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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영남 사림의 자부심, 점필재 김종직

餘香堂 2015. 4. 16. 08:37

영남 사림의 자부심, 점필재 김종직
< 이전전체보기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
시대 현대
집필자 정동락 

 

[개실마을의 정신적 지주 김종직]
개실마을 사람들에게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은 어떤 존재일까? “우리 후손에게 점필재 할배[할아버지]는 삶의 사표이자 본보기입니다.

 

지난 칠십 평생 우리 할배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정말 애써 왔어요. 하지만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나요. 그분이야 학문적으로 대학자요, 청백리의 위정자이자 올곧은 선비의 표상인데…… 만 분의 일, 천만 분의 일이라도 흉내라도 내면서 살아 왔는지 모르겠어요. 앞으로도 우리 개실마을의 후손들은 할배의 정신을 전승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길 낍니다.”

 

선산김씨[일선김씨] 종손의 말처럼 김종직 선생은 개실마을 사람들에게 거의 절대적인 의미를 지니는 선조이다. 이는 마을의 다른 후손들에게도 마찬가지일 듯하다. 김종직 선생에 대한 후손들의 묘사는 「조의제문(弔義帝文)」으로 대표되는 절개, 사림 정치로 대변되는 개혁 정치, 영남학파의 종조라는 조선 도학의 뿌리, 백성들을 우선으로 생각하여 선정을 펼친 위정자로 표현된다.

 

욕봉영묘수성군(欲奉靈苗壽聖君: 신령한 차 받들어 임금님께 축수코자 하나)

신라유종구무문(新羅遺種久無聞: 신라 때부터 전해지는 종자를 오랫동안 구하지 못하다가) 여금힐득두류하(如今擷得頭流下: 지금에야 두류산 아래에서 구하고 보니)

차희오민관일분(且喜吾民寬一分: 우리 백성 조금은 편하게 되는 것이 우선 기쁘네.)

죽외황원수묘파(竹外荒園數畝坡: 대나무 숲 황량한 동산 두어 이랑 언덕에)

자영조취기시교(紫英鳥觜幾時誇: 자영차·조취차 언제쯤 자랑할 수 있을까)

단령민료심두육(但令民療心頭肉: 다만 백성들의 고통을 덜게 하려는 것뿐이지)

불요농가속립아(不要籠加粟粒芽: 속립아 농에 담아 진상하기를 바라지 않네)

 

이 작품은 김종직이 40세 되던 1470년(성종 원년) 함양군수로 재임할 때 지은 「다원(茶園)」이란 시로 『점필재집』 권10에 수록되어 있다.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부임하기 전 함양군에서는 진상품으로 바치던 차가 생산되지 않아 매년 전라도에 가서 비싼 비용을 들여 구입했다. 이에 김종직이 지리산에서 차의 묘목을 구해 와 차밭을 만들어 백성들의 고통을 해결해 주자 군민들이 그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선정비를 세우고 생사당을 지어 참배했다고 한다.

 

이 사건은 개실마을 사람들에게 각인된 김종직의 애민 정신과 성리학적인 수기치인의 실천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어떤 점에서 김종직의 생애를 이해하는 것은 개실마을 사람들의 정체성을 밝히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영남 사림파의 종장이자, 조선 성리학의 토대를 마련한 김종직의 생애를 대략 정리해 본다.


[김종직의 생애와 활동]
김종직은 1431년(세종 13) 밀양의 서쪽 대동리(大洞里)[일명 한골]에서 아버지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와 어머니 밀양박씨 사이에서 3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성장하면서 길재(吉再)를 계승한 아버지에게 가학(家學)을 전수 받았는데, 특히 어릴 때부터 시를 잘 지어서 이름을 크게 떨쳤다.

1448년(세종 30) 아버지를 따라 상경하여 ‘남학(南學)’에 입학하면서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1453년(단종 원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했고, 1457년(세조 3)에는 유명한 「조의제문」을 짓고, 1459년(세조 5) 과거에 급제하였다.

