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담양 명옥헌에서 ○●○
이글이글 배롱나무 ‘붉은 열꽃’ 바알간 숯불싸라기로 누웠네
‘뜨거운 뙤약볕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꽃봉오리 터지던 날/
진분홍 주름치마 나풀거리며/
살랑이는 바람결에 살포시/
미끈한 속살 내비치는 한여름의 청순한 화신이여!/
제 안에 소리없이 시들어가는 걸 알면서도/
온몸 다해 다시 피워내어/
폭죽처럼 터져 선혈처럼 낭자하다/
반들반들한 수피에 붉는 간질나무여/
화려한 꽃그늘 밟으며/
꽃폭죽 맞으며 여름 가고/
꽃카펫 밟으며 가을 온다.
’(조선윤의 ‘배롱나무꽃’에서)
담양 명옥헌정원 시냇물바닥에 지천으로 떨어진 배롱나무꽃잎들. 핏빛처럼 붉고 비단꽃이불처럼 화사하다. 물 위에 작은 꽃잎배들이 점점이 떠다니고, 바윗돌 등짝엔 비단 이불 펼쳐졌다. 배롱나무꽃은 땅에 떨어져서도다시 한 번 붉디 붉은 꽃을 피운다. 담양 명옥헌=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어머니 무덤을 천묘하였다
살 들어낸 어머니의 뼈를 처음 보았다
송구스러워 무덤 곁에 심었던 배롱나무 한 그루
지금 꽃들이 한창이다
붉은 떼울음,
꽃을 빼고 나면 배롱나무는 골격만 남는다
너무 단단하게 말랐다
흰 뼈들 힘에 부쳐 툭툭 불거졌다
꽃으로 저승을 한껏 내보인다
한창 울고 있다
어머니, 몇 만리를 그렇게 맨발로 걸어오셨다
-정진규 ‘배롱나무 꽃’ 전문
연못에서 바라본 명옥헌 배롱나무 숲. 정자는 꽃숲머리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연못물에 꽃구름이 돋았다.
깡마른 몸에 우우우 열꽃이 돋았다. 피가 펄펄 끓어 선홍빛이다. 농부의 종아리처럼 툭툭 힘줄 불거진 거죽에 붉디붉은 꽃숭어리가 불화로처럼 발갛게 달아올랐다. 멀리서 보면 붉은 꽃무늬 양산이 둥글게 활짝 펼쳐있다. 노을에 빨갛게 달아오른 뭉게구름 같기도 하다.
늦여름이 배롱나무꽃과 함께 자글자글 익고 있다. 바람이 잘디잔 꽃눈깨비를 흩날린다. 땅바닥에 핏자국이 질펀하다. 석 달 열흘 피고 지고, 지고 피는 나무백일홍(木百日紅) 꽃. 사람들이 ‘백일홍나무’라고 자꾸 웅얼거리다 보니, 어느샌가 소리 나는 대로 ‘배롱나무’가 되었다. 배롱나무 줄기는 매끈매끈한 알몸이다. 나무껍질 같은 건 군더더기. 발가벗은 몸에 간지럼 태우면, 까르르 꽃들이 웃는다. 그래서 ‘간지럼나무’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훨훨 벗은 나무. 마른명태 같은 몸뚱이에 어찌 그리 예쁘고 깜찍한 등불을 우르르 매달았을까. 그래서 절집에서는 무욕, 무소유의 상징이다. 한 점 욕심이나 집착이 없는 깨달음의 경지다. 뼈와 가죽만 남은 채로 구불퉁 뒤틀려 있는 절마당 배롱나무. 그 반질반질 화석과 같은 몸에서 ‘붉은 사리 꽃’을 끝없이 토해낸다. 맨발탁발의 늙은 스님이 저잣거리의 중생들에게 샘물 같은 설법을 터뜨리는 것 같다.
전남 담양 명옥헌(鳴玉軒)의 배롱나무 숲은 조선 선비의 정원이다. 그곳은 닭 벼슬만도 못한 관직을 훌훌 털어버리고 고향에 숨어 살던 명곡(明谷) 오희도(1584∼1624)의 보금자리였다. 오희도는 인조 임금(1595∼1649)이 왕이 되기 전인 능양군 시절 세 번이나 찾아가 시국을 논했던 인물. 명옥헌 마루에 오늘날까지 ‘三顧(삼고)’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이유다. 삼국지에서 ‘유비가 제갈공명을 세 번 찾았다’는 ‘삼고초려’의 그 ‘삼고’다. 명옥헌이 있는 후산마을엔 능양군이 오희도를 찾아왔을 때 말고삐를 맸다는 늙은 은행나무 ‘繫馬杏(계마행)’도 우뚝 서있다.
