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덕정에서 짧지만 다소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면 삼거리가 나오고 여기서 왼쪽으로 몇 걸음 옮기면 정자가 하나 보인다. 언뜻 보기에 새 정자인 것처럼 보이는데 취규정(聚奎亭)이란 현판을 달고 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칸에 홑처마 팔작지붕을 올렸는데 인조 18년(1640)에 세웠다고 하지만 현재 건물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것 같다. 단 이곳은 일행의 후미에 서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이 이미 모여 있어 제대로 살피지는 못했다.
여기서 다시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옥류천 영역이 펼쳐진다. 사전에 책을 통해서 떠올렸던 규모보다는 훨씬 자그마한 규모이다.
내리막길에서 옥류천 영역 대략의 모습이 조망되는데 먼저 보이는 건물은 취한정(翠寒亭)이다. 창건연대를 알 수 없는 취한정은 규모와 수법이 취규정과 닮아서 정면 3칸 측면 1칸 홑처마 팔작지붕에 어칸이 협칸보다 현저하게 넓으며, 사면이 벽체나 창호 없이 트인 점도 같다.
취한정을 지나면 옥류천과 소요정에 닿는다. 옥류천은 주어진 자연의 조건을 그대로 살리면서 최소한의 인공을 가하여 만들어낸 물길로, 이곳 옥류천의 가운데 있는 바위 소요암(逍遙巖)과 주변에 넘치지 않는 인공이 베풀어져 있다.
옥류천을 내려다보며 서 있는 사방 한 칸짜리 사모정이 소요정(逍遙亭)이다. 『궁궐지』에는 인조 14년에 세웠다고 하였으나 동시에 당의 시인 두목(杜牧)의 유명한 「산행」(山行)을 성종의 어필로 쓴 현판과 선조의 어필 현판이 걸려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부터 있었던 듯하다. 조선 후기 임금들은 이곳에서 바라보는 경치를 시로 읊고 글로 지었다. 숙종, 정조, 순조 등이 그들인데 이 가운데 정조의 일성록 일부분을 글 말미에 첨부한다.
소요정을 통해 바라보이는 정자가 태극정(太極亭)이다. 원래 이름은 운영정(雲影亭)으로 역시 선조 이전부터 있었던 듯하나 인조 14년 다시 지으면서 이름도 바뀌었다고 한다. 사방 한 칸에 사모지붕을 얹은 정자인데, 세벌대의 장대석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다시 안쪽으로 들여쌓은 외벌대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은 모습에서 작지만 격을 갖추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태극정에서 왼쪽을 바라보면 초가지붕을 인 정자가 있으니 청의정(淸漪亭)이다. ‘청의’는 ‘맑은 잔물결’이란 뜻이다. 청의정은 네 개의 기둥머리에 연결된 창방은 네모지게 하였고, 그 위에 걸린 도리는 팔각이 되도록 연결하였으며, 지붕의 중심에서 퍼져 내린 서까래 역시 처마에서는 팔각이 되도록 마감한 뒤 지붕의 이엉은 둥글게 엮어 올렸다.
청의정 주위에는 작은 논이 있다. 농민의 정서를 체험하려는 배려로 보이는데, 여기서 나온 볏짚으로 정자의 지붕을 잇기도 했다 한다. 선조의 어필 현판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이전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그 뒤 인조 14년(1636)에 새로 지었으며 정조의 시 두 수가 전한다. 태극정·청의정·소요정은 창덕궁 후원의 아름다운 세 정자란 뜻으로 ‘상림삼정’(上林三亭)이라 불렸다.
소요정 동편에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一자로 된 맞배지붕집이 한 채 있다. 농산정(籠山亭)이다. 정자치고는 크기도 크고 형태도 남다른 집인데 언제 지어졌는지는 확실치 않은 채 정조, 순조, 효명세자가 자주 이용하면서 시문을 남겼을 뿐 아니라 입직한 신료들에게 글을 짓게 한다거나 성균관 유생들에게 경전을 강론하게 하였다고 한다.