성장기의 김종직은 학문적으로는 정몽주(鄭夢周)-길재-김숙자-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정통 성리학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김종직은 1459년(세조 5) 문과에 급제하면서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다. 급제 후 문행(文行)을 겸비한 문신으로 경연에 참여하고 여러 전적들을 열람함으로써 학식과 경험을 축적하였다. 1464년(세조 10) 왕의 잡학(雜學) 장려책을 반대하다 파직되었으나 곧 복직되어 영남병마평사(嶺南兵馬評事)로 여러 지역을 순행하면서 군사와 무비에도 경험을 쌓았다. 1467년(세조 13) 홍문관수찬이 되었다가 『세조실록(世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470년(성종 원년) 함양군수로 부임하면서 문하에 학도가 운집하였는데, 여기에는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도 있었다. 1476년(성종 7년) 선산부사로 부임했고, 1479년(성종 10) 이후 10여 년간 문한(文翰)·사관(史官)·경연관(經筵官)·전주(銓注)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맡았다. 하지만 집권 세력인 훈구파로부터의 심한 견제와 노령으로 인해 1489년(성종 20) 밀양으로 낙향하였다.

이처럼 김종직은 세조 초에 관직에 나선 후 성종 대에 이르기까지 문한직과 외직을 두루 거친 조정을 대표하는 학자였다. 그는 영남 사림파의 영수로서 사림 세력의 중앙 정계 진출의 기초를 놓았으며, 제자 교육과 성리학의 보급을 통해 사림 정치 성립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김종직은 밀양으로 낙향한 후 학문과 후학지도에 전념하다가 1492년(성종 23) 8월 19일에 작고했다.

사후에 사림파에서는 시호로 문충(文忠)으로 올렸으나, 훈구파의 주장으로 ‘문간(文簡)’으로 시호가 내려졌다.

성종이 그의 글을 찾자 조위(曺偉) 등이 정리하여 제출했으나 간행되기 전에 왕이 죽었다. 몇몇 문인들에 의해 시문이 간행되기도 했으나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年士禍)로 대역죄로 부관 참시되고 문집과 글, 현판 등은 모두 불태워졌다. 그 후 중종반정 이후인 1507년(중종 2)에 벼슬과 시호 등이 되돌려졌다.

 

1520년(중종 15) 후손들이 흩어진 글을 수집하여 선산에서 문집을 간행했고, 1580년(선조 13)에 연보와 『문인록』이 편찬되었다. 1689년(숙종 15)에 영의정에 증직되고 1708년(숙종 34) 9월에 ‘문충(文忠)’으로 시호가 다시 내려졌다.


[조선 도학의 연원이 되다]
김종직과 관련하여 사람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조의제문」이다. 이 글은 김종직이 1457년(세조 3) 10월에 항우에게 죽은 초나라 회왕[의제(義帝)]을 조문하는 내용으로,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을 의제에 비유하여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한 글이다.

뒤에 문인인 김일손(金馹孫)이 사관으로 있을 때 이 글을 사초에 적어 넣었는데, 이것이 무오사화의 발단이 된 것이다. 무오사화는 1498년(연산군 4) 7월 김일손 등 신진 사류가 유자광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이다.

 

성종 대 이후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인 사림파가 중앙에 등용되면서 훈구파와의 대립이 격심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 때 사초에 삽입한 「조의제문」이 문제가 되어 김일손 등 많은 사림들이 화를 입었으며, 김종직은 부관 참시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조선 시대 4대 사화 중 첫 번째 사화로 사초 문제가 발단이 되었다고 하여 ‘사화(史禍)’라고도 한다.

김종직은 학문과 문장, 행정 능력을 고루 갖춘 인물로 도덕과 문장, 인재 양성에 있어 당대 제일의 유종(儒宗)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그의 사상은 한 마디로 15세기 후반 집권 세력인 훈구파에 대항해서 성리학적 윤리 질서를 확립하고 사림 주도형으로 향촌 사회를 건설하며, 훈구파의 전횡을 막고 이상적인 유교 정치를 구현하기 위한 개혁 정치를 추진하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소학(小學)』을 수신제가와 학문의 기초로, 『가례(家禮)』를 성리학적 실천 윤리의 모범으로 삼았다.

그와 함께 유향소(留鄕所)의 운영과 향약, 향사례(鄕射禮)를 통해 재지 사족 주도로 향촌 질서를 확립 운영하고자 하였다. 그는 폭넓은 학문 체계와 역사에 대한 풍부한 식견은 물론, 대의명분과 충절을 강조하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중앙 정계와 서울 중심에서 벗어나 재지 사족과 지방 문화에 관심을 가지기도 하였다.

