潭陽 瀟灑園과 여름휴가, 그리고 배롱나무 시 10편
- 소쇄원 주차장에서 만난 배롱나무 -
가끔 시를 읽다보면 만나게 되는 배롱나무.
궁금했지만 그때 뿐, 알 기회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이번 여름휴가 때 담양과 순창, 곡성에 가서야
왜 그리 많은 배롱나무를 시에서 만나야 했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있는 곳에 함께 있고
사람이 사는 곳에 함께 사는 배롱나무
가로수로 줄지어 서 있기도 했습니다.
내가 찾아간소쇄원에도
어김없이 배롱나무는 있었습니다.
당진형수사망급래 - 이종성
내 눈물은 배롱나무꽃이다.
누군가에게 영혼을 바쳐본 이는 안다.
마음이 마음을 지나면 그 색으로 물이 든다는 것을,
내게도 안팎으로 곱게 물들던 시절이 있었다.
유년의 바깥마당 환하게 핀 나무 아래로
꽃이 되어 걸어 들어온 사람 있었다.
그날부터 뭉실뭉실 하늘에는 꽃구름이 일었고
산 너머 종달새는 보리밭을 푸르게 일으켰다.
밤에는 별을 따라 반딧불이 어둠을 날았다.
마음이란 그렇게 하나의 삼투현상이어서
색깔이 바뀌고 날개를 달아주는 신비한 현상
처음으로 그때 한 사람의 색으로 치환이 되었다.
그 후로 나는 세상의 어느 색으로도 물들지 못했다.
지금, 형수님 산소엔 배롱나무꽃이 한창이다.
간밤 비에 젖은 봉오리 뚝뚝 지고 있다.
아직도 떨리는 손에 든 한 통의 비보
글씨 위로 꽃잎이 붉다.
제 9회 수주문학상 <우수상>
- 멀리서 본 소쇄원 광풍각 -
배롱나무는 백일홍이라 불리기도 하고
목백일홍이라고도 한답니다.
꽃멀미로 어지럽다고 한 시인도 있습니다.
그 여름의 끝 -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 소쇄원 광풍각 뒤쪽에서 -
길 옆 가로수로 배롱나무가 줄지어 서있기도 했습니다.
위험을 무릅쓰며 갓길에 차를 세우고
배롱나무를 카메라에 담기도 했습니다.
나의 연못, 나의 요양원 - 황지우
목욕탕에서 옷 벗을 때
더 벗고 싶은 무엇인가가 있다
나는 나에게서 느낀다
이것 아닌 다른 생으로 몸 바꾸는
환생을 꿈꾸는 오래된 배롱나무
탕으로 들어가는 굽은 몸들처럼
연못 둘레에
樹齡 三百年 百日紅 나무들
구부정하게 서 있다
만개한 8월 紫薇꽃
부채 바람 받는 쪽의 숯불처럼
나를 향해 점점 밝아지는데
저 화엄탕에 발가벗고 들어가
생을 바꿔가지고 나오고 싶다
불티 같은 꽃잎들 머리에 흠뻑 쓰고
나는 웃으리라, 서울서 벗들 오면
상처받은 사람이 세상을 단장한다
말하고, 그들이 돌아갈 땐
한번 더 뒤돌아보게 하여
저 바짝 藥오른 꽃들
눈에 넣어주리라
- 멀리서 본 소쇄원 전경 -
한번 배롱나무를 생각하자
가는 곳마다 배롱나무만 눈에 보였습니다.
마치 잊어버렸던 옛 사랑의 이름을 기억해낸 듯 했습니다.
배롱나무꽃 - 정성수
오백 살 배롱나무가 선국사 앞마당에
가부좌를 틀고 있다
염화시중의 미소를 띠고서
여름밤 폭죽처럼 피워 낸
저 붉은 꽃들
깡마른 탁발승이 설법을 뿜어내는지
인연의 끈을 놓는 아픔이었는지
이승에서 속절없이 사리(舍利)들을 토해내고 있다
배롱나무꽃
붉은 배롱꽃은 열꽃이다
온 몸으로 뜨겁게 펄펄 끓다가 떨어진 꽃잎 자국은
헛발자국이다
피기는 어려워도 지는 것은 금방인 꽃들은
저마다 열병을 앓다가 진다
저물어가는 여름 끝자락에
신열을 앓다가 가는 사람이 있다
배롱꽃처럼 황홀하게
무욕의 알몸으로 저 화엄 세상을 향해서
쉬엄쉬엄
* 선국사 - 전북 남원시 교룡 산성 내에 있는 사찰
- 소쇄원 입구 -
여기도 배롱나무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수줍어하듯 작은 꽃.
붉지만 요염하지 않은 색.
매일 지면서도 매일 새로운 꽃
동학사 배롱나무 - 강가람
눈오는 날, 동학사 계곡에서 배롱나무의 껍질을 보았다
발치에 수북이 벗어놓은, 아이의 살 냄새가 배인
이 세상에서 가장 순한 껍질을 보았다
연하디 연한 신생아의 살 냄새가 배인 배냇저고리 같았다
눈 속의 껍질 하나를 주어 손바닥에 올려놓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양수가 아직 채 마르지도 않아
촉촉한 무늬결 따라 힘줄을 감싸고 있던
붉은 실금들이 선명하다
눈을 맞아 반짝이는 내 손바닥의 손금들처럼
저들의 생애도 저 실금 속에 다 들어 있을까
배롱나무에 등을 기댄 채
웅크린 가슴팍을 포개어 눈발을 맞고 있는
껍질들을 내려다보았다
눈송이가 등에 닿을 때마다 껍질 사이로 무언가 반짝이고 있었다
가슴팍에 가득 품은 좁쌀 같은 것들이
수정알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상처의 껍질도 벗어버리면
아이처럼 순한 눈빛의 사리가 된다는 것을
그날, 나는 동학사 배롱나무에게서 처음으로 배웠다
- 소쇄원 담장 -
소쇄원에서도 배롱나무를 보고
순창장에서도 배롱나무를 보고
곡성가는 길에서도 배롱나무를 본 듯 착각할 정도로
배롱나무는 내게 깊게 다가왔습니다.