* 일성록(日省錄) 정조 18년 갑인(1794,건륭 59) 3월15일(임인)
정조는 이날 영의정 홍낙성(洪樂性), 영중추부사 채제공(蔡濟恭), 판중추부사 김희(金憙) 등 대소신료와 그들의 가족들을 동반하여 내원(內苑)에 나아가 꽃을 감상하고 낚시질을 하였다. 먼저 부용정(芙蓉亭)으로 나아간 뒤 “상원(上苑)은 꽃이 더욱 아름다우니, 이어 경들과 옥류천(玉流泉)의 수석(水石)을 함께 감상하는 것이 좋겠다. 경들이 걸음을 걷기가 어려울 듯하니, 편리한 대로 먼저 나아가라.”고 말한다. 이에 홍낙성, 채제공, 김희 등이 명을 받들고 물러나 먼저 농산정(籠山亭)에 나아갔다.
정조는 의춘문(宜春門)으로 나가 능허정(凌虛亭)을 거쳐 소요정(逍遙亭)에 이르러 잠시 머물렀다. 그리고 신하들에게 정자에 머물러 앉아 있거나, 유상곡수(流觴曲水)에 벌여 앉도록 한 뒤 청의정(淸漪亭)에 나아가 잠시 쉬었다가 이어 농산정에 나아갔다. 여기서 정조는 이곳의 정자들을 重修한 자신의 원칙을 말한다.
“상원의 정자는 열성조(列聖朝)께서 건축하신 것으로 간간이 무너진 곳이 많았다. 내가 조상의 사업을 계승하는 취지에서 일일이 수리하고 단청(丹靑)을 다시 했으나, 그것도 모두 옛일을 그대로 따라 옛 제도를 준수했을 뿐이고 일찍이 서까래 한 개나 기와 한 장도 옛 것보다 늘린 적이 없었으니, 경들은 내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여기에 시가 없어서는 안 된다. 마침 시 1편을 지었으므로 경들에게 보여 주니, 경들은 모두 화답하여 지으라.” 하였다. 정조가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이 자리 나라 원기 다 모였으니 / 此筵元氣會
오늘은 온 집안이 봄이로구나 / 今日一家春
꽃나무는 겹겹이 포개어 있고 / 花木重重合
못 물은 출렁출렁 싱그러워라 / 池塘灩灩新
그대들 모두가 측근에 있으니 / 諸君皆地密
약간 취한 모습도 보기 좋아라 / 微醉亦天眞
작은 노 저으며 모두 흥에 겨워 / 小棹齊乘興
궐 숲에 달 뜨기만 기다리누나 / 宮林待月輪
이어 정조는 부용지 옆 영화당(暎花堂)으로 가서 활쏘기를 하고, 부용지로 가서 신하들과 함께 낚시를 한다. 고기는 잡는 대로 다시 살려주었다고 쓰여 있다. 밤이 되자 홍낙성, 채제공, 김희 등 연로한 신하들은 체력을 우려하여 먼저 들여보내고 뱃놀이를 한다. 달빛이 좋기는 했지만 등촉(燈燭)도 밝히고, 임금이 먼저 시를 짓고 신하들이 화답한다. 정조의 시는 이렇다.
세심대서 꽃놀이 이 누각서 또 뱃놀이 / 心臺花會又玆樓
이것으로 올봄엔 잘 놀았다 하겠네 / 爲是今春可樂遊
이 밤에 임금 신하 함께 축원하는 것은 / 此夜君臣同祝意
고목 위에 떠오른 달 오래오래 머무는 것 / 萬年枝上月長留
[한국고전번역원 이강욱 (역)]
正祖의 전성기, 어느 봄날의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인용 설명문 출처: 답사여행의 길잡이, 한국고전종합DB, 창덕궁 소개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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