 

김종직은 영남학파의 종조로서, 조선 시대 도학의 정맥을 이어가는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즉, 그는 위로는 정몽주와 길재, 아버지인 김숙자의 학통을 이어 받아 아래로는 김굉필과 정여창을 거쳐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성혼(成渾), 이이(李珥)로 전수된 조선 시대 성리학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였다. 그는 훈구파가 집권하고 있던 조선 전기 사림파의 종장(宗匠)으로서 성리학의 정착과 사림 정치 수립에 기초를 놓은 성리학자 겸 문장가였다.

 

김종직은 성리학의 가정·사회 윤리를 실천하는 한편 경술(經術)과 사장(詞章)을 겸비하여 당대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칭송받았다. 나아가 평생 동안 후진의 교육 활동에 전념하여 많은 제자를 배출하여 사림파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 김종직이 꿈꾸던 포부와 신념들은 그의 문인들에 의해 다방면으로 계승 발전되어 조선조 사대부 문화의 근간을 이루었다. 이런 점에서 점필재 김종직은 명실공히 조선 도학의 연원이자 정맥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하겠다.


[정보제공]
• 김병식(남, 1933년생, 쌍림면 합가리 주민, 선산김씨[일선김씨] 문충공파 17대 종손)

[참고문헌]
『영남고문서집성』 1(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2)
『고령군지』 (고령군지편찬위원회, 1996)
『점필재 김종직의 학문과 사상』 (금오공과대학교 선주문화연구소, 1996)
『점필재 김종직의 도학사상과 유학사상의 위치』 (밀양시, 2002)
김태우·김기수, 『일선김씨역대기년』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고령 개실마을과 점필재(齋) 김종직(金宗直) 종택

 

내가 2007년 7월에 경남 밀양의 김종직 생가를 찾았으니 그 사이에 7년이란 세월이 바람처럼  지나가버렸다. 7년만에 다시 '점필재 김종직'이란 이름 앞에 섰다. 영남 사림파의 개조로 불리는 그의 고택에서 나는무엇을 느끼며 배우고 갈 것인가. 마음이 설렌다......

 

 

▲개실마을 앞의 비석군 

김종직의 종택이 있는 고령군 쌍림면 개실(開室) 마을 앞에는 세거비와 유적비, 사적비 등 네 개의 비석이 마을을지키고 서 있다. 네 개의 비석에 새긴 글(碑銘)을 읽어 보면 개실 마을의 유래와 김씨 집안의 내력을 미루어 짐작수가 있다.  서 있는 비석은 金氏世居碑(김씨세거비),  義士慶基殿參奉鮮隱金公遺蹟碑(의사경기전참봉선은김공유적비), 兵曹參議佳亭金公遺蹟碑(병조참의가정김공유적비), 金氏五世孝行事蹟碑(김씨오세효행사적비)이다.

 

 

 

 

 

▲ 개실마을 안내도

 

'꽃이 피는 아름다운 골' 이라는 의미의 '개화실(開花室)'이 점차 발음이 간략화되면서 '개실(開室)'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영남 사람학파의 중심인물인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후손들이 350년간

아온 집성촌인 개실마을은 지명답게 봄이면 매화, 목련, 벚꽃이 지천에 핀다. 한옥이 만들어낸 기와

선을 감상하며 정겨운 돌담길 따라 마을을 산책하다보면 오랜 세월동안 기품을 간직한 고택들을

만나게 된다.

  

 

 

▲ 각국어로 표기된 환영 인사말

 

고택체험을 하러 주말이면 많은 내외국인이 개실마을응 들린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여러나라

글로 인사말을 적어 놓았다.

요즈음 국사교육에 관한 논란이 일고 있는데, 고택체험도 좋지만 이곳이 뜻을 굽히지 않은 강

한 선비의 얼이 깃든 곳임을 자라는 아이들에게 주지시키는 일도 매우 중요하리란 생각이다. 지

나간 역사를 잊지않는 민족이 결국은 역사 속에 살아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황하게

느껴지겠지만 이곳을 대표하는 점필재 김종직과 관련된 이야기를 먼저 꺼내어 펼쳐 보기로 한다.

