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5대궁궐과 운현궁
1. 경복궁
경복궁은 너무나 잘 알려진 조선 제일의 궁궐이며 우리나라의 상징 이지요
태조 4년(1395년)창건되었는데 "경복"은 시경에 나오는 말로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임진왜란(1592)때 불타 폐허로 남아 있던 것을 고종2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건되었고
현재는 일본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옛 모습을 복원하는 공사가 한창이지요
경복궁은 정문격인 광화문 임금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거나 사신들을 맞았던 근정전
침전으로 쓰였던 강령전, 왕비의 처소인 교태전, 후원인 경회루,향원정
그외에도 지선당,집경당,등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경복궁은 한 왕조의 궁이면서 찬란한 문화의 집결체라 할수있을 만큼 역사적으로도
유서깊고 건축학적으로나 미술사적으로도 그 가치가 높다고 하지요
그래서 찬찬히 둘러보면 경복궁에 담긴 선조들의 지혜와 아름다움을 읽을수 있어요
광화문 해태조각상, 근정전 기단에 조각된 방위신상, 경회루 다리 및 영재교의
석교에 설치된
석조 조각물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최대의 미술품으로 손꼽힌다 하는군요
2. 창덕궁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궁은 경복궁이지요
그러나 실제로 가장 많은 왕들이 집정을 했던 곳은 창덕궁이라 하네요
임진왜란때 경복궁이 불타 버린 이후 고종때 흥선대원군이 복원하기 전까지
270년간 대부분의 임금들이 창덕궁에서 정사를 돌보았지요
창덕궁이 지어진 것은 조선의 3대 왕인 태종에 의해서라 하네요
왕이 휴식을 위해 만든 별궁으로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 해서 동궐로 불리기도 했어요
이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소실되면서 본궁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지요
때문에 실제로 왕실사람들의 생활상을 가장 잘 엿볼수 있는곳이
이곳 창덕궁이라 하는군요
한일합방의 조인식이 열린 곳도 이곳이고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이 머물렀던 곳도
이곳이지요 마지막 왕비였던 이방자여사와 덕혜공주 또한 이곳 낙선재에서
살다가 여생을 마쳤지요 가장 최근까지 사용된 궁궐인 탓에 조선의 궁궐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궁궐이기도 하지요
이로 인해 경복궁을 제치고 창덕궁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어요
태종 5년(1405)에 이궁(離宮)으로 짓고 이름을 창덕궁이라 하였지요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소실된 것을 광해군 2년(1610)에 중건하여 사용하다가
인조반정(1623)으로 다시 불에 탔고 인조 25년(1647) 다시 중건이 시작된 이후
크고 작은 화재와 재건축이 이어졌어요
창덕궁은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때 부터 경복궁 재건 전까지
약 270여년간 법궁의 역할을 대신한 유서깊은 궁궐이지요
1910년 소위 '한일합방'이 인정전에서 체결되었으며
1917년 내전 일대에 대화재가 발생하자 일제는 이를 복구한다는 핑계로
경복궁 내전 건물들을 모두 헐어다 이곳으로 옮겨 짓게 하였지요
또한 역대 왕의 어진을 모신 선원전을 후미진 곳으로 이전하는 등 일제는
의도적으로 경복궁및 창덕궁의 본래에 모습을 많이 훼손했어요
그후 1926년 순종이 대조전에서 승하하자 전각을 헐어
전시장과 각종 편의시설을 마련하여 일반인에게 관람을 허락하기도 했으며
한때 '비원(秘苑)'으로 축소·왜곡되어 불려지기도 했지요
1990년대 대대적인 복원을 통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는 조선시대 아름다운 궁궐의 후원을 엿볼수 있는 유일한 궁궐로 남아있어요
3. 창경궁
창경궁은 창덕궁과 비원을 사이에 두고 동쪽방향으로 자리잡고 있어요
조선 전기인 성종(1469-1494)때 지은 궁이지요
처음에는 왕이 집전을 하던 궁궐이 아니라 왕가의 사람들이 쉬기 위해서
지어진 별궁이었어요
창경궁이 있는 자리는 본래 조선 3대 왕이었던 태종 이방원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아들의 왕권을 가까이서 지켜주기 위해 지은 수강궁 자리이지요