명옥헌은 오희도의 넷째 아들 오이정(1619∼1655)이 지은 정자.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지붕으로 고졸하면서도 멋들어지다. 꾸밈이 없으면서도 품격이 있다. 오이정은 정자 앞뒤에 두 곳의 연못을 파고 주변에 스물여덟 그루의 배롱나무와 다섯 그루의 소나무, 느티나무 등을 심었다. 연못은 네모지게 팠고 그 가운데엔 둥근 섬을 만들었다. 당시 우주관이었던 ‘땅은 네모지고 하늘은 둥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나타낸 것이다. 명옥헌은 그 곁을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마치 구슬이 부딪치는 소리 같다 하여 지은 이름이다. 정자 현판 글씨는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쓴 것으로 알려졌다.
우암 송시열의 鳴玉軒(명옥헌) 현판 글씨.
명옥헌 배롱나무꽃은 이달 중순이 절정이다. 네모 연못 가운데 둥근 섬의 배롱나무꽃이 지난주부터 우우우 피기 시작했다. 못가 배롱나무꽃은 이미 흐드러져 꿀벌들의 잉잉거리는 소리가 따갑다. 땅바닥엔 벌써 붉은 꽃잎들이 넉장거리로 질펀하게 누워 있다. 황갈색 흙에 붉은 연지가 점점이 수없이 찍혀 있다.
연못물 속에도 붉은 꽃숭어리가 부얼부얼 구름다발로 피었다. 물가엔 꽃잎들이 떼를 이루어 둥둥 떠다닌다. 붉은 비단띠가 연못허리를 두른 듯하다. 잉어가 퐁당퐁당 뛰어오르고 실잠자리가 낮게 날아다닌다. 매미들은 무논 개구리처럼 끊임없이 울어댄다. 사람들은 저마다 정자마루에 앉아 잠시 땀을 식힌다. 아이들은 마룻바닥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깔깔거린다. 바람이 살랑살랑 슬며시 졸음이 온다. 문득 길손의 눈동자에 붉은 꽃숭어리가 어린다. 발간 노을빛이 참 곱다.
‘다섯 그루의 노송과 스물여덟 그루의 자미나무가/나의 화엄(華嚴)연못, 물들였네/이제는 아름다운 것, 보는 것에도 질렸지만/도취하지 않고 이 생을 견딜 수 있으랴’(황지우의 ‘물 빠진 연못’에서)
▼느릿느릿 어슬렁어슬렁… 가을이 저만치 오네▼
죽녹원∼관방제림∼메타세쿼이아 길
담양엔 수백 년 묵은 ‘늙은 나무숲’이 있다. 담양천 남쪽 둑의 관방제림(官防堤林)이 그곳이다. 조선 인조 때(1648년) 홍수 방지용 둑을 쌓고 나무를 심었다. 제방은 모두 6km. 이 중 200∼400년 나무숲은 2km에 이른다. 이 구역 전체가 천연기념물 제366호로 지정됐다. 구역 안의 177그루 늙은 나무들이 하나하나 이름표를 달고 있다. 1번은 딱 한 그루밖에 없는 아름드리 엄나무. 177번은 도마 만드는 데 으뜸인 팽나무. 50%가량이 푸조나무이고, 그 다음이 느티나무, 팽나무 순. 벚나무, 은단풍, 개서어나무도 눈에 띈다. 관방제림 둑길엔 여기저기 나무 평상이 놓여 있다. 한여름 노인들의 쉼터다.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이기도 하다.
관방제림과 잇닿은 죽녹원은 대나무숲 공원이다. 5만 평 터에 분죽, 왕대, 맹종죽 등 각종 대나무가 빽빽이 서있다. 그 사이사이에 길(총 3.35km)이 있다. 대나무 숲길은 밖보다 기온이 섭씨 4∼7도가 낮다. 맑고 서늘하다.
담양 걷기여행은 죽녹원부터 시작하면 된다. 부근 도립대학과 향교다리 옆에 무료주차장이 있다. 푸른 대숲 속을 거닐다가 향교다리를 건너면 바로 관방제림 둑길이다. 그 길이 끝나면 메타세쿼이아의 열병식 길로 이어진다. ‘살아있는 화석’ 메타세쿼이아. 그 나무터널은 아직 초록이 성성하여 짙푸르다. 황금바늘잎이 우수수 날리는 늦가을까진 한참 남았다.
▼“100일 피는 저 꽃처럼 끊임없이 공부하리”▼
서원, 절집에 배롱나무 심은 뜻은
논산 윤증 고택 배롱나무 다섯 그루(300여 년 추정)도 절정이다.