 

 

영남 사림파의 개조(開祖) 김종직과 무오사화

점필재 김종직(1431~1492). 죽은 지 오륙년이 지나서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신마저 찢긴 비극의

 

정치인. 생전에 지은 문집마저 불질러 버려라, 임금이 엄명한 비운의 문인. 그럼에도 영남 사림파의 개조(開祖)로 불리는 대학자. '아닌 것은 아니오', 송곳 같은 정신을 내보인 풍운아. 

 연산군 무오년에 평지풍파를 일으킨 김종직의 글 한 편, 조의제문(弔義帝
김종직은 항우()에게 죽은 초나라 회왕(), 즉 의제()를 조상하는 글을 지었는데, 것은 세조에게 죽음을 당한 단종()을 의제에 비유한 것으로 세조의 찬탈을 은근히 비난한 글이다.

 

 

이 글을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을 때 사초()에 적어 넣었다.

연산군이 즉위한 뒤 《성종실록()》을 편찬하게 되었는데, 그 때의 편찬책임자는

이극 ()으로 이른바 훈구파()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김일손의 사초 중에 이극돈의 비행()이 기록되어 있어 김일손에 대한 앙심을 품고

있던 중,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 중에서 발견한 이극돈은 김일손이 김종직의 제자임을 기()로 하여 김종직과 그 제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사림파()를 숙청할 목적으로, ‘조의제문’을 쓴 김종직 일파를 세조에 대한 불충()의 무리로 몰아 선비를 싫어하는 연산군을 움직여, 큰 옥사()를 일으켰다.

 

이것이 무오사화()인데, 그 결과로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하였고, 김일손·권오복() 권경유()·이목()·허반() 등이 참수()되었다.

 

 

단종을 폐위시킨 세조를 비꼰다는, 그래서 대역무도라는 모함 같은 상소를 연산군이 기꺼이

받아 들인 결과다.

김종직. 그의 학풍은 고려 말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를 잇는다. 전향을 거부하고 피살된 정몽주,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낙향한 길재. 포은과 야은은 평생 뜻을 같이한 동지며 야은은 김종직

아버지 김숙자의 스승이다. 그 학풍은 곧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는 카랑카랑한 정신이

다. 손해볼 줄 뻔히 알면서도 명분이 서지 않는 일은 나서지 않는 꼬장꼬장한 기개다. 

김종직의 그런 학풍과 절의(節義)를 본받아 저절로 모인 게 영남
요샛말로 글이 좋아서 사람이 좋아서 뜻을 모은 것이다. 김종직을 따라서 벼슬길에 나선 사림파언론과 문필을 담당하는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소위 3사에 주로 들어가 집권 세력의 잘못을 꼿꼿하게 꼬집는 악역을 도맡는다. 그리고 이에 반감을 가진 자들에 의해서 앞서의 사화가 일어난다.  사화때 화를 당한 사림파는 연산군 다음 임금인 중종때 복권된다.

 

 

 

▲ 점필재 김종직 종택 전경

 

낮으막한  뒷산의 대나무와 푸른 송림이 고택을 외호하고 있다. 현재, 개실마을에는 점필재 종택과 사당이 위치하고 있다. 김종직(1431~1492)의 본관은 선산, 자는 효관 호는 점필재, 시호는 문충이다. 1431년에 밀양의 서쪽 대동리에서 태어났다. 1457년(세조3)유명한 '조의제문'을 짓고, 1459년 과거에 급제하면서 관료생활을 시작하였다

1470년 함양군수로 부임하면서 문하에 학도가 운집하여 김굉필. 정여창 등이 수학하였다. 그 후 10여년간 문한. 사관. 경연관. 전주 등의 청요직을 계속 맡았다. 1489년 밀양으로 낙향하여, 학문과 후학지도에 전념하다가 1492년에 세상을 떠났다.