태종은 자신이 형제들과의 권력다툼을 통해 왕권을 장악했던 것을 되새겨
셋째아들인 세종이 왕권을 확고히 다질때까지 지켜주고하 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세종은 창덕궁에 있었고, 아버지 태종과 어머니 원경왕후는
그 옆 수강궁을 짓고 거처하였던 곳이지요
그후 태종이 죽자 수강궁은 비게 되었고 세종마저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옮겨 가면서 한때는 그 쓰임새마저 없어지게 되었어요
이후 수강궁은 단종(1452-1455)이 잠깐 거처한 적이 있으며 세조(1455-1468)가
이곳에서 승하하였고 예종(1468-1469)이 이곳에서 즉위하였지요
수강궁이 궁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성종때라 하는데
이름도 이때 창경궁이라 고쳤다고 하네요
그러나 이때도 집정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 대비(大妃)들을
이곳에 살도록 하기 위해서 였어요
즉 창경궁은 돌아가신 선왕의 여러 왕비들이 왕궁 안에서 왕과 함께
거처하는 것이 불편하여 왕궁 밖의 장소에서 살기를 희망하였기 때문에
새롭게 개축한 것이라 하는군요
성종은 새해와 동짓날에 대비전에 문안을 올리고 나서
명정전에서 백관의 조회를 받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명정전이 조회를 받는
정전으로도 사용되었음을 알수 있어요
또 명정전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문정전은 신하들과 정치를 논의하는 편전이었지요
명정전 뒤쪽에 동쪽으로 비켜서 있는 통명전과 경춘전은 대비전으로 사용되었으며
뒤로는 창덕궁으로 넘어갈수 있는 길이 후원을 통해 나 있었다고 하네요
창경궁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 창덕궁이 본궁으로
사용되면서 부터이지요 왕자들이 주로 창경궁에 거처하면서 창경궁이
자연스레 왕비들의 권력암투장이 되어버렸고 숙종의 사랑을 받던 장희빈이
인현왕후와 암투를 버리다 사사을 당한 곳도 바로 이곳 창경궁 취선당이며
영조가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였던 곳도 바로 이 창경궁 선인문
안뜰이었지요
창경궁은 대한제국이 들어서면서 일제의 압력으로 순종에 의해 창경원으로
격하되면서 일종의 공원으로 취급되기도 하였고
1983년에 이곳에 있던 동물원과 식물원을
지금의 과천 서울공원으로 옮겨가면서 다시 궁궐로서의 모습으로 복원되었어요
현재 창경궁에 남아있는 건물들은 대체로 임진왜란 후에 재건한 명정전을 비롯해
그 회랑과 그 앞문인 명정문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 등 외전과
1834년(순조 34)때 다시 지은 숭문당·함인전·환경전·경춘전·통명전·양화당·
집복헌·영춘헌 등은 내전이지요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세종이 지었던 수강궁 터에 세워진 창경궁은
임진왜란후 창덕궁과 함께 중건되어 그 쓰임새가 더욱 커진 이궁(離宮)이었으며
창경궁은 순조 30년(1830)의 큰 불로 4년후 복구되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건물들은
대부분 이때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요
4. 경희궁
경희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에 있는 조선시대의 별궁으로
광해군 때 건축되어 270여년간 궁으로써 사용되었어요
처음 창건 때는 유사시에 왕이 본궁을 떠나 잠시 사용하던 행궁으로 지어졌으나
궁의 규모가 크고 여러 임금이 경희궁에서 정사를 보았으며 동궐은 창덕궁이라
하였고 서궐은 경희궁이라 불리며 중요시 되었지요
원래 경희궁 자리는 광해군 자신의 이복동생이었던 정원군 소유지였는데
이 곳에 왕기가 있다는 풍수의 말을 믿고 강제로 빼앗아 왕기를 누르기 위해
광해군 8년(1616)에 착공하여 광해군 12년(1620)에 완공 경덕궁이라 했다가
후에 영조의 왕명에 의해 이름을 경희궁이라 바꾸었다 하는군요
5. 덕수궁
덕수궁은 원래 궁터가 아니었지요
태조의 계비였던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무덤인 정릉(貞陵)이
있던 곳이지요 태종때 이 능이 옮겨지고 그 자리에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
집을 지어 살았어요 이후 임진왜란때 경복궁을 비롯해 대부분의 궁궐들이
불에 타버려 의주(義州)까지 피난 갔다가 되돌아온 선조가 거처할 왕궁이 없자