목백일홍 - 도종환
피어서 열흘 아름다운 꽃이 없고
살면서 끝없이 사랑 받는 사람 없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말을 하는데
한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석달 열흘을 피어 있는 꽃도 있고
살면서 늘 사랑스러운 사람도 없는 게 아니어
함께 있다 돌아서면
돌아서며 다시 그리워지는 꽃 같은 사람 없는 게 아니어
가만히 들여다보니
한 꽃이 백일을 아름답게 피어 있는 게 아니다
수없는 꽃이 지면서 다시 피고
떨어지면 또 새 꽃봉오릴 피워올려
목백일홍나무는 환한 것이다
꽃은 져도 나무는 여전히 꽃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제 안에 소리없이 꽃잎 시들어가는 걸 알면서
온몸 다해 다시 꽃을 피워내며
아무도 모르게 거듭나고 거듭나는 것이다
- 소쇄원 霽月堂 -
소쇄원 48경이라하여 휴가계획때는
제법 많은 시간을 할애했지만,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하루에 다 돌아볼 수 있을까 했지만,
두어 시간으로 끝낼 수 있었습니다.
배롱꽃 - 오세영
아름다움이 애인의 것이라면
안식은 아내의 것
무더운 여름날
아내의 무릎에 누워
그녀의 시원한 부채질 바람으로
낮잠을 자본 자는 알리라
여자는 향그러운 꽃 그늘이라는 것을
꽃의 아름다움보다는
그늘의 안식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형체가 느려
꽃보다 그늘이 넉넉한 꽃
神은
이 지상의 간난(艱難)을 위해서 미리
배롱꽃을 예비해두셨다
- 소쇄원에서 물놀이하는 아이들 -
예전에 우연히 들르게 된 청계천에 실망한 적이 있습니다.
청계천을 복원한 것이 아니라
인공청계천을 만들어 놓은 것이었습니다.
한강물을 펌프로 끌어다가
거대한 인공어항을 만들어놓은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소쇄원은 자연과 어우러져
자연 속에 원래 있었던 것처럼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20세기가 간다 - 안도현
자기 살을 자기 손으로 떼어내며
백일홍이 지고 있다
백일홍은 왜
자기 연민도 자기에 대한 증오도 없이
자신한테 버럭 소리 한번 지르지도 않고
뚝뚝, 지고 마는가
여름 한낮, 몸속에 흐르던 강물을
울컥울컥 토해내면서
한 마리 혼절한 짐승같이 웅크리고 있는 나무여
나 아직도 너에게 기대어
내 몸을 마구 비벼보고 싶은데
혼자서 피가 뜨거워지는 일은
얼마나 두렵고 쓸쓸한 일이냐
女中生들이 몰래 칠한 립스틱처럼
꽃잎을 받아먹은
지구의 입술이 붉다
그 어떤 고백도 맹세도 없이
또 한 여자를 사랑해야 하는 날이 오느냐
- 소쇄원 광풍각과 담장 -
팔월의 한낮 땡볕조차 배롱나무꽃을
어쩌지는 못했습니다. 살갗이 다 벗겨진 듯
매끄러운 속살을 드러내고 있기도 했지만
꽃은 여전히 붉게 피어 있었습니다.
배롱나무 꽃 그늘 - 윤은경
불현듯 열릴 것이네
석 달 열흘 기다려 아주 잠깐 열렸던, 다시는 열고 들어갈 길 없는 문,
그늘은 아무런 말이 없지만, 어쩌나 염천의 푸른 하늘 열꽃 툭툭 터지듯
내 피돌기는 더욱 빨라지는데, 여기 섰던 당신,
이글이글 타오르는 물길, 불길 지나쳐버렸네
이 나무 아래서 오래 벌서듯 다시 수 없는 석 달 열흘을 기다린다면
수 없는 허공이 생겨나고, 수없는 문들이 피어나고,
거기 눈 맞춘 내 어느 하루, 선연히 꽃빛 물든 당신,
붉디붉은 향기의 오라에 묶인다면
새끼손톱만한, 내 일생일대의 두근거림은, 다시
시집 『검은 꽃밭』(애지, 2008) 중에서
- 소쇄원에서 -
팔월의 무더위속에서 내 여름휴가는 지나가고 있습니다.
다음 순창장과 곡성을 항하여 디시 걸음을 옮깁니다.
배롱나무 꽃 - 정진규
어머니 무덤을 천묘하였다 살 들어낸 어머니의 뼈를 처음 보았다
송구스러워 무덤 곁에 심었던 배롱나무 한 그루 지금 꽃들이 한창이다
붉은 떼울음, 꽃을 빼고 나면 배롱나무는 골격(骨格)만 남는다
촉루(髑髏)라고 금방 쓸 수도 있고 말할 수도 있다
너무 단단하게 말랐다 흰뼈들 힘에 부쳐 톡톡 불거졌다
꽃으로 저승을 한껏 내 보인다 한창 울고 있다 어머니,
몇 만리를 그렇게 맨발로 걸어 오셨다
2013년 8월 19일 옮겨적은이,사진/비온뒤에
배경음악/Acker Bilk/Stranger on The Sh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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