 

 

▲ 종택 담장 너머의 모과나무   

 

 

▲점필재 종택 . 경북 민속자료 제 62호

 

이 건물은 선산 김씨 문충공(文忠公) 파 김종직 (金宗直)의 종택으로서 안채는 1800년 경에, 사랑채는 1812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은 마을 뒷산을 등지고 완만한 경사를 이룬 터에 남동향으로자리를 잡고 있으며 안채, 사랑채, 중사랑채, 고방, 대문간,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전체적으로 '튼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건물 내에는 점필재 문적.유품 및 종가문서가 보관되어 있다.

  

 

 

▲ 문충세가(文忠世家) 현판

 

대를 이어 학문정진과 나라에 충성을 다하였다는 집안의 내력을 한마디로 요약한 말이다. 김종직은 고려 말 정몽주. 길재의 학통을 이은 아버지 김숙자로부터 학문을 익히면서 조선시대 도학의 정맥을 계승하였다. 종택은 1800년경에 건립된 이후  몇 차례 중수하였다.

 

 

 

▲ 대문에서 바라본 종택 진입로

 

 

 

▲ 사랑채 대청에서 보이는 안채

  

 

 

▲ 점필재 종택 안채

 

현재 점필재 종택에는 선생의 17대 종손인 김병식 씨가 가풍을 지키며 살고 있다. 문충세가(文忠世家)라 불리는 종택, 김종직의 불천위가 모셔저 있는 사당, 후학을 양성하여 춘추에 향사를 지내던 도연재 등의 건물이 여전히 남아 있으며, 종가 대대로 전해오는 유물 또한 적지않다.

 

종손 김병식 씨가 서장하고 있는 유물들 중 특히 눈에 띄는 것으로는 옥벼루와 술병이 있다. 필옹옥우(筆翁玉友)라고 음각되어 있는 옥벼루는 점필재 김종직이 형조판사를 지낸 후 낙향할 때, 술병 등과 더불어 성종으로부터 하사받은 것인데, 무오사화의 참변으로 잃어버리고 옥벼루와 술병만이 남아 있다.  (Daum자료참조)

  

 

▲ 사랑채 너머로 보이는 사당 

 

 

▲ 점필재 사당

 

종택의 오른쪽 뒤편에 김종직의 불천위 신주를 모신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김종직은 밀양의 예림서원을 비롯하여 김천의 경렴, 선산의 자양, 햠양의 백연, 개령의 덕림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 종택의 대문 

 

 

 

▲ 사랑채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인 사랑채는 특히 측면 들보의 자여적인 곡선이 일품이다. 맞배지붕이면서 측면의 처마가 돌출된 모습이 마치 두 팔을 옆으로 벌려 뜻을 꺾지 않고 당당히 서 있는  고집스러움을 느낀다.  그가 점필재였던 누구였던 간에 영남사림파의 기개가 그리했으리라.... 

 

 

 

 

▲ 점필재의 유물 보존각인 서림각(棲林閣)으로 통하는 곁문에서의 종택 풍경

 

 

 

 

 

무오사화의 비극, 그리고 뒷날의 복권

 

숙종 15년 (1689)에 7대손 김시락이 상소하여 선생의 증직(贈職)과 복시(復諡)를 청했다. 이때 예조판서로 있던 남용익이 입계(入啓)하여 찬성(贊成)을 추증하도록 청했다. 하지만 임금이 특별히 영의정(嶺議政)에 추증했다.

 

그리고 숙종 34년(1709) 예조판서 조상우가 여러사람의 공론으로 주청하여 문간공(文簡公)에서 문충공(文忠公)으로 시호를 되돌려 받았다. 그리하여 연산조의 무오사화(1498) 때 관직삭탈은 물론 부관참시라는 형언키 어려운 참화를 겪었던 선생의 삶은 뒤늦게나마 온전하게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 재사당(再思堂) 이원이 문충공이란 시호를 청하며 올린 글은 다음과 같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온화하고 선량하고 인자하고 은애롭다.

그리고 일찍부터 시례(詩禮)를 배워서 몸소 사도(師道)를 담당하였다. 덕(德)과 인(仁)에 의거하여 충신(忠信)과 독경(篤敬)으로 사람을 가르치는 데에 게을리 하지 않아서, 사문(斯文)을 진흥시키는 일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았다.

