔(觴)을 구부러진(曲) 물줄기(水)에 떠내려 보낸다(流)는 의미다.
이렇게 술 마시고 놀면서 지은 시가 총 37수(본래 총 41명의 문인들이 놀러갔다고 했는데, 시가 37수만 나온 걸로 봐서 4명은 벌주 마셨나보다~)... 왕희지는 이날의 놀이를 기념하기 위해 그 시들을 모아 문집을 만들고 스스로 직접 서문을 썼다. 이렇게 해서 쓴 서문이 바로 <난정집서(蘭亭集序)>다. (문집 이름은 당연히 <난정집(蘭亭集)>)
하지만 이 <난정집서>의 진본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이 <난정집서>의 진본(아니, 정확히 말해 왕희지의 글씨체)을 너무 너무 좋아한 나머지 자신이 죽을 때 순장품으로 함께 매장해 버렸기 때문이다(세민아~ 세민아~ 니 눈만 눈이고 우리들 눈은 얼굴 가죽이 모라자서 뚫어놓은 것이냐! 니 덕분에 우린 영원히 진본을 못보게 되었다!!!). 때문에 오늘날 전해지는 <난정집서> 글씨는 죄다 모사품이다.
모사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당나라 때의 서예가 "빙승소(憑承素)"가 모사했다고 전해지는 "신룡본(神龍本)"으로 현재 중국 북경 자금성(紫禁城)의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에 소장되어 있다.
"신룡본(神龍本)" 난정집서는 아래와 같이 생겼다.
원래는 위와 같이 가로로 긴 한 장인데 漢字가 잘 안 보여서 내가 뽀샵으로 아래처럼 뎅겅 잘랐다.
잘 보면 글씨 틀리게 써서 붓으로 북북 지운 자국도 있고, 중간에 崇山(숭산 : 높은 산이란 뜻)이란 두 글자를 빼먹고 써서 그 옆에 간신히 써 넣은 흔적도 보인다(오른쪽에서 넷째줄 윗부분).
위 "난정집서 신룡본(神龍本)"은 행서(行書)체로 총 28줄 324字로 되어있으며, 본문에 나오는 20여개의 갈 지(之) 字의 글자 모양이 모두 다르다고 한다. 전문(全文)은 아래와 같다.
永和九年歲在癸丑暮春之初會
于會稽山隂之蘭亭脩稧事
也羣賢畢至少長咸集此地
有崇山峻領茂林脩竹又有清流激
湍暎帶左右引以為流觴曲水
列坐其次雖無絲竹管弦之
盛一觴一詠亦足以暢敘幽情
是日也天朗氣清恵風和暢仰
觀宇宙之大俯察品類之盛
所以遊目騁懐足以極視聽之
娛信可樂也夫人之相與俯仰
一世或取諸懐抱悟言一室之內
或因寄所託放浪形骸之外雖
趣舍萬殊靜躁不同當其欣
於所遇蹔得於己怏然自足不
知老之將至及其所之既惓情
随事遷感慨係之矣向之所
欣俛仰之閒以為陳迹猶不
能不以之興懐況脩短随化終
期於盡古人云死生亦大矣豈
不痛哉每攬昔人興感之由
若合一契未嘗不臨文嗟悼不
能喻之於懐固知一死生為虛
誕齊彭殤為妄作後之視今
亦由今之視昔悲夫故列
敘時人錄其所述雖世殊事
異所以興懐其致一也後之攬
者亦將有感於斯文
-옮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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