왕실의 개인 저택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이곳을 임시 행궁(行宮)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지요
선조가 1608년 2월에 지금의 즉조당에서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덕수궁은 왕궁으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어요
광해군은 즉위 직후 덕수궁을 경운궁으로 이름을 바꾸고 잠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되돌아 오게 되지요
그러나 광해군은 인목대비와 반목을 하면서 선조의 계비(繼妃)인 인목대비만을
남겨두고 창덕궁으로 옮겨가고 1618년에는 인목대비를 유폐시키면서 경운궁을
'서궁(西宮)'이라 낮추어 부르게 되었어요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인조가 즉조당에서 즉위하면서 왕궁은
이곳에서 완전히 창덕궁으로 옮겨가게 되었지요
이러한 역사를 거쳐 덕수궁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고종 말년이지요
명성황후 민씨가 시해되자 고종이 아관파천하여 러시아 공관옆에 있던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다시 왕궁으로 사용되었어요
이 때를 전후하여 많은 건물들이 지어졌는데 석조전 정관헌 같은 서양식건물도
이때 지어졌어요 1908년 순종이 즉위하면서 창덕궁으로 옮겨가고
이곳 경운궁에 홀로 남게된 고종의 장수를 비는 뜻에서
'덕수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네요
그외 운현궁
운현궁은 경복궁과 같은 궁궐이 아니라 왕족의 친족들이 거주하던 곳을
궁(宮)으로부른 것 중의 하나이지요
궁(宮)은 생활의 공간이며 궐(闕)은 정치의 공간으로서
경복궁이 정치와 궁중생활이 함께 이루어진 곳이었다면 운현궁은 왕족의
친족인 흥선대원군의 일가가 거주하고 생활하던 공간이었어요
그러나 운현궁은 조선조 말기의 역사적 사건들 대부분이
이곳에서 시작된 곳이며 수많은 개혁정책과 쇄국정책이 시행된 곳이었기에
그 역사적 상징성은 크다고 해야 하겠지요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이하응)의 사저였으며 조선 26대 임금인 고종의 잠저(潛邸)
즉 임금이되기 전까지 출생 성장한 곳이지요
철종이 후사가 없이 사망하자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 조씨는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으로 하여금 대통을 계승하게 하였어요
그로 인해(1863년 12월 9일) 흥선군은 흥선대원군으로 부인 민씨는 부대부인으로
작호를 주는 교지가 내려지고 흥선군의 사저는 운현궁으로 불리게 된 것이라 하는군요
경복궁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이지요
광화문을 지나면 정면에 흥례문이 보이지요
영제교를 지면 근정문이 나오지요
근정문은 근정전의 정문이지요
근정전 앞쪽으로 넓은 마당을 조정이라고 하지요
경회루전경
경복궁 근정전
창덕궁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창덕궁의 중문인 진선문
태종 때 백성의 억울함을 알리는 신문고가 설치되었던 곳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정문
창덕궁 인정전
인정전 내부 어좌
왕의 침실인 희정당
왕비의 침실인 대조전
세자가 머물던 성정각
헌종이 지은 전각인 낙선재
고종의 아들 영친왕 이은의 부인인 이방자 여사가 거처했던 곳
복을 내리는 집이란 뜻을 가진 석복헌
조선 마지막 왕인 순조의 비인 순정효황후 1966년 숨을 거둘 때가지 거처했던 곳
조선의 마지막 옹주인
덕혜옹주 1989년 77살의 나이로 숨을 거둘 때까지 머물던 수강재
정신문화를 담당하던 규장각
창경궁
홍화문
홍화문 뒷모습
명정문
창경궁 명정전
덕수궁
대한문 수문장 교대식
덕수궁 중화문
덕수궁 중화전
경희궁
흥화문
숭정문
숭정전
숭정전 어좌.
경희궁 숭정전
운현궁
운현궁(雲峴宮)
운현궁 현판
7운현궁 앞뜰
( 노안당 )
흥선대원군이 거처한 곳으로
고종 즉위 후 주요 개혁정책이 논의 되었던 역사적 장소.
( 노락당 )
운현궁에서 가장 큰 건물이지요
명성황후가 왕비 수업을 받았고 고종과 결혼식을 올린 장소이지요
( 이로당 )
노락당과 함께 안채로 사용하였지요 여자들이 자유롭게 생활할수 있게
남자들이 쉽게 못 들어오도록 ㅁ자형으로 만들었어요
노안당과 노락당의 뒷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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