 그가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왕도(王道)를 귀히 여기고 패도(覇道)를 천히 여겼으며, 직사(職事)에 임해서는 지극히 간편하게 하여 번거로운 일을 제어하였으며, 사람을 가르침에 있어서는 글을 널리 배우게 하고 예로써 단속하게 하였다.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는 효성을 극진히 하였고,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는 정성을 극진히 하였으며, 남의 착한 일을 숨기지 않았고 남의 악한 일을 들추어내지 않았으며, 청결하면서도 편협하지 않았고 유화하면서 세속에 뇌동하지 않았다. 문장(文章)과 도덕(道德)이 세상에 우뚝 뛰어나  참으로 삼대(三代)의 남긴 인재로서 그 사문에 공(功)을 끼친 것이 중대하다.

법(諡法)에 도덕박문(道德博文)을 문(文)이라 하고, 염방공정(廉方公正)을 충(忠)이라 한다."

 

 

 

▲ 서림각(棲林閣) 앞 점필재 일생의 업적을 알리는 게시판

 

서림각은 점필재 김종직의 유물 보존각으로 유물은 '대가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이곳은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다. 점필재의 개인적인 유물이 많이 있는데, 1482년 경 부인 조씨가 남편인 점필재에게 보낸 편지와 점필재의 손때가 묻은 매화연, 상아홀, 강경승통 등을 김병식씨의 설명을 들으며 볼 수 있다.

 

정성껏 한자 한자써 내려갔음직한 조씨 부인의 편지에는 이두식 표기의 흔적이 남아 있어 당시 아녀자들의 의사소통의 소박한 일면을 엿볼 수 있다.또 매화문양이 아름답게 조각된 벼루, 매화연을 보면. 의제와 단종을 비유하면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하는  " 조의제문 " 을 쓰고 있는 점필재 김종직이 눈앞에 그려진다.

 

무오사화와 임진왜란 그리고 한국전쟁, 종손들은 이 역사의 수난 앞에서 선조의 유물과 그것을 통해 이어져 오는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땅에 구덩이를 파 유물둘을 묻어 놓기도 하고, 궤짝에 넣어 늘 지고 다니기도 하며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개실마을에는 종택과 다른 고택 이외에도 전통혼례장으로 사용되는 화산재(花山齋)가 있다.

 

 

▲ 종택의 돌담길

 

 

 

▲ 개실마을의 공동 판매장

 

몇 해 전에 T.V에서 방영되는 것을 본 적이 있는 나로서는 이 마을에서 만드는 '전통엿'을 사고 싶었는데 평시에는 판매를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때는 아마 방송 때문에 연출을 한 것이려니....

 

 

 

▲ 개실마을의 놀이마당

 

고택체험을 하러 온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놀이 공간이다. 윷놀이나 널뛰기 등 우리 전통민속놀이들이 이 마당에서 펼쳐진다. 사진의 맨 오른쪽이 사당이고 그 왼쪽으로 서림각(棲林閣), 종택이 보인다.

 

 

 

 

▲ 개실마을 입구의 찻집 벽에 걸린 나무옹이 공예

 

 

 

▲ 고택과 고택을 이어주는 마을 안길

 

 

 

 

 

▲도연재(道淵齋) 경북 문화재 자료 제 111호

 

이 건물은 점필재 김종직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지방 유학자들이 조선 고종(高宗) 원년(1886)에 건립하여 유생을 가르치고 제사를 모시는 재실이다. 종택(宗宅)에서 남서쪽으로 약 100m 거리를 두고 있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ㅡ'자형 맞배지붕집이다.

 

 

 

▲도연재(道淵齋) 들보의 자연스런 곡선미

 

 

 

 

▲도연재(道淵齋) 의 건축미. 누마루 형식의 난간을 둘렀다

 

 

 

▲ 도연재 담장 앞의 비석

 

이 비석은 합천에서 고령을 거쳐 서울로 향하는 진상품을 서로 인수인계한 곳에 세운 것으로, 합천군수와 고령현감이 진상품의 인수인계 장소를 확정하고 서로 잊지 않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고령현감 권영규는 1838~1842년 사이에 재임한 인물로, 이 비석은 신축년인 1841년 정월에 세운 것이다. 원래 개실마을 앞으로 난 옛도로 변에 있었던 것을 재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출처 : 慶州金氏大宗親會
글쓴이 : 金錫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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