조상들은 배롱나무를 주로 어디에 심었을까. 사대부집의 정원이나 서원 그리고 절집 대웅전 앞마당에 심었다. 그것은 100일 동안 끊임없이 피고 지는 배롱나무꽃처럼 줄기차게 학문을 닦으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 붉은 꽃망울처럼 처음 먹은 뜻을 쉽게 접지 말라는 경계의 가르침도 있다. 스님들도 마찬가지. 깨달음의 길이 아무리 힘들고 험하더라도 중도에 포기하지 말고 배롱나무 붉은 꽃처럼 끊임없이 마음을 갈고 닦으라는 ‘화두’인 것이다.
390년 정도 된 경북 안동 병산서원 배롱나무나 소론의 영수였던 충남 논산 명재 고택의 늙은 배롱나무(300년 추정)가 그 좋은 예다. 율곡 선생이 태어난 강릉 오죽헌 사당 앞 정원의 450년 된 배롱나무는 생육 가능한 북한계선 지역의 가장 오래된 나무로 친다. 곱게 늙은 절집엔 거의 빠짐없이 늙은 배롱나무가 가부좌를 틀고 있다. 전남 강진의 백련사(200여 년 추정)나 전북 남원 교룡산성의 선국사(500년 추정) 등이 그렇다.
배롱나무는 무덤가에도 심었다. 부산 양정동 배롱나무는 동래 정씨(鄭氏) 시조 묘 옆에 서있다. 800년이나 되는 천연기념물이다. 조상의 음덕을 기리고, 후손의 번영을 바라는 뜻을 담고 있다. 배롱나무는 여인들이 머무르는 사대부 안채 뜰에는 심지 않았다. 매끈매끈 벌거벗은 배롱나무 줄기가 ‘여인의 나신’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조선 숙종 때 선비 명재 윤증(明齋 尹拯·1629∼1714)은 재야의 백의정승이었다. 대사헌 이조판서 우의정 등 수많은 벼슬이 내려왔지만, 단 한 번도 곁눈을 주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의 거두 송시열에 맞서 끊임없이 비판의 상소를 올렸다. 송시열은 한때 그의 스승이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요즘 논산 노성면 교촌리 명재 고택 앞마당엔 늙은 배롱나무 꽃이 한창이다. 고택 앞마당 좌우에 두 그루, 네모 연못 가운데 둥근 섬에 세 그루의 꽃숭어리가 명옥헌 못지않다. 명재 고택은 소박하다. 울타리도 없다. 나무와 숲이 자연스럽게 그 역할을 한다. 왼쪽 장독대 항아리 뒤쪽으로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들이 병풍처럼 서있다. 앞쪽 저 멀리 마을 건너편엔 계룡산이 마른기침 소리를 내며 앉아 있다. 명재 고택은 그의 제자들이 지어준 집. 하지만 명재는 생전에 “과분하다”며 그가 살던 초가집을 떠나지 않았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억센 꽃들이/두어 평 좁은 마당을/피로 덮을 때,/장난처럼/나의 절망은/끝났습니다.’(이성복 ‘그 여름의 끝’에서)
정자의 고장
담양은 누각이나 정자, 원림의 고장. 너무 많아서 하루 일정으로는 힘들다. 정자는 ‘10년을 경영하여 초당 삼칸 지어내니/한 칸은 청풍이요 한 칸은 명월이라…’라는 시로 이름 난 송순(1493∼1583)의 면앙정, 사미인곡 속미인곡의 송강 정철(1536∼1593)의 송강정, 그림자도 쉬어간다는 식영정 등이 있다. 원림으로는 명옥헌은 말할 것도 없고, 소쇄원도 빼놓을 수 없다. 소쇄원은 양산보(1503∼1557)가 스승 조광조의 죽음을 보고, 정치에 진저리를 치며 자연과 더불어 산 곳. 조선 정원의 꽃으로 불린다. 독수정(獨守亭) 원림은 고려 말 충신 전신민이 ‘두 나라를 섬기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조성한 것이다.
한옥찻집 명가은
소쇄원에서 화순 방면으로 조금 가다 보면 반석마을이 나오는데, 그곳엔 숨어 있는 찻집 ‘명가은’(061-382-3513)이 있다. 농가를 개조한 한옥찻집. 단아하고 소박하다. 찻값은 손님이 알아서(한 사람 5000원) 궤짝에 넣으면 된다. 거스름돈도 알아서 챙겨 간다. 녹차와 녹차를 발효한 황차 두 가지만